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잘 지내려고 생각하는 너는, 오늘도 잘 지내고 있다.
지인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너는 어제부터 양지와 사태를 사와서 국물을 만들었고, 고사리를 삶아 두었고, 채소도 사 두었다. 너는 오늘 새벽에 한 번 깼다가 다시 잠이 들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늦게 8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잠을 충분히 잤으므로 너는 아침 체조를 남편과 함께 20분이나 할 수 있었다. 너는 잠에서 깨었을 때 남편의 기척을 느끼는 것과, 밥을 함께 먹고, 함께 체조를 하는 오늘 아침이 왔다는 것에 감사했다. 오늘을 잘 살면, 내일은 어제를 잘 살아낸 것이므로, 이렇게 매일 잘 살고 감사하게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다.
아침 식사로는 당근과 사과를 녹즙기에서 짠 쥬스와 과일과 요구르트를 먹었다. 남편의 혈압을 기록하고 무엇을 먹었는지도 이틀째 기록했다. 너는 2일 전부터 남편이 먹는 것과 몸의 상태를 두꺼운 노트에 기록하기로 했다.
고혈압 진단이 나온 남편의 혈압을 매일 재다 보면 혈압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압은 하루 세 차례 체크하고 하루 동안의 소변량과 횟수를 체크 하고, 시간에 맞추어 약 먹는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트는 필요했고 이것은 너의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너는 먹는 음식의 종류도 적어둔다. 앞으로는, 적어도 남편의 몸이 완치 될 때까지는, 외식을 하지 않기로 했고, 저염식으로 반찬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네가 특히 더 명심하고 있다.
11시 조금 넘어 지인이 찾아왔다. 수박을 들고 온 지인은 같이 밥을 먹고 나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이야기도 재밌게 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너는 크게 웃었다.
수박은 잘라서 쥬스로 만들었고 락앤락통에도 담아 두었다. 그이가 돌아가고나자 집이 텅 비어 보였다.
너는 내일 손자가 올 일을 준비하려고 손자의 베개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너의 바느질방에서는 만지며 시간을 보내기 좋은 것들이 많다. 뜨개실, 사놓은 천, 리사이클용 청바지도 모아둔 게 있고 일본에서 사온 뜨개책과 양재책도 많다. 하지만 너는 손자의 베개를 만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방을 나온다. 뭘 만들건지 떠오르지 않고, 한 달 전만 해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이제는 만들 맘이 되지 않는다. 이 방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흥이 필요한데 베개를 만들고 나니 그 흥은 소진된 후였다. 피곤한 몸을 느끼지만 쇼파에 앉아는 있고 눈을 붙여 잠들려 하지는 않는다. 밤에 잘 수 있으려면 지금은 자면 안 된다.
지금은 5시 30분. 너는 지금은 웃지 못한다. 책을 손에 들었으나 잘 읽지 못한다. 슬픔의.덩어리.같은 게 명치끝에서 올라오려고 할 즈음에 아들의 전화를 받았으므로 너는 그걸 삼켰다
너는 영상통화로 손자의 얼굴을 보자 다시 조금 웃을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너는 다시 네 가슴에 얹힌 돌덩이를 느낀다. 그래서 책을 잘 못 읽고 있다는 걸 안다. 뜨개질에도 옷만들기도, 일본에서 사왔던 바느질책도 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돌덩이가 무겁기 때문이다. 너는 오직 네 가슴에 얹힌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기만을 원한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친구 Y는 며칠 동안 너의 이런 상태를 상상하다가 그만 많이 아프고 말았다.
그러나 친구는 너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어서 어제 오후 살며시 너의 집에 와서는 문 앞에 여러 개의 과일 상자를 놓고 갔다. 너는 문을 열었다가 과일 가게의 모든 과일이 문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눈앞을 흐리게 했다. 그녀는 너의 가슴에 얹힌 돌덩이를 치워주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는 그녀에게 전화를 하여서는 평소보다 더 명랑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친구에게 너는 이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지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너는 몇 해 전인가, 슬픔에 잠 못 이루던 유명 여배우의 일을 생각한다. 그녀는 불면의 고통을 잊으려 잠자는 약을 늘리다 기어이 정신에 이상해졌고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너에게는 잠들기 전에 먹는 신경안정제가 이제 세 알이 남아 있다. 저것까지만, 이라고 너는 생각한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 너의 마음과 정신의 힘으로, 너와 남편을 돌보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돌덩이가 가벼워진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작은 화면을 앞에 두고 글자를 터치하는 사이에 너무 작은 글자 때문에 무거움 따위가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너무 작은 글자에는 무게가 없으니까.
사실 너의 가슴에는 돌덩이가 없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자기가 만든 이미지에 스스로 눌리지 말자고, 너는 어제와 똑같은 말을 한다. 지금은 다섯시 57분이다. 저녁밥을 지으러 일어나야지. 그것이 할 일이다. 돌덩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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