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혼자하는 출판사

책을 내고-2017년 11월 9일 일기

자몽미소 2019. 3. 6. 14:56


<책을 펴내고>

 

그때 안 죽길 잘했다.

 

자려고 누우니 이 생각이 난다. 그때 삼십대의 많은 날들이 잿빛으로 기억되고 있는 건, 죽고 싶다는 생각 속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로부터 거의 이십년 가까이 지나고서 그때 죽기로 결심한 걸 철회한 일이 다행이다 싶다.

 

대학에 들어가 1학기만 하고, 펜팔 하던 육지남자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기 낳고 제주로 도망 와서야 그 남자의 수렁에서 벗어났지만 아기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아기를 잃었다. 나는 부모님 집에 사는 게 가시방석이라 취직처 대신 제주도 남자 다시 만나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 스물일곱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기저귀 차고 있을 때 돈 벌러 나가야 했다. 학습지 선생을 하다가 보험 아줌마를 하던 중에 대학에 재입학하게 되었다. 뭔가 법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 기회가 온 건 서른 살 가을. 나는 아줌마 대학생이 되었지만 여행사 차렸다가 다 망해버린 아들 아빠와는 더 살지 못하고 공부하던 책과 아들만 데리고 집을 나왔다. 늦깍이 대학생으로 서른 셋이 되던 겨울이었다.

아들과 둘이서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다시 보험회사에 가고 학원 선생도 하다가 어렵사리 기간제교사 일자리를 얻었고, 대학원 졸업과 함께 정교사가 되었다. 그 학교에서 나는 교지편집 책임자였는데 그때 만든 교지로 교육청이나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상도 받았다. 그러나 그런 게 즐겁지는 않았다.

 

내 친정가족들은 내가 이혼에도 성공했고 직장도 잡았으니 편안하게 사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주눅들어 있던 나는 상처받는 일이 많았다. 괜히 울기도 잘했, 그런 날은 죽어버리자는 생각도 많이 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면 혼자 남겨질 아들은 어떻게 될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죽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모임에선가, 누굴 만났던가 술기운이 있던 밤에 나는 아들이 혼자 자고 있을 집으로 가는 대신 바다로 걸어갔다.

살고 있던 노형에서 곧장 길을 따라 걸어가면 바다로 통하고 바다에 가서 그대로 물로 걸어 들어 가다 헤엄을 못 치게 되면 죽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걸었다. 나는 죽어도 될 사람 같았고 가치 없는 사람 같아서 그게 마땅해 보였다.

 

바다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짧지 않았다 꽤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바다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살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방법은 실패할 수도 있고 농약 같은 걸 먹고 괴로우면 병원으로 실려 간다든가 토한다든가 할 텐데, 그렇게 죽어서 죽은 내 얼굴과 몸이 푸르딩딩해지는 것도 싫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다 죽는 건 실패하고 다리가 하나 분질러져 장애인이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에겐 바다로 가서 물 속에서 꼴깍 죽는 일이 가장 나은 방법 같았다.

 

어두운 오솔길을 혼자 걸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이제 곧 나는 죽을 거니까.

그런데 어느 즈음에서 바다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철조망이 쳐져 있고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방향을 달리 하면 길이 있나 찾는데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철조망이 쳐진 곳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거긴 공항 활주로를 둘러싼 곳이었다. 처음엔 낯선 사람을 경계하던 그가 내가 여자인 걸 알고는 긴장을 풀었다. 나는 길을 물었다. 그는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나는 바다에 간다고 했다. 그는 바다로 통하는 길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나는 죽을거다 뭐다 횡설수설 하다가 술이 좀 깨면서 부끄러워져졌고 나는 죽을 결심을 풀었다. 그는 나에게, 누나 죽지 말아요! 라며 작별인사를 했다.

 

결국 나는 그날 아들이 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나는 무슨 일로 울게 되면 죽을 생각을 했지만 어느 방법도 쉽게 죽거나 아프지 않게 죽는 게 없어서 시도를 못했다. 30대는 그래서 어둡고 아프게만 기억된다. 나는 나를 좋아해주지 못했고 어떤 다른 이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으리라고 믿지 못했다. 나는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상처가 컸고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이대로 살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생각에, 대학원 진학을 하려 했다. 공부하는 것으로 떨어진 자존심을 잡아보려 했으나 대학원 박사과정 시험은 면접만 보고 떨어졌다. 이미 나는 시험도 보기 전에 떨어뜨릴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시험 보기 전에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사람은 합격을 하였다. 그때 나를 떨어뜨린 면접관은 다음 학기에 다시 들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다음엔 절대 대학원 진학 같은 걸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면접관이던 교수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시험장이 아닌 곳에서, 그는 공부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가 이야기 한 것보다 내가 이야기 한 게 더 많았다. 그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면접실에서도 그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열심히 대답했었다. 이런 것도 시험문제인가 싶은 질문에 열심히 대답을 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면접하러 온 수험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해 겨울에 나는 대학원이 아니라 결혼을 하였고 더는 울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의 집에는 책이 도서관처럼 꽂혀 있었다. 책과 함께 사는 삶이 나는 좋았다. 나중에 남편이 낸 책의 몇 권은 나와 함께 다닌 시간도 들어있었다. 남편 옆에서 조수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책이 점점 더 좋아졌다.

 

책이 좋아지자 남편의 책을 내가 내 볼 수 있지 않을까, 궁리가 생겼다. 작년에 출판사 등록을 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년 여 동안 책을 내게 될 일에 관해 구체적인 작업계획같은 걸 세워놓지 않고 있었다. 그냥 그게 좋고 재밌을 것 같은 기분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 바람에 작년까지만 해도 내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내가 만든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또 이제까지 내게 하는 많은 일들처럼 작심삼일형의 시도로 어느 날은 폐업신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였다. 나에게 실망하기 싫어서 미리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작년 겨울, 딸의 말에 가슴이 아파서 그동안 썼던 글을 모았다. 딸에게 그동안 쌓인 마음을 편지묶음으로 만들어 주려다 인쇄소에 들고 갔더니 책 모양이 되었다. 한 권을 만들어서 주려고 한다고 했더니 한 권 만드나 여러 권 만드나 제작비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업계의 일이었다. 곤란해 하고 있자니까 같이 간 남편이 이왕 할 거 500권 찍어! 라는 말에 어찌어찌 올해 1월에 당산서원의 첫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변명에 가까운 글이라 세상에 내놓기가 망설여졌다. 그 책의 운명은 매우 짧았다. 그 책이 나온 후 딸과는 다시 연락이 끊어져버렸기에 책 출판은 사는 일에 실수 하나를 보탠 꼴이 되었다. 딸이 연락을 못하게 되자 <숨은 우체통>은 보기 싫은 책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제 남편이름으로 책을 냈고 그 책은 온라인 서점에서도 유통하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티니언섬에 갔을 때 호텔 매점에서 자필원고를 발견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인을 찾고 있다고 하자 매점 주인이 보관해둔 복사지 묶음을 보여 주었다. 몇 해 전에 그 섬에 살던 전경운 씨에게서 받은 거라며 한국인 몇 명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고 했다. 그 종이 뭉텅이는 그 작은 섬에 묶여 있던 쓸쓸하고 늙은 조선인의 개인사였다. 복사본 묶음이었지만 문학작품 이상의 울림이 있었다. 티니안의 호텔 방에서 읽기 어려운 그의 글자들을 따라가며 나는 눈이 붉어지곤 하였다. 그의 글자를 현대한국어로 바꾸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 후로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남편과 함께 일제 시기의 태평양 섬들을 돌아다녔다. 사이판, 티니언, 팔라우, , 마셜군도는 늘 여름이었다.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오래전 이 섬에 살았던 그는 우리의 이야기에 늘 끼어 있었다. 그의 기록을 어떻게 책으로 낼까 이야기 나누었지만 금방 될 것 같은 일이 생각만큼 진전되지는 않았다. 원고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매듭이 안 되니 답답도 했다. 그런 시간이 지나 그제 책이 되어 나왔고, 내가 작년에 등록한 당산서원에서 책을 만든 게 무엇보다도 좋다


그래, 오늘밤 자려고 누우니까 오래 전 바다로 가던 오솔길과 망루 위의 청년이 생각난다. 내 손으로 책을 내고 보니 그때 죽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온 게 정말 다행이다. 20대나 30대 시절의 웃고 있는 사진을 봐도 그때의 내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슬퍼지고는 했는데, 그때 내가 죽었다면 아들은 그 후 어찌 살아낼 수 있었을까. 엄마가 젊을 때, 그것도 자살로 죽어버렸다면 아들의 삶은 어찌되었을까, 오래전의 미숙한 나를 생각하니 아찔하다.

결심했다가도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하는 내가 안 죽기로 한 건, 그리고 죽는 걸 무서워한 건 너무나 잘한 일이다. 인쇄소에서 나온 반짝반짝한 첫책을 손에 들어보니 남편과 나 사이의 자식처럼도 느껴진다. 내가 노력하고 애써온 일 중에 가장 장한 일이고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게 이번 책 출간이다. 오솔길 망루 위의 청년이 바다로 가는 길을 막아주는 바람에 나는 바다로 가는 대신 집으로 발을 옮겼고, 그게 오늘, 이 책이 되도록 길이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 고침/ 2019년 3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