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벼랑의 사랑을 붙잡다-롤리타

자몽미소 2010. 11. 23. 20:34

책부족의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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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롤리타(세계문학전집 30)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 동경,10대 소녀와 중년의 사랑과 파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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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로리타 (1998)

Lolita 
9.3
감독
애드리안 라인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도미니크 스웨인, 멜라니 그리피스, 프랭크 란젤라, 수잔 셰퍼드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프랑스, 미국 | 137 분 | 1998-10-17

 



 

  • 책을 읽고 내 생각

문학은 <문제적 인간의 문제적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가, 

 

여자 아이만을 사랑하는 나이든 남자를  방송과 신문의 사건 보도에서 접하였다면  분노와 경멸이 당연하였겠지만, 나브코프가 창조해 낸 험버트 교수에 대해선 애처로운 감정이 든다. 중얼거림 같고 항변같은 그의 고백 투의 문장을, 가끔은 이해 안 되는 상황이나 설명을 참아가며 읽은 건 어쩐지 생겨난 그에 대한 동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보니, 가슴 아프게 겪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 가 맞겠다. 이 소설.

 

사랑은 아프다, 위험하다, 맹목적이다, 파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는다, 등등의 사랑공식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첫사랑의 이별과 죽음,  첫사랑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불나비가 되어 버리는 그의 성정, 그리고 자기 삶을 온통 흔들리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격정이 소설 속에 있다.

소설 서두에 님펫에 대하여 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소설 말미에  롤리타가 성장하여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되면 그가 사랑했던 롤리타는 버림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주인공 험버트 교수는 새로운 어린 님펫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롤리타라는 사랑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게 아닐까 상상하며 읽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 버린 롤리타, 롤리타가 임신을 해서 이제는 예전의 아이 모습이라고는 없는데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와의 삶을 이어나가려 하였다.  이런 남자 있나? 있었나? 있을 수 있나? 

있을 수 있겠지, 소설로 나왔으니 문학이란 장치로 이런 남자 세상에 내놓은 게 맞고.

 

어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해 보려고 애는 썼지만 사실 나는  소설에서 창조해 낸 인물이다, 고 전제를 해야만 그를 이해하는 척, 용납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라면 그런 어른을 향해 < 어찌 생각이 그 선까지 뿐이냐고?> 종주먹을 휘두를 것이다. 어른이 되고서 사랑이란 감정도 중요하지만 도덕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구나 다 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현실에서라면 그런 남자, 이해는 커녕 내 옆에 오는 것도 불쾌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한 것은 오히려 작가였다. 어째서 이런 사람을 창조해 내고 싶었을까.

 

 

소설을 읽고, 책 뒤 작가 연보를 보고, 작가가 자신의  이 소설에 대한 평단의 반응에 대하여 쓴 글을 읽고,  역자가 쓴 후기를 읽고 나서야 겨우 나보코프가 가졌던 글쓰는 일에 대한 절실함이 느껴지긴 했다. 그러나 뭐라 말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주인공 남자에 대해서도 또 밤이면 관계를 끝내고 돌아누워 흐느끼는 여자애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남자가 밉지도 여자애가 불쌍하지도 않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문단과 독자들이 해대던 비판처럼, 문학이 보여 주어야 할 사회와 역사의 진실이 없다고 냉소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독백이었다가 어떤 때는 변명이었다가 어떤 때는 소설의 형식을 취한 글쓰기 때문에 읽어 내기 힘들었다거나, 역자가 좀 더 읽기 쉬운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 줄 수도 있잖은가 하는 불만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 태생의 망명객,  유럽으로 갔지만 다시 미국으로 삶의 지평을 옮기며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에 대한 것 외엔 눈과 귀를 닫아버리려 했던 것 같다. 원숭이에게 시킨 교육에 대한 보도를 보고, 소설을 구상했다는데 그 일은 그의 내면을 알 듯 모를 듯 하게 할 뿐이다.  러시아 말 대신 영어로 자신을 표현해야 했던 그 지점에서 그는 교육받는 원숭이처럼 느꼈던 것일까. 교육의 공간, 달라진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기억하는 자신과 얼마나 달라지나 하는 문제, 즉 러시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그에 대한 그리움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잊혀지거나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를 탐구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 나는 알 수 없고 말 할게 없다. 언어가 나타내는 소리와 의미에 대한 민감함이 자주 등장하고 있었던 게 예사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소설과 작가를 이해하는 데 선명한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책을 덮고 남는 이미지란 사랑이라는 벼랑에 매달려 필사적인  한 남자의 모습이다. 사랑에 목을 맨 남자는 때로 어리석고 때로 너무 솔직하다. 가끔 사랑의 흥분에 행복해 하였지만 대부분  그는 독배를 마신 자가 마지막 힘을 내는 것처럼  휘청거린다. 독자로서는 그의 모습에서 사랑이 가진 절망과 비참을 보게 되고, 그러니 그의 사랑에 대해선 도덕적인 토를 달고 싶지가 않았다. 뭐라 말하려고 할 때는 찝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