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히로히토의 종전조서를 읽는다 [책읽기]

자몽미소 2005. 8. 17. 21:26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종전 조서’ 800자로 전후 일본 다시 읽기 / 고모리 요이치 지음/뿌리와 이파리 출판사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의 잡음 속에서 ‘대동아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를 읽는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4분 42초. 전쟁은 그렇게 끝났지만. “참기 어려움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 ….” 라는 구절 외에 전문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 ‘종전 조서’에는 ‘패전’도 ‘전쟁책임’도, 중국과 소련, 식민지 조선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오로지 ‘천황제’, ‘국체수호’와 전쟁책임 전가로 일관한 천황의 항복방송, 그것은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전쟁을 하는 보통국가’ 일본으로 향하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지은이의 말.


일본의 우경화를 심각하게 우려해 온 지은이 고모리 요이치(小森陽)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교과서에서 기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에도 시대까지는 천황의 역할이 무턱대고 반복, 강조되다가 메이지 이후가 되면 천황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일본의 천황이 ‘상징천황’인 것에 쉽게 동의 한다. 그러나 왜 ‘상징천황’인 것인지 또는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상징천황’은 역사적 사건과 함께 등장한 현대 일본어이며 천황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1945년 8월 15일 ‘종전 조서’ 낭독을 ‘성단’의 조치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천황’은 권력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천황이 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대일본제국을 이끌었던 인물에서 한낱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의 제사장으로 모습을 변화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지은이는 패전도 침략 전쟁의 책임도 언급하지 않고 미점령군의 대일정책과 모순되지 않는 천황의 ‘옥음방송’과 ‘인간선언’을 연구하면서 종전 이후 일본 사회가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담론에 의해 거짓과 진실이 혼미하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았다. 지은이는 일본이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패전 후 일본인들에게 내재되어 버린 거짓의 실체를 밝혀야 하며, 천황과 측근들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였는지를 국민들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지은이는 역사의 거울이 왜곡되지 않았을 때라야 현재와 미래의 일본이 거듭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로부터 과거를 다시 파악함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역사관이다. 그래서 돋보기를 들고 왜곡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노력이 바로 이 책,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다.


‘종전조서’ 전문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黃祖黃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 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는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었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信義)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어명(御名) 어새(御璽)



위의 종전조서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적 열망으로 벌인 전쟁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41년 이후의 미․영 2 개국과의 전쟁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종전 조서에는 패전의식이 없으며 미국과 영국에 대한 태평양 전쟁을 ‘자존․자위’의 전쟁이라고 의미부여하여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해 온 일련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꾸며졌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이  중국에 대해 벌인 전쟁으로 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이 종전조서에 쓰여진 언어는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국체 수호를 위한 천황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였다. 만주 문제를 모두 소거해 버린 이 종전조서는 히로히토가 즉위한 이래 전쟁에 대한 관여, 대원수로서 내렸던 결단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한  정보조작이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며 가능했던 것일까.

거기엔 미일합작의 전쟁책임회피극이 있었다. 미국은 히로히토를 이용하고 히로히토는 미국 특히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를 등에 업고 전범재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히로히토의 명령대로 700만 군대가 무장해제 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의 점령정책 실시에서도 천황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만약 천황을 ‘전쟁범죄’인으로 소추하면 국민의 강한 반발이 생기고 폭동이 일어나, 미국으로서는 더욱 많은 파견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점령도 장기화된다는, 점령비용론을 들어 히로히토의 면책을 미국에게 협박하기도 하였다. 미국내의 여론은 물론 다른 연합국의 여론도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하였지만  천황의 지위 문제는 맥아더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일이다. 맥아더는 일본에 신헌법을 만들어 극동위원회를 구성하는 나라로부터  히로히토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헌법은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이름으로 ‘전쟁포기’와 ‘전력을 갖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제9조의 틀을 만들었고 미국과 일본이 담합한 제휴적 합작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당시까지 단순한 민(民)이었던, 사족(士族)이외의 일반 남성은 근대징병제를 통해 육해군 어딘가의 병사가 됨으로써 신(臣)의 위치를 획득하고 대원수 천황과 군신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병사가 됨으로써 천황의 신(臣)이 된 자는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천황에게 바친다. 그 죽음은 국가를 위한 죽음으로 위치지어진다. 그 전사자의 영혼은 현인신인 천황의 참배를 받음으로써 ‘국가의 신령(神靈)’이 된다. 청일 전쟁 때 전국화 된 이 야스쿠니의 논리는 러일전쟁 때 발생한 방대한 전사자에 의해 대중화 되었으며,이 영령은 천자에게 위령(慰靈)되어 ‘호국의 신’이 된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병사의 죽음은 러일 전쟁 때의 10 배가 넘었다. 히로히토는 자칫 자국민으로부터도 전쟁의 책임자로서 전 국민을 고통의 수렁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으로 자리가 바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천황의 신(臣)을 국가의 신령(神靈)으로 만듦으로써 천황의 신(臣)은 죽음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신도에 의해 정신세계가 지배되고 있던 국민들에게 천황은 여전히 현인신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자들의 죽음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히로히토가 천황으로서 살아남는 것, 근대 천황교의 제사로서 잠재적인 제사대권보유자로서 살아남는 것이 필요했다. 히로히토와 그 측근들은 종전 후 오끼나와를 제외한 일본 국토의 순행을 통해 천황이 국체수호자임을 알리는 이벤트를 열었다. 천황의 안위를 위해 미국에게는 협박을, 자국민에게는 국가 이벤트를 행했던 것이다.

전쟁포기 헌법을 통해 천황의 전쟁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히로히토는 제사대권자로서 천황의 ‘이름 아래서 죽은 자국 병사들에 대한 책임’만을 짐으로써 국내적인 지지를 얻어내고, 역으로 ‘2천만 아시아대륙의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은 군부지도자에게 전가하고 히로히토 자신은 도쿄재판의 소추를 면함으로써 천황으로서의 지위를 보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상징천황’은  만들어졌고 새로운 전통이 되어 그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지만 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소련이 참전하기 전,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기 전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면, 북에서는 소련이, 남에서는 미국에 의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의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거기서 발생된 38선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점령에서 분단국가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대일본제국과 메이지․ 다이쇼․ 쇼와 라는 3대 천황의 전쟁 책임이자 전후 책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천황과 그 측근들이 포츠담 선언을 재빠르게 수용했다면 자국민의 원폭 피해도 없었을 것이고, 본토를 지키기 위해 총알받이 노릇을 한 오끼나와 사람들의 저참한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패전 후에 신헌법 하의 새로운 국민들이 전쟁 당시에 피해 입은 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로서의 그/그녀들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면 식민지 지배의 가해자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 스스로의 판단으로 히로히토를 심판하지 않음으로써 자기를 비추어 줄 거울을 없애 버렸다. 자신의 추악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발동인양 일본 국민들은  오끼나와, 한반도, 중국, 동남 아시아, 남양군도를 의식의 틀에서 제거해 버렸다. 지난 밤에 한 일을 알지 못한다는 몽유병환자처럼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잊고 미국의 원폭에 의한 피해자였다는 것만을 거듭 기억했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을 종전이라고 표현한다. 전쟁에서 패하였다는 패전이라는 표현을 삼가는 이면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성단을 내렸다는 히로히토의 언어적 수사를 모방하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자기들보다 국력이 더 센 연합국의  때문에 할 수 없이 전쟁을 끝내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야 했다는 논리를  종전 이라는 언어로 내면화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평화 공원이 세워지고  평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전쟁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미국 비행기의 무참한 폭격과 자국민들의 죽음, 가공할 원자폭탄의 위력에 멸망이 되다시피한 일본을 보고 애도한다. 그곳의 현장교육에서 아이들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전쟁은 가족이 죽고 친구가 다치고 거주할 집을 잃고 살아갈 방도를 모두 놓치는 것이라고 배운다. 전쟁의 무서움에 대해 배우는 아이들은 전쟁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나 거기까지다. 왜 그 전쟁이 일어났으며 왜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되었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일본 자국이 그렇게 처참한 폭력으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멸살시켰으며 죽음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원인이었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히로시마에서는 단지 군사 강대국 미국이라는 적국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에게 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는 논리는 아이들에게 우리도 힘을 키워야겠다는 것을 내면화시킨다. 그들의 평화교육은 자국의 힘을 키워야한다는 보수당의 논리로 다시 귀결된다. 전력(戰力)을 갖지 않겠다고 명시했던 신헌법은 그 후 자꾸 의미해석을 달리하며 1954년에는 자위대와 방위청이 창설되었다.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군비’의 보유가 용인되고 ‘자국의 방위를 위한’ 군비가 점증해 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폭력국가 미국을 거울 삼아 제국 일본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00년 아미티지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에서 영국이 해 온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아시아에서는 일본에게 맡기는 방향을 명확히 내세우며, 미일 안보 체제를 강화하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일본 정부는 ‘무력공격사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고, 미일 안보조약에 근거해 일본의 자위대가 전면적인 후방지원을 담당할 것을 결정했다. 2001년에는 아프카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공격에도 자위대는 미군에 연료를 보급해 왔다. 2002년의 이지스함은 그런 맥락에서 파견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미국의 공격을 받았던 오끼나와 주민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말하길 “일본군대나 군사시설이 없었던 마을은 오히려 미국의 공격을 덜 받았지요. 오히려 아무 것도 미국의 공격에 대항할 게 없었던 마을은 무사했어요. 사람들도 덜 죽었고.” 안보를 위해 군대를 키우고 전력(戰力)을 증강시키는 것이 결국 국민의 안보를 위한 일이었던가. 단지 일본에만 해당되는 질문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역사, 제대로 기능하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볼 수 없는 국가의 운명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엔 권력을 잡은 몇 사람의 안위를 위해 날조와 왜곡이 진행되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국민은 없었다. 당대의 권력가들은 언제까지 베일 속의 진실이 숨겨질 것으로 여겼을까.

종전을 둘러싼 일본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책이었건만 나 개인의 역사에 관한 말하기로 읽혀졌던 것은 개인의 역사를 반성하게 하고 새롭게 거듭나도록 비추어 줄 거울은  무엇으로 가능할 것인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역사를 만들었던 이 고장의 역사,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영혼 맑은 거울이 필요하다. 어찌 이 책의 주장이  일본이라는 나라 하나에만 해당되는 것일 수 있을 건가. 이 책의 저자가 역사적 진실을 찾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반전 운동과 시민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개인, 자기 고장과 나라의 튼실한 미래를 희망하는 존재들은 거듭 돌아볼 일이다. 자기와의 직면을 통해  건강한 반성을 만들어 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인가 한다. 해방은 거듭남에서만 탄생한다.


2005년 8월 14일, 광복절을 기념해서 쓰다


# 2005|08|17 16:5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