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책 출판 소감

자몽미소 2019. 12. 12. 14:57


 책이 나왔다.

 2019년 11월 18일이 발행일이었으나, 인쇄제작 사고로 책을 두 번 인쇄하였다. 새로 나온 책의 표지는 이전 책 보다 나아졌다. 공부를 잘하고 모범생이지만 집이 가난하여 번번한 옷을 사 입히지 못하던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힌 것 같았다.


 몇 달 동안 책 편집에 매달렸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해도, 책이 나와서 보면 결국 내 능력의 크기가 여기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장 교정교열에는 최대한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제본소로 간 다음의 일, 종이의 질과 두께, 표지의 색과 질감, 인쇄할 때의 잉크색 같은 것에는 들일 노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분야에는 경험과 지식이 없으니까 인쇄소 담당자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책이 나왔을 때는, 아! 이렇게는 안 되겠는데! 하고 말았다. 가제본 같은 것도 한다는데, 그것도 안 하고 책을 내고 말았다. 몇 천 부나 찍으면서 가제본도 없이 책을 내다니. 그런 걸 요구할 줄을 모르는 내가 무슨 사업자란 말인가. 결국 밤새 고민한 끝에 이전 책은 폐기하기로 하고 표지 디자인을 새로 하고 인쇄 종이도 새로 해서 재출간하였다. 제작에 들어간 돈은 이미 지불한 상태였다. 이 또한 사업 감각 없는 태도라고 주위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물건 받고 확인하기도 전에 돈부터 줘버리는 게 아니라고. 새로 출간한 책의 인쇄비용을 낼 돈이 남아 있지 않은 통장을 보면서는 눈 앞이 캄캄했다. 만원 짜리 지폐를 모아다가 불을 태워버리고 있는 영상이 내 속을 불나게 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대학에 붙지 못한 아들이 재수를 하겠다는데, 음! 돈이 또 들겠지만 어떻게 해, 할 건 해야지. 재수해서 인쇄된 책은 이렇게 좀 더 예쁜 표지로 옷을 갈아입고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에게 창가학회에 관해 이야기하자, 친구가 물었다.

 "너, 거기 신자가 된 거야?"

 그렇지는 않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고 세례명은 '멜라니아'다. 가톨릭 신자인 친구도 있지만 창가학회 회원들 몇몇도 나는 내 친구라고 여긴다. 내가 창가학회 회원이 되지 않는 이상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친구사이이긴 하겠지만, 나는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 나와도 좋은 친구가 된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지인들이 나에게 창가학회가 무엇이냐 물을 때, 나는 나와 알고 지내는 창가학회 회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다. 내 친구는 왜 걱정스럽게 나에게 물었던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조성윤은 20여 년 동안 일본 신종교를 연구해 왔고, 나는 그의 옆에서 창가학회의 모임에도 참가하고 회원들도 만났으며, 이번에는 한국창가학회에 관한 이 연구서의 편집을 맡고 출간도 하게 되었다. 지난여름, 이 책의 내용을 읽으며 문장 교정을 하다가 메모를 해 둔 게 있어서 여기에 붙여 둔다.








편집자의 메모( 2019년 8월 19일) :일본에서 탄생한 창가학회가 한국에 와서 왜색 종교로 비판받는 과정을 읽으며 든 생각.





  일본에서 창가학회를 비판하고 경계하였던 쪽은 정치계와 종교계였다. 한국에서도 창가학회를 비판하고 경계하였던 쪽은 정치계와 종교계였다. 이 두 곳에서 이들을 비난하자 언론과 사회단체도 그 대열에 끼어들어 창가학회 비판을 거들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창가학회를 비난하는 내용은 비슷하지만 한국에서는 여기에 "왜색종교" 라는 딱지를 붙여 비난했다. 한국에서 창가학회 회원이 되는 것은 일제 36년이라는 역사를 망각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일본의 정치계는 창가학회가 정교분리의 원칙에 벗어난 종교단체라고 비난하였다.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때 창가학회를 비난하는 데 쓰이면서도 정교분리의 의미를 왜곡해서 사용하였다. 사실로 말하면 창가학회는 정교분리에 저촉되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계는 창가학회의 조직이 군국주의 파시즘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창가학회에 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본 정치계의  창가학회에 대한 비난은 먹혀들어갔다.


  일본의 종교계는 자신들의 신자가 창가학회로 가 버리는 것을 경계하였고,  창가학회 신자들이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지 않는다며 비난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일본의 전통과 문화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다. 다만  대중들이 익숙한 것들을 문화와 역사, 전통이라고 했다. 창가학회가 일본의 전통문화에 위배된다는 말에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거부반응이 들어있다. 대중들의 이러한 인식은 창가학회 회원들이 펼치는 포교 방식을 문제화하였다. 기존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창가학회의 활동은 위화감을 준다며 비난했다.


  1964년, 한국의 언론은 창가학회가 한국의 정치계에 들어올 것이라며 경계하였다. 이는 대중들의 반일 의식을 자극하였다. 정치계의 원래 목적은 일본의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권력을 잡은 이들이 사실은 친일파의 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반일 의식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정권에 이용하였다.


  종교계 또한 유사종교, 사이비라는 단어들을 이용하여 창가학회를 타도할 종교로 만들었다. 이로써 한국의 종교계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창가학회를 이용한 셈이다. 한 일 양국에서 창가학회를 비난하고 경계한 세력은 정치계와 종교계 동일하다. 창가학회는 한 일 양국 모두에서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부정적인 존재였다. 그런데도 한 일 양국 간에 신자수가 급증하였다. 부정적인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첫째,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려는 개인의 정신활동에 있다. 자신의 처지가 불우하였을 때 믿고 의지할 대상이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는 자각,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자기 주도적 삶의 태도를 종교에서 배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 자신의 변화는 주변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는 포교로 이어졌다.

둘째, 양국에서 위험한 종교로 본 창가학회였지만 일단 회원이 되어 단체 내부로 들어가면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가 표방하는 것이 교육과 문화와 평화 사상이다. 그러므로, 회원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서는 자신의 종교가 갖고 있는 방향성에서 매력을 느낀다. 이는 또한 포교로 이어진다.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의 종교이지만 고국과 고향, 친척과 친구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했고, 창가학회가 나아가는 길이 국가와 민족의 테두리의 한계에 갇히기 않았기 때문이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족쇄를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서, 일본과 한국을 넘어선 세상의 존재로 자신을 느낄 때, 재일 한국인들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이러한 체험은, 좁은 세계에서 넓은 세계로 나아갔다는 자긍심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자긍심은 포교로 이어진다.


  그래서 창가학회는 한국과 일본에서, 우매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를 늘려갔다. 종교를 시작할 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환경에서 자신을 탈바꿈시켰기 때문에 나중에는 가난하지 않고 늘 배우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가학회 사람들이 신앙을 시작할 때 병이 들고 가난해서 입신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자기 신념과 확신을 심어준 종교였기 때문에 인간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의 성장이 종교의 성장으로도 이어졌다. 이것은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고 이 종교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신만이 자신에게 온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자신만이 자신의 생을 가꿀 수 있다는 믿음, 창가학회의 제3대 회장이며 지금은 명예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는 이를 인간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은 신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


  창가학회 책을 만든 나를 보며 " 너, 신자가 되어 버린 거야?"라고 걱정스럽게 묻는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창가학회가 무엇이냐 하면, 자신 안에 있는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