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데렐라맨」-고단한 삶의 길을 함께 하는 사랑과 희망
마흔 살은 마치 삶의 터닝 포인트 같아 보인다. 숨은 목에 차오르는데 그 자리에 서 버리면 자기 키 보다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것 같아 끝내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수영장의 반환점처럼 주변 사람들의 마흔 고개 넘기가 꽤 힘겨워 보인다. 아이들, 남편, 시댁식구, 직장의 동료에서부터 발생된 관계 맺기의 갈등이 자기 삶이 가치없음으로까지 비화하는 우울의 표정은 다시 저 얼굴에 빛남이 있을지 염려스럽다. 거기다 경제적인 문제와 실직의 문제, 또는 타인들로부터의 무례와 폭력에 노출된 사람의 근황은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더 복잡한 문제가 겹칠지 외줄타기를 보는 듯 위태롭다. 그들의 앞에 앉아 쏟아내는 한숨과 눈물, 억울함을 들어주는 일밖에 달리 할 게 없고 요즘은 누구나 그래, 이 시기가 지나가면 많이 나아질거야라며 위로랍시고 해 보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과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는 한 이 가파른 고개 넘기가 언제 내리막길을 보일지 나도 모른다.
자유와 번영, 부와 권력의 상징인 미국의 과거 시간,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있다. 권투로 잘 나가던 한 남자와 그의 가정에 드리운 가난이 중요한 소재가 된 영화다. 영화 「신데렐라 맨」은 미국의 경제적 공황기인 1930년대를 중심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희망을 만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또 그 속에는 2000년 전 예수님 때부터 외쳐온 사랑의 힘에 대한 메세지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금 삐딱하게 말한다면 영화의 줄거리가 결국 헐리우드식으로, 미국적인 사고방식의 틀을 대입해도 좋을 만큼 해피앤딩으로 끝나서 감동은 교훈적인 동화 한 편을 읽는 것과 같은 질량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제 복서였던 제임스 브래독의 삶을 소재로 한 것으로 헐리우드적 공상이 만들어내는 허황은 아니다.
미국은 1930년 대의 경제 대공황 시기를 최고의 암흑기였다고 회고한다. 루즈벨트조차도 해법을 빨리 찾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뉴욕은 지옥의 상황과 같아진다. 그 위급하고 험난한 물결에 휩싸여 허우적 거리는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자기 앞 길을 잘 헤쳐 나가던 라이트 헤비급 복서 제임스 브래독이다. 그래, 몇 년 전만 해도 그는 적어도 가족들에게 안전한 집과 나름대로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었던 직업인이었다. 또 그는 복싱 선수로서는 좋지 않게도 왼손을 잘 쓸 수 없는 핸디캡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어린 아이들과 아내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뉴욕택시회사에 전 재산을 올인 했던 도박이 그를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뜨렸다. 그는 이제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나 그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줄 일자리는 쉽게 오지 않는다. 미국 전체가 지옥의 도가니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우성을 쳐 댄다.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기가 어렵다. 돈이 없으면 바로 죽은 목숨이 되는 이 상황에서 건장한 그의 몸은 돈이 되지 못한다. 일자리가 없으니 무엇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살릴 것인가. 전기와 물이 끊길 위험에 처해지고 아이들에게 먹일 것이 부족해서 본인은 굶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디서도 그를 구원해 줄 힘은 보이지 않는다. 가난이 너무나 깊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더욱더 피폐해지고 가족은 해체의 위기에 처해진다.
우연한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자기의 옛 명성을 생각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밀린 빚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에게 빵을 가져다주어야 했던 그는 다시 링 위에 선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싸움에 임했지만 그러나 시합은 그에게 마지막 은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어떤 인생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가족과 다른 중요한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의 복싱 세컨드가 바로 그에게 재기의 발판을 제대로 밟도록 도왔다. 역전의 상황으로 밀고 나가게 하는 데는 그의 도움이 적절했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는 위험한 도전 앞에 서게 된다. 링 위에서 두 번이나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배어와의 싸움이 그것이었다. 아내와 언론은 그를 살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를 다시 링 위에 오르게 하는 일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혼은 미국의 희망이 되어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제임스 브래독이 말한다. “어디든 위험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두에서 일하는 것보다 링 위에서 자신의 생활비를 버는 일이 자기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매우 모범생적인 이 말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낡은 말이 아니라 펄펄 뜨거운 말로서 내 마음에 확 꽃혔다. 그 시대가 배가 고픈 시기라면 이 시대는 정신이 허한 시기라는 내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생에 대한 공허를 자꾸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나는 결국 교과서적인 교훈으로 말머리를 돌리고 거기서 마감을 했다. 그들을 달래는 일에 나도 진이 빠지고 있던 참일 때 더 그랬다. 그랬으므로 힘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나오니 나는 더욱 반가울 수밖에. 이렇게 반가운 말로서 교과서적이고 모범생적인 말을 했던 그는 이후 배어와의 경기에서 이겼고 결국 미국 사람들에게 희망의 화신이 되었다. 모범적인 국민이었던 그는 이후 2차 대전에도 참가했고 가족과 잘 살았다고 전한다. 어려운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던 미국시민의 훌륭한 모델을 보여준 셈이다. 미국을 만들어 낸 숨은 가치가 그처럼 가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에게 있다는 교훈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아우른다. 울먹이는 친구 앞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도 사실, 나의 말하기 방식과 다르지 않다.
당신 희망을 가지세요! 라고 말하기엔 희망을 가지도록 도와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자책이 커지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공허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내 마음에 그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와 동행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나의 밝은 기운을 그들에게 주리라는 다짐이 물러나고 다들 힘들게 살아가는데 나는 너무 안 힘들고 씩씩하게 살아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게다가 요즘은 희망이라는 말조차 말의 느낌에 힘이 없었다. 희망이라는 말을 할라치면 돈이나 땅과 같은 확실한 물질없이 그저 말만 쉽게 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지 사정 좋은 사람이 그 속도 모르고 하는 놀림으로 들리지는 않을까 지레 송구스러워지곤 했다. 몇 년 사이 나도 사회도 너무 많이 써 버린 이 희망이라는 말은 어디든 흘러 다니는 사랑이라는 말의 가벼움과 동급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힘들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가끔 냉정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 들어 주다가 종내는 불끈 화를 내기까지 하는 나는 그래서 이 영화의 말하기를 빌려왔던 셈이다. 버럭 화를 내고 마는 불쾌함엔 소중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묘안이나 물질을 갖지 못한 내 자신의 보잘것없음이 숨겨있고 당신의 문제는 당신이 해결하라고, 그 마음까지 당신의 것이니 당신 자신이 묘안을 내어 해결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마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어려운 국민들을 잘사는 국민으로 만들어 줄 힘이 없는 국가의 변명과 비슷하다. 결국 개인하기 나름이니 열심히들 사시오. 이런 사람도 있었거든. 가족의 힘과 감사의 마음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사회적인 책임감으로 이겨냈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 보시오. 너무 불평만 하지 말고 이 사람처럼 살면 당신도 잘 살 수 있을 것이오. 미국의 입장이라면 1930년대보다 더 어려운 시대는 없었으니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주문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지원하는 국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잘 사는 거? 그거 말야! 당신하기 나름 아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서 사랑과 희망에 대해 읽었다. 영화의 결과적인 목적이 나의 삐딱한 해석에 들어맞는다 치더라도 어떤 개인이 증거하는 삶의 기록은 한 알의 밀알로서 오래도록 그 생명의 가치를 가질만하다. 어떤 한 남자, 복서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그 이후 잘 살게 된 삶이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빛깔을 가졌는지 그 이후에도 그 부부와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희망이 되어 주며 살았는지 영화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다른 기록을 보지도 못했다. 한 개인의 삶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만을 들추어내 장면의 극대화를 꾀한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생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극대화의 중심은 바로 희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길 하고자 하여 들추어낸 부분이다. 그것의 힘이 무엇을 어떻게 변하게 하는지에 과정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 단어가 가진 준엄한 의미, 그 말이 원래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무게를 재확인했다. 나는 다시 친구를 만나 이야길 할 것이다. 네 주변에 대해 불편해 하지 말고 네 마음을 바꿔 봐. 네 마음에 사랑을 키워 봐. 희망이 있을 거야라고.
-200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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