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할까요?
용기를 가지고 가야 할 길, 또는 희망을 가지고 가야 할 길, 여러 가지의 길이 있지만 사방이 시끄러운 곳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두려워하지요. 자신이 부여잡은 삶의 의미와 미덕을 누군가라도 다가와 등 토닥여 준다면 그 일은 따뜻한 힘이 될 텐데요.
영화 < 마지막 사무라이>는 1876년과 1877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무라이 반란 사건을 모토로 하고 있지만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외로운 사내들의 이야기였어요. 격동기의 일본, 남북 전쟁 후의 미국에서 각각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해야 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이죠. 신념은 사내들에겐 삶의 원동력이었겠으나 그들 두 남자, 알그렌과 가츠모토는 자신의 내부에서 나오는 신념을 지탱하기엔 여러모로 벅찬 시대를 살고 있었군요. 모두들 미쳐 버린 것 같은 세상이었던 거죠. 개발을 향해 인간을 포기하는 미국, 인디언은 그 미국에게 있어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야만일 뿐이었고 그러므로 미국적 희망은 음험한 흉계를 숨기고 있었던 것처럼, 일본 또한 철도 건설과 개방의 새 시대를 향하여 구시대를 대표하는 사무라이 집단을 거세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거지요. 그 교차점에 두 남자가 만나는 접점이 있더군요. 아이러니 하게도 사무라이를 토벌하기 위해 갔던 길에 사무라이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그 옛 시간의 사무라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을 질문하고 있어요.
사무라이는 섬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더군요, 감독은 아마 이 동양적인 미덕에 상당히 매료되었던지 주군을 섬기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패배를 인정하는 아름다운 군인이 되기 위해 자결을 하며, 남편을 죽인 적까지도 관용적인 이해로 받아들이는 여인에게서 일본의 사무라이가 고귀한 영혼의 집단이었음을 말하고 싶어하더군요. 역사학자라면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거짓 환영을 조심하라고 경고할 것이고 그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얼마나 자기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비굴했었는지를 증거로 보여 주겠지만, 영화는 그런 사실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사무라이를 빌려 우리 인간의 길에 대해 질문을 하는군요.
"당신은 무엇을 섬기며 이 오랜 인생의 길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벚꽃이 피는 마당에서 삶을 질문하는 사무라이, 또한 그 아래서 죽음을 완결하는 사무라이는 전쟁처럼 길지만 또한 벚꽃처럼 짧은 이 생애에 대해 진한 질문을 들이밀며 영화를 끌고 나가고 있었지요.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무엇을 가장 아름답다고 하실 건지요? 그 대답은 바로 당신의 가슴, 우리들 가슴에서 밀려올라 오는 뜨거움이 말해 줄 테지요.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죽을 때의 모습을 이야기 해 달라"는 메이지 왕의 질문에 알그렌의 대답은 의미심장했어요. " 그가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말해 드리지요" 가츠 모토는 천황의 신하이며 그러므로 천황에게 충군이고자 했지요. 그의 충군은 천황의 백성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삶은 벚꽃을 보며 짓는 시 처럼 마을을 한 수의 시처럼 아름답게 가꾸기도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이 고독한 사무라이가 전쟁의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것은 고유한 그들의 삶을 절개를 가지고 지켜내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길이 다정한 마을에 아낙들과 노인과 아이들을 뒤로 하고 전쟁터를 향해 나가는 모습은 오히려 이들의 삶의 크나큰 의미를 확신하는 것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이 사무라이는 섬김의 의리를 충군을 넘어서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마을과 그 사람들로 까지 확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죠. 한 시대, 한 인간의 평화를 거두기란 너무나 어려운 난제일 터인데 아마 영화는 어떤 평화도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헐리우드적인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미국적 주인공으로 보면 평화를 배우기 위해 의리와 섬김의 사무라이가 삶의 모범이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근래 미국적인 제국주의가 시행착오 하고 있는 오만과 폭력을 비방하는 것으로도 보였으니까요.
평화란 섬김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실천할 수 없는 이에겐 먼 곳의 풍문일 따름일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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