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남양섬에서 살다

남양섬에서 살다 독후감 공유

자몽미소 2017. 12. 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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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섬에서 살다’ ” 독후감. 글쓴이 :페니스북 닉네임 백일

 

일제강점기에 어린 꼬마소녀 시절을 보냈던 어머니의 일본, 일본인에 대한 기억은 달콤함이었다. 당시 ‘성내’라고 부르던 제주시내에 살던 외가는 일본군 장교의 하숙을 쳤던 모양이다. 집안에 유이한 남자들이었던 외조부와 외숙부는 당시 일본에 가있었고 딸만 셋이 있었던 외조모는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위관급 정도였을 꽤 젊은 일본군 장교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퇴근할 때마다 별사탕을 한 움큼씩 어머니와 이모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제주에는 약 10만 명가량의 일본군이 최후결전을 준비하며 주둔하고 있었다.

 

역사를 마주할 때 가장 난감한 부분이 ‘사람’에 대한 것이다. 당대를 살던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감이 도통 잡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심성사’라는 연구영역이 발전해왔다. 당시의 문헌자료들이나 또 다른 사람들이 남긴 기록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자 하지만 그것 역시 짐작이나 유추일 뿐 타인, 그것도 내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사람을 온전히 파악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정합성이 있는지 여부의 판단만 남는다. 나의 어머니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 역시도 망각되거나, 또 다른 기억으로 창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할 때는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상을 느끼고 정의하기가 모호해진다. 역사는 개인과 시대의 통합과 분열, 융화의 반목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당대인이 직접 남긴 ‘기록’이야말로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기록이 그 시대의 반영이자 진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실체를 향한 ‘짐작’의 근사치를 끌어올리는 합리적 과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후대나 역사적 평가가 어떠하든 한 시대를 살아온 ‘인간’의 진면목을 느끼는 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남양 섬에서 살다(조성윤 엮음/당산서원)’...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1915년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주하면 그 지명보다 구한말 계몽운동을 했던 이승훈이 세운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이었던 ‘오산학교’로 더 유명한 곳이 아닌가. 이광수, 조만식 등이 교사를 했었고 함석헌이나 이중섭도 이 학교 졸업생들이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선생으로 재직하기도 했었다,

 

‘전경운(全慶運)’....혹은 ‘마쓰모도’...

 

전경운, 혹 ‘마쓰모도’의 회고록이 <남양 섬에서 살다>다. 이 분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 평가했지만 일제강점기 아래서 투철한 사회의식이나 저항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학교성적도 고만고만했고 특출함이 없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12살 무렵에 할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조혼(早婚)을 했지만 그 또한 그 당시에는 새삼스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야망이 있었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지만 세계의 드넓은 무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이었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은 그 나이 대에 젊은 혈기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다. 박정희가 엘리트 양성소인 대구사범을 나와 그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우고 만주행을 감행한 이유를 평범했던 인물 전경운에게서 또 확인한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기 이전임에도 일본제국의 영토는 위로는 만주로부터 아래로는 마리아나 제도 등 남양군도들, 서로는 대만에 동으로는 사할린 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비록 소망하던 만주행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일본 본토의 ‘동경고등척식학교(東京高等拓殖學校)’에 입학한다. 2년제 단기대학으로 오늘날 우리의 전문대학으로 보면 될 것이다. ‘척식’이란 말의 의미처럼 확대된 식민지에서 자원을 개발하는 등의 업무를 맡는 관리자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학교 졸업 후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다가 ‘남양무역’이라는 회사에 들어간다.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 태평양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도서 지역들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하는 회사였다. 1939년 말에 전경운은 드디어 사이판 지점에 발령을 받고 남양 땅을 밟는다.

 

전경운은 사이판 등 마리아나 군도 일대의 섬들에서 주로 야자수 농장의 관리자로 활동한다. 야자수에서 채취, 가공한 코프라는 비누·양초·마가린 등의 원료로 쓰인다. 당시 마리아나 군도 일대는 일본인을 비롯하여 조선인, 오키나와인, 그리고 스페인과 원주민의 혼혈족들인 차모로인들이 살고 있었다. 원래 마리아나 군도는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였다. 독일이 사들여 지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일본은 승전국이 되면서 일본의 점령지가 된다. 일본은 여타 제국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들에서 야자수,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이른바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원주민인 차모로인들의 노동력을 주로 이용하여 운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끝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지만 그는 효율적인 생산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인정받았던 관리자였다. 마리아나 제도 조선인 이주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 아버지를 둔 차모로 처녀와 결혼까지 한다. 이미 조혼을 했던 그는 고향 평북 정주에 본처와 아이까지 있었지만 그의 삶의 준거는 남양군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이주를 했거나 징용으로 끌려왔던 다른 조선인들은 대다수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귀국선을 탔지만 그는 마리아나 제도에 계속 남아 마리아나 사람으로 남은 평생을 살다갔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또한 비범한 삶이기도 하다. 그의 삶은 당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어떻게 살고 살아야 했는지 고뇌와 고독의 편린들이 은근하지만 집요하게 감춰진 채 묻어난다. 우리네의 전통적인 민족주의 감성의 역사의식의 시선에서는 전경운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첨병으로 살아간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후대들은 본인들도 하지 못하는 것을 ‘환상’을 내걸고 선대들에 강요한다. 식민지 치하에 살던 사람들, 특히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은 식민지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했어야 한다는 지극히 현재 중심의 주관적인 환상이다. 우리 자신은 선대들에게 들이미는 엄밀한 잣대처럼 자신의 살던 시대와 현실인식에 투철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다. 그 욕망은 어떤 욕망인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지만 자신이 ‘누구’이며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건 누구나 매한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인생이란 긴 항해에 돛을 내건다. 개인과 시대는 누구 하나의 일방적인 종속관계가 아니라 결국 서로 의지하는 호흡의 문제다. 일제에 의한 침략과 지배, 억압이 이루어지는 시대이기에 개인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건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의 실종을 유발할 수 있다. 침략, 지배, 억압이 시대성을 선도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만이 시대성이라고 확언할 수도 없다. 시대가 개인을 규정하듯 개인도 시대를 얼마든지 규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경운, 이 마쓰모도에게서 그래서 절절한 고뇌와 고독을 느낀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모순이라는 것에 고통 받고 신음한다. 꿈을 쫓아 또는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만주와 바다를 건너야 했던 숱한 이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도 느낀다. 그 삶을 판단하는 건 ‘너’가 아니라 ‘나’의 몫이다. 그리고 ‘나’의 몫은 ‘나의 솔직함’이다.

 

<남양 섬에서 살다>는 한 시대를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의 특별한 기록이다. 당대의 또 다른 무수한 ‘나’들을 발견하고 오늘의 또 다른 무수한 ‘나’들에게 투영된다. 일상공간의 사람들이 어떻게 시대를 이해하고 적응해 갔는지 그리고 변화를 모색했는지 그 일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

 

전경운, 마쓰모도는 마리아나 군도의 티니안 섬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우리말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자신과 그 생을 반추하며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회고록을 썼다.

 

그건 ‘나’답게 살았다는 솔직한 ‘인간선언’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