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부족의 독후감
춘향전(세계문학전집 100)
대학 전공과목 수업 때 <열녀춘향수절가 >를 처음 접했다. 춘향전의 줄거리는 너무 많이 알려진 것이라 새로 배울 게 뭐가 더 있을까 궁금하였더니, 책을 펴든 순간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며 전부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글로 쓰여 있으되 읽어내기 어려운 우리말 문장은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부터가 난감하게 모두 붙여져 있었고, 완판본이라고 하는 책 속의 글자는 그림을 닮아 있었다.
우리에게 수업을 가르친 분은 2년 후에 정년퇴임을 하신 노교수였다. 한글이긴 하되 잘 읽어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우리 노교수님은 문장 하나씩을 해석해 주어야 했다. 몇 시간이 흘러서야 이 언문의 리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열녀춘향수절가 문장을 내 숨에 맞추어 읽어 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중국시를 모방한 시 읽어내기, 당시의 행장에 쓰이던 장신구, 춘향이 방을 꾸민 각종 도구들은 또다시 해석의 어려움을 안겨 주곤 했다.
어렵게 읽어 가면서도 은근히 재밌던 고소설 강독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 질문 한 가지를 했었다. 어째서 이 소설은 앞에 한 말과 뒤에 하는 말이 다른가요? 예를 들면 춘향이 엄마 월매의 나이도 마흔에 딸 아이를 낳았다고 했는데 춘향이 감옥에 가 있을 때는 칠십 노파로 묘사가 된다.
교수님의 대답은 그 때, <장면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셨다. 이미 읽었듯이 춘향전-(이 책에 모델로 삼은 열녀춘향수절가>는 춘향을 낳게 되는 장면, 이도령이 춘향과 만나 정분을 맺는 장면, 이별의 장면, 등등 몇 개의 장면이 이 이야기 전체를 구성하게 되는데, 각 장면은 저 스스로의 이야기에 충실하긴 하지만 앞 장면 또는 뒤에 이어지는 장면과 긴밀하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현대소설 작법에서 본다면 매우 허술한 이야기 구조라 할 만한데, 그렇더라도 그 이유 때문에 춘향전을 소설도 안 되는 소설이라고 폄하할 것은 아니라고 말씀 하셨다.
춘향전은 원래 판소리가 소설의 형식으로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런 점에서 판소리의 영향을 짙게 받았는데 그게 바로 <장면의 독자성>이다. 판소리란 각 마당 마다 소리 하는 사람과 듣는 청중의 호흡이 중요한 것이었는데 이 연극적인 장면에서 판소리꾼은 그 장면에서의 절정을 만들어내고자 하였기에 바로 앞의 장면에서 했던 이야기 때문에 굳이 이번 장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한 받지 않으려 했다.
춘향전은 대개 열녀였던 춘향이 정경부인이 되는 해피엔딩의 이야기로서 독자들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사실로 이야기 하면 이런 결말은 만만의 콩떡이라는 게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와 사회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소설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열녀> 란 그 마을에 하나 있었으면 바라던 희망사항이었다. 왜? 조선시대에 열녀는 그저 말로만 칭송되기만 한 게 아니고, 열녀가 나온 집안은 열녀집안이라고 대문에 붙여 놓아 존경을 받게 하였고 열녀가 나온 마을은 조세 감면 혜택까지 있었으니, 춘향이 살던 마을에서 춘향이가 권력의 힘을 두려워 해 변사또 수청을 들어 버리는 것은 그게 오히려 가능하고 바람직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익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농부도 열녀되는 춘향이를 바라마지 않고, 판소리 하던 사람들도 춘향이가 열녀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춘향이가 신분의 장애를 뛰어 넘은 사랑의 화신 이라고도 말하지만, 춘향이의 행동거지를 보아하면 자기 신분에 대한 뚜렷한 확신도 사실은 없다. 어떤 때는 자기가 양반의 자제라고 하다가도 어떤 때는 모친의 계열로 인식하여 이도령에게 떳떳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그런데도 후대의 사람들은 춘향의 행동을 시대의 억압을 뛰어넘으려 했던 것으로 높이 평가하려 했다. 오늘날 내가 보기엔 춘향이 그런 칭송을 받는 것은 지나치게 오버했소, 하겠다. 춘향이 시대적 억압에 대한 굳건한 의식은 60-70 년대 쯤 우리 문학계가 지향했던 이데올로기를 춘향에게 덮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오히려, 근간에 새로 쓰여진 춘향전, 김연수의 <남원고사에 대한 세 가지 고찰>이야말로 춘향전의 현대적인 이본으로서 훌륭한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김연수의 이 소설에서는 춘향이 이도령을 이용해서 성공을 도모하다가 완전 쫄딱 망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연수는 소설에서 변사또로 그려지는 신임 사또의 현명함을 제대로 묘사했는데, 춘향에게 이르기를 심정적인 양반과 서류상의 기생을 구분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춘향이 저 스스로 나는 기생이 아니오 하는 것은 춘향의 마음에 해당되는 사항이고, 행정 서류엔 기생으로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기생점고는 신임사또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창고에 있다고 서류에 적혀진 재산이 제대로 있는지 감사하는 것과 똑같은 일인데, 춘향이 그것을 거부했으니 마땅하게 벌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열녀춘향수절가>에는 변사또는 매우 나쁜 남자다. 나쁜 남성만이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매우 나쁜 양반이다. 백성은 색을 밝히고 정사에는 어두운 관리를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고 미워해도 된다. <열녀춘향수절가>에는 바로 그런 나쁜 남자가 춘향을 범하려는 것으로 나왔고, 이는 판소리를 듣던 대중들에게나, 소설로 읽는 독자들에게도 처단해도 될 악인의 모델을 제공하여 주었다. 그러므로 변사또는 의인에게 처벌을 받을 사람이 되었다.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자신들이 어쩌지 못했던 부당한 권력을 의로운 힘이 제거해 주었으니까.
그렇다면 열녀춘향수절가는 매우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권력에 대고 튕기기를 할 수 있는 기생이란 존재하기 어렵고, 아무리 의로운 사또라 해도 지방 행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어떤 모함을 얻을지 모른다. 대개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이 새로 부임한 관리를 주무르기도 했던 게 조선시대였다. 부패한 양반은 사또만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오랫동안 이권을 챙겨온 토착세력이 더했다. 토착 세력은 신임 사또를 경계하고 그에게 적당한 이권을 제공하며서 자기 이익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신임사또의 부정만 두드러지지 토착세력의 구린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판소리 마당을 지원하고 그것을 지속시키던 배경이 전라도 지방 토착세력의 집안이었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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