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지은이) | 김연수 (옮긴이) | 민음사 | 2008-05-30 |
- 책부족의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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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내 생각
요 며칠, 인터넷을 켜서 daum 창을 열 때마다 2010년 인터넷 키워드가 <타블로> 라는 게 떠올랐다. 오늘 아침 텔레비젼에는 그 타블로가 두문불출한다는 소식과 함께 그를 잠깐씩은 마주쳤다는 동네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여러 경로를 통해 <타블로의 주장>은 사실이고, <타블로에 대한 의혹>은 거짓이라는 결과가 나왔기에 오늘 인터뷰에 나온 동네 사람들은 타블로에게 호의적이었다.
카타리나볼륨의 아파트 주민들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타블로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고 <타블로의 주장>이 믿을 수 없는 변명처럼 보도될 때, 주민들은 어떠했을까. <타블로>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한 것은 아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은 탓이 크리라. 나로서는 사건을 다루는 신문 방송의 기자에 대해 뭐라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혹시는 타블로가 사는 동네의 주민처럼, 여론에 동조했던 적은 없는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굳이 알아볼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굵은 글씨체로 내놓은 인터넷 뉴스를 항상 외면했다고 할 수 없고, 대개는 '그런가 보다' 라는 무관심으로 위장해 뉴스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던 적이 더 많았으니까.
12월에 읽은 책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70년대의 독일, 좌우대립이 극명하게 나뉘고 보수 정권의 자기 방어가 지나치던 때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자기 주장도 그에게 빨갱이라는 그물을 씌워 버리는 순간 입이 막혀 버렸던 때, 이 책의 주인공은 경찰이 쫒고 있는 한 남자를 한 눈에 사랑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사생활을 세상의 재밋거리로 제공해 버리게 되었다. 스스로는 결코 공개되길 원하지 않던
일상과 그에 따른 자기 관리, 거기에 끼어드는 감정 상태, 그녀와 잘 지내거나 또는 문제를 겪었던 주변의 인물들까지 <재밌는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재료로 넘겨 버리게 된 것이다.
카타리나는 경찰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도록 요구 받고,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도 명료하게 논증하도록 요구 받는다. 경찰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논리에 맞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카타리나는 경찰의 논리에 굴복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더한 문제는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기는 기자와 기사를 팔아먹고 싶은 신문이었다. 그들은 카타리나를 조작해 버린다. 카타리나는 그물에 갇혔고, 그녀를 도우려는 주변인물들마저 갇히고 있었다. 카타리나와 주변인물을 조작한 것은 신문이지만, 신문의 이야기는 독자가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독자에게 부응하기 위해 신문은 좀 더 앞으로 나아가 이야기를 비튼다. 비튼 물꼬를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보태지고 카타리나가 말하지 않은 부분은 의혹이 증폭된다. 의혹은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다시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자기가 예상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내의 이야기를 믿는다. 그러므로 카타리나가 오해를 받으면서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남자 신사>에 관한 것은 있을 법한 이야기의 틀 속에만 있어야 한다. 카타리나는 대중의 속성을 알았고 그랬으므로 <남자 신사>에 관한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직업이 가정부로서 하층민인 그녀가 신사다운 신사의 구애를 그저 취향 때문에 거절했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낄 뿐더러,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보다 조금이나마 힘을 더 가진 사람들로서는 여자이고 하층민인 그녀가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을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범죄인을 도운 나쁜 여자가 아닌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돕는 자는 나쁜 사람이고, 그녀는 원래 그렇게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은 신문과 경찰과 대중의 믿음이다. 범죄인은 처음부터 결과까지 나쁘고 나쁜 것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 는 것은 신문의 태도였지만, 신문이 그렇게 하도록 방조하는 것은 대중이었다.
사람들의 댓글을 읽고 자살을 하는 연예인을 보면서, 왜 그들은 그렇게 약한가 아쉬워했다. 그러나 작년 봄에 탈랜트 최진실 씨의 자살을 보면서는 그녀의 괴로움에 동정했는가, 기억을 더듬어 보지 않아도 나는 조금 냉정하였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스스로 한 일이긴 하였지만, 내 생각엔 자살을 한 어머니의 아이들과 자살을 한 딸을 둔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녀는 그것 마저 생각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겼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텔레비젼에 나오고 굉장한 인기를 누리는 동안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일어난 그 사건을 두고는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기적인 사람은 싫다며 내 감정을 옹호했다. 그녀는 진짜 이기적인 사람인가를 알지도 못하면서 이기적인 사람으로 단정했고, 또 이기적인 것은 나쁘고 싫어해야 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여느 대중들처럼 그녀를 잊어 버렸다. 마침 텔레비젼이나 인터넷도 한 달 여가 지나자 그 일을 기사화 하지 않았기에 잊기에도 편했다.
심리학자들은 어떤 미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외부지향과 내면지향으로 나눈다. 고 최진실씨의 경우엔 대중의 증오를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란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기가 받는 고통과 결연하려 한다는 것인데 나도 어쩌면 그냥 호감이 안 간다는 아주 사소하고 드러나지 않는 감정으로 대중의 미움에 간여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40년 전의 독일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일비재한 일과 겹친다. 세상은 그 사이 더 좋아지지도 성숙해지도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독자로서는 카타리나 블룸의 상황을 모두 읽고 있으니 주인공과 그녀를 돕는 인물들에게 동조하고 있지만, 이 책의 현대판 사정을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 견주어 보면, 나는 카타리나가 살던 아파트의 주민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살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아무렇게나 취급한 신문기자를 죽인다. 죽여 놓고 생각해 보니 별로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숨지 않고 경찰을 만나 자백한다. 그녀는 감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그녀의 계획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머리 속에 이미 그려넣었는데, 그녀는 10여 년으로 가정되는 감옥 생활을 사랑하는 남자와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그 남자와 보금자리를 꾸미려 한다. 이 계획이 실현될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자는 이 자기 주체성 강한 여자에게서 자신의 양심을 들여다 보게 된다.
거짓을 싫어하는 성격, 상대의 지위고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한 성격, 그래서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지키는 성격, 그러므로 그녀는 살인자이긴 하지만, 그녀가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거짓 또는 비열함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되돌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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