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영화<手紙-데가미>// 편지

자몽미소 2006. 11. 6. 07:41

 

공지영의 소설(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  살인범으로 잡혀 사형수가 되어 버린 주인공이 공지영의 소설과 그 영화라면 이 영화는 사형수의 가족이 주인공이다. 가족이래야 남동생 하나 뿐이지만.

 

 

화면의 첫장면은 눈처럼 분분 떨어지는 벚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 그 편지를 읽는 목소리, 두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러브레터나 사월이야기가 겹쳐 떠오르는 봄의 벚꽃과 편지. 젊은 두 남자의 목소리는 그러나 어딘가 아픔 한 조각을 베어문듯 하다.

 

대학에 들어갈 동생의 학비를 위해 형은 돈을 훔치려고 생각한다. 찾아간 곳은 학교 담임선생님의 집, 불단에 숨겨져 있던 돈(종투쨰 든 것)을 훔치고 나오려는데 식탁 위에 단밤이 보인다. 단밤을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그것도 주머니에 넣고 나오려는데 마침 외출했던 집 주인이 돌아온다. 서로 놀랐다. 이때 형은 선생님에게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이 행동이 그 선생으로 하여금 지나친 방어를 하게 해서 몸싸움이 된다. 서로 부등켜 안고 업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 여 선생은 (나이든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전 가위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 가위를 든다. 형은 그것을 뺏으려고 했다. 그러시지 말라고 돈을 주면서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만 몸이 겹치면서 가위가 여선생의 옆구리에 들어갔다.

 

 

동생이 형을 면회 한다. 형은 무기형에 처해졌다. 형에게 선생님의 장례식 장면을 담담히 이야기 하는 동생, 당연히 동생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공장의 노동자가 된다.

 

그러나 동생은 그 후 계속 시련을 맞는다.

동생이 사는 집은 살인자의 집이라는 글씨가 써 져 있거나(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화를 내는 주인으로부터 나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건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생에게 보내오는 형의 편지, 그 편지의 주소를 본 사람들은 그를 꺼려한다. 어딜 가나 동생의 뒤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멍에가 있고 사람들은 그걸 먼저 본다.

 

 

이  영화<편지>를 보면서 옆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던 일본 사람들이 흑흑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종이편지>라는 감성 코드에 젖어 무심코 보여주는 일본의 단면을 이 사람들은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의구심이 들ㄱ도 했다.

 

 

동생은 그 후로도 많은 좌절을 겪는다. 공장에 다니면서 친구와 간간히 연습했던 만담, 콘테스트에 나갔다가 만담가로 유명해져서 텔레비젼에 나오기 시작한 후에는 인터넷을 통해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비판을 듣고 그만 두어야 하고, 전자회사의 영업맨으로 일하고 있을 때도 회사에 절도 사건이 터지자 그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정보가 공개되어 버린다.

좋아하던 여자와도 여자 아버지의 강력하고 비겁한 방법에 의해 헤어지게 되며, 이후 공장에 다닐 때부터 쭉 그를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그 뒤엔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시선이 따라다닌다.

5살 난 딸이 놀이터에 가면  상냥하게 인사를 하긴 하지만 딸과 아내를 보는 즉시 가만히 가만히 모두들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딸 때문에 동생 (이름은 나오)은 이제 편지를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자고 아내에게 이야기 하지만 남편 대신 그 형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던 마음 곧고 따뜻한 아내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는 이겨낼 거라고 말하지만 모두 슬픈 마음이다.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의 가족 관계를 잊어 줄 것인지. 그래서 그는 형에게  참으로 어려운 편지를 쓴다.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 이것이 마지막 편지라며 기다리지 말라고 한다.

 

동생이 형에게 마지막 편지를 하고 나서 찾아간 곳은 죽은 그 선생의 집이었다. 죽은 선생의 아들이 그를 맞는다. 그러나 아주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한다. 자기 가족들이 외출에서 돌아오기 전에 나가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종이 가방을 보여 준다. 그 편지엔 지난 6년 동안 감옥에서 형이 보낸 편지가 담겨 있었다. 그 집의 주인이 형의 마지막 편지라며 동생에게 보여 준다.

 

형은 동생에게서 마지막 편지를 받은 다음에 그 가족에게도 이제는 더 이상 편지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 왔다. 왜냐하면 자기의 존재가 모두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잊혀지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동생에게서도 이제 더 편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 중에 살인자, 범죄가 있다고 우리도 이들처럼 사람을 차별할까? 직장에서도 꺼리고 그 사람의 신상정보에 이력서처럼 범죄자의 가족임을 밝혀 적어 둘까, 아직 나는 알 수 없다. 그런 일이 내 주위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지독하게 우울한 차별을 이 나라의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이상한 일본인들>이라고 우리 나라는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라는 생각으로 남의 나라 허물만 먼저 보는 자국우선자의 편견일 수도 있으니.

 

영화에서는 한 노인(전자 회사의 회장)이 우연을 가장해 동생이 일하는 곳에 와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귤 하나를 건네면서 동생에게 전달하는 메세지란 <이 자리에서 이겨나가야 한다. 도망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차별이 없는 곳이란 없다>라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국민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 NHK 방송의 청소년용 교육방송을 보는 느낌이었다.

차별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없고, 차별이 당연한 세상에서 차별을 받는 각각의 개인이 그걸 어떻게 처리 해야 하는가만을 보여준다. 마치 일본 땅의 지진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국민은 늘 지진에 대비하는 교육을 받고 지진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릴 때부터 배워 두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이 사람이 살인 한 것도 아닌데 이래? 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주인공 자신도 차별을 하는 환경을 받아들일 뿐, 차별이 심한 이 사회가 무지 이상한 거라는 의식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당연 희생의 당사자이니 버거울 수밖에 없지만.

 

 

이 영화는 소설을 모태로 하였다 . 그러나 영화 평을 읽으니 소설과 영화가 그다지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지는 않다.

인간 사이의 아름다움에 <손편지>가 있었다는 그래서 여전히 그 따뜻함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 이전에 한 개인의 표면적인 죄 이외에 집단이 부리는 이 무시무시한 차별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인가에 대해 심하게 아파 하는 영화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건 우리 나라에도 사실 현재진행형의 바람이 아닐까?   

 

 

'字夢のノート(공책) > 영화 映画の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그녀에게>를 다시 읽는다  (0) 2007.01.05
유황도로부터의 편지  (0) 2006.12.16
영화-나다소우소우  (0) 2006.11.03
신데렐라맨  (0) 2005.10.07
자토이치  (0) 200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