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신은 춤을 추지요?
당신은 왜 사랑을 하지요?
저 곳의 또 다른 당신은 왜 복수를 하려 하나요?
저기 저곳의 당신은 왜 울고 있나요?
그런데 당신은 왜 혼자서 떠돌아 다니고 있나요?
삶의 명분을 묻는 이 무거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인생의 이야기는 처음과 끝이 있어야 한다. 나의 슬픈 춤이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랑에 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또는 슬픔과 외로움에 대해서도 그게 삶의 중요한 명분이라면 처음과 끝을 갖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허구라고 일컬어지는 대개의 소설은 그래서 처음과 끝을 완결하는 구조를 갖고 있게 마련이고 원인과 결과의 개연성을 이해한 독자만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 는 이야기의 전통적인 근거가 될 요소로서 영화적 사건을 이해하는 것, 사건 사이의 갈등 해소로 이야기를 이해 하는 것을 빙긋이 웃어 넘기며 관객을 조롱한다. 아내의 병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어야 했던 떠돌이 무사 '하토리' 의 이야기나 가족을 죽인 원흉을 찾는 '오키누, 오세이' 남매의 등장은 이 영화가 전통적인 사무라이 이야기일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이야기 비틀기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스토리 라인을 무너뜨리고 그저 화면 속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오는 농담같이 가벼운 관객만을 즐겁게 입장 시켜 주는 것 같다.
전통적인 일본 농촌 풍경을 보는 것도 좋고, 아이들의 놀이와 처마 밑의 거지가 부르는 일본 민요도 즐거움의 하나다. 남매의 부모는 악당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아이들은 거리에서 돈을 구걸하며 성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음악과 춤은 기묘한 슬픔을 전하기도 한다. 그 춤은 그들의 가슴 속에 품은 복수심을 감추고 손끝과 가락에서 꽃이 피어 화면의 색깔을 환하게 한다. 그러니 아내를 위해 칼을 들어야 하는 사나이의 칼 또한 피의 처절한 난동이건만 날카로운 절제로 보이기 까지 한다. 거기에 빨간 지팡이로 칼을 숨긴 자토이치의 손놀림은 현실을 뛰어 넘고 만화적 가능성으로 치솟는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 자토이치는 눈을 감고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소리와 색깔로 이 영화가 달리고 있는 상상은 눈 감은 자의 눈을 통해 농담처럼 퍼지고 번져 간다. 샤미센의 음악이 있는가 하면 농부의 밭에선 탭댄스가 울리고 ,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고요한 춤의 색깔이 있는가 하면 칼 잡은 자들은 날렵한 붉은 피를 뿜어내는 영화.
그러니 이 영화는 마지막의 반전에 또 다른 반전을 거듭하며 관객을 배반하고 배반은 상상력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자가 자토이치가 찾는 두목이었으며, 두목은 다시 눈을 뜬 자토이치에게 자기의 눈을 베이며 독백한다. " 내 마음대로 해 봤으니 여한이 없다. " 아마 늙은 거지는 이 영화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 어때 재미있지? 이 세상 살기도 그렇게 해, 네 마음대로 놀아봐,"
자토이치가 왜 떠돌이 검객이 되었는지 조차 모른 채 우리는 그저 감독이 한 판 벌인 난장에서 리듬에 맞추어 탭댄스를 추다가 영화가 끝났을 때야 머리를 북적거린다. 자토이치가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하는 말마따나,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그저 관객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