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남양섬에서 살다

[스크랩] 남양 섬에서 살다 -조성윤 編-

자몽미소 2017. 12. 9. 16:47


남양 섬에서 살다

<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


조성윤 編




마쓰모토(松本)의 조선이름은 전경운(全慶運).

191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39년(그의 나이 스물네살) 서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에 들어가 그곳 한 섬(티니언)에서 생을 마친 사람이다. (정확한 沒年은 알수 없는데 나이 여든되는 해에 두번째 회고록을 썼다니 추측건대 21세기로 진입하는 고개는 넘겨 생존하지 않았을까.) 

원주민 혼혈인 차모로 여인과 결혼하여 죽을떄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1975년도에 딱 한번 잠시 고국에 다녀갔을 뿐이다.), 

내 아버지 이동우(李東雨)와 동년배, 같은 시대를 살아 낸 사람 전경운(全慶運), 아니 마스모토(松本).

그가 서툰 한글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의 글을 남겼는데, 그 기록을 조성윤 교수가 정리하여 펴낸 책이 ‘남양 섬에서 살다’이다.


'남양살이 40년을 회고'라는 제목의 글 모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본말로 쓰는 게 쉽지만 그럴 수도 없어 한글로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일본말, 한자가 많이 들어있고 더구나 일제강점기의 섬 이름이나, 일본인을 대상 했던 만큼 일본말로도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위해서는 약도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읽기에 매우 힘들 것입니다. 원래 저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또 고향을 떠난 이후 우리말을 쓸 수도 없었고 듣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휘도 매우 변한데다 한국 표준말도 아니고 평안도 정주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그뿐인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회고록이니 만큼 문법에서도 많이 틀리고, 오자 탈자도 많아서 읽기에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양해하고 천천히 읽어가며 전후가 맞지 않는 점을 미루어가며 이해하십시오.>


책을 읽어보니 과연 전경운의 글은 어색한 문장구사와 적절치 못한 어휘선택으로 매끄러운 글은 아니었다.

조교수(이하 編者라 함)가 현지에서 입수한 회고록의 복사본들은 전경운이 1981년에 쓴 것과 1995년에 쓴 것이 혼재된 것.

편자는 헝크러진 자료들의 전후를 맞추어가면서 내용을 정리하였는데, 한글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다소 손보았을 뿐 최대한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세련되지 못한 톤으로 들려주는 그의 삶의 역정에 오히려 진솔한 감동이 느껴졌고, 그가 겪었던 남국에서의 갖가지 진기한 경험담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다.


전경운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 동창인 이중섭과 홍준명과 더불어 그림그리기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나 보았다. (상황 설명을 위한, 전경운이 손수 그린 스케치들이 책에는 여럿 실려있다.)

오산학교라면 이승훈이 세우고 조만식이 교장을 맡기도 하였던 애국계몽을 위한 민족학교가 아닌가.

그러나 오산학교 졸업 후 동경에 있는 척식(拓殖) 전문학교를 택한 전경운에게서 민족적 강개(慷慨)함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2년제 단기대학, 동경고등척식학교(東京高等拓殖學校).

학교(국립인가?)에는 만호과와 남양과가 있었는데 상당히 좋은 환경의 학교였다.

척식학교(拓殖學校).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식민지(植民地)로 삼는 것을 학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라니.

북으로는 만주와 중국, 남으로는 마리아나 제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사랑하는 손자를 위하여 학비를 대주신 할아버지, 떡을 해 싸주는 어머니, 조선인의 일본입국에 따른 가혹한 신문, 소식(小食)에 길들여지기까지 등등의 동경생활의 에피소드...

학교를 졸업하고 당초 전경운은 만주로 갈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이 무산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3년여 소학교 선생을 하였다.

그러다 학교 동기의 알선으로 남양무역에 입사하게 되어 재차 동경으로 가게된다.

얼마 있다가 남양군도의 사이판 지점으로 전근사령(轉勤辭令)을 받게 되는 전경운.


요코하마 항에서 출발하여 7일 걸려 도착한 사이판은 정경운에게는 경이로운 신세계였다.

5만여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이판은 밤이면 불야성의 네온에 번쩍이는 번성한 항구도시, 밝은 태양, 비취빛 바다.

전시(戰時) 동경에서는 계란까지 배급이라지만 바나나, 파인애플, 야자즙, 망고, 구아바, 사이판산 커피, 냉동된 가공품, 초콜릿까지 풍부한 식품들.

전경운에게 상하(常夏)의 남국은 마치 천국과 같았다.

회사 안에는 숙소와 식당과 상점이 있었고 독신사원들은 날마다 거리의 바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약 150명의 회사 직원중 그는 유일한 조선인이었고 무슨 특별한 차별같은건 없었다.

동경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왔구나하고 그는 안도와 더불어 자신의 행운을 감사한다.

그로부터 남양군도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전경운은 자신의 뼈를 그곳에 묻게 될줄을 상상이나 하였을까.


남양군도. (南洋群島, なんようぐんとう)

일제 때는 남양군도로 불리웠지만 지금은 미국 지배하의 미크로네시아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허니문과 바캉스의 섬으로 잘 알려진 괌, 티니언, 사이판... 

북쪽으로는 전경운이 주로 일하였던 파간, 아라마간 섬이 있다. 

<편자의 전저(前著) '남양군도 -일본제국의 태평양 섬 지배와 좌절-'은 남양군도에 관한 저간의 지식정보를 집약한 역작이다.>


전경운은 사이판 섬으로부터 북으로 한참 떨어진 파간섬 아라마간 섬등으로 전보(轉補)되면서 남양무역에서 인정받는 중견사원으로 성장한다.

야자를 키우고 야자과육을 말려 코브라를 만들고 그것을 선적하는, 그 일련의 작업을 관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러니까 도민(島民)과 방인(邦人)인 인부들을 통솔 관리하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도민과 방인에 대한 것은 뒤에 언급> 

전경운은 주도면밀한 성격이었고 창의적이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테크니컬스킬 (업무능력) 휴먼스킬(사람다루는 능력)도 빼어났다.

익숙하지 않은 열대환경, 일본인들과의 갈등, 이모저모 부당한 처우, 일꾼들과의 충돌, 향토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 능란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25,6 세의 젊은 나이로 인부들끼리의 갈등도 다독거려가면서 그들로부터 존경까지 획득한다. 

회사의 신임은 날로 더하였고. 그의 수입은 연봉 3천엔 이상이었다. (당시 3천엔이면 지금 돈 6, 7천만원은 되었음직)

그리고 선임 일본인 후지노로부터 영향을 받아 꿈을 키워갔다.

언젠가는 광활한 땅 수마트라로 가서 그곳 비옥한 토지에 자영 야자원(自營 椰子園)을 경영한다는.


태평양 전쟁.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이판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이도(離島), 아마라간 섬은 평화의 나날이었다. (전경운은 후일(後日)에야 당시 전황을 알수 있었다.) 

원주민은 옛 정복자인 스페인의 영향으로 대부분 카톨릭, 낙천적인 그들은 축제를 즐겼다.

전경운은 행사를 주관하고 인부숙소 일부를 교회로 쓰도록 배려하였고 간이학교도 개설하고 원주민들의 일꾼들의 다툼에는 판관(判官)역할까지 하였다.

전경운은 그 작은 섬의 권력자중 한사람이었다.

낚시와 쏠창 대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설날 축제, 종자 돼지새끼 도살 사건, 정사(情事) 혐의(嫌疑) 소동, 술이 나오는 야자나무, 게 사냥, 해조(海鳥)사냥, 알 채취, 모래온천, 쥐 소탕작전...

기록에서 들여다보는 남국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일본제국의 영토, 전쟁으로 부터 마냥 무관할 수는 없는 노릇.

아침마다 일장기를 게양한 조회에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의무적 국가 봉사체제로 조직은 전환되었고 물자공급도 점점 어려워졌다.

급기야는 아라마간섬 인부중 일부를 파간 섬의 해군 관하로 파견하라는 징용명령이 떨어졌다.

인원을 선발하고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전경운은 말한다.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들의 대변자가 되겠다"

전경운은 그들과 함께 파간 섬으로 이동하여 비로소 전쟁상황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전경운 통솔아래 그들은 파간섬의 비행장 확장공사에 투입되어 때때로 미군기의 기총소사를 피해가면서 작업을 수행하였다. 

23명 일꾼들로부터 전적인 신뢰와 돈독한 유대감을 갖고 있는 전경운,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해군은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다.

전경운은 23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 추장이었던 셈이다.


1944년 12월, 그 와중에서 전경운은 결혼을 하게 된다.

신부의 아버지는 조선인 (사탕수수 면화 재배의 1차 노무자로 남양군도로 온 전라도 사람)이고 어머니는 차모로인. (차모로인은 서반아와 원주민의 혼혈이다.)

전경운은 23명의 대추장으로서, 일본인 유력자들도 참석하여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루어졌다,

비록 방공호 안에서의 결혼식이었지만.

사실 전경운에게는 조선에 처와 자식이 있었고 (12살 때 早婚으로), 지위와 월급이 넉넉해지면 가족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결혼을 망설여왔던 것인데 혈기방강한 나이였고, 더불어 전쟁중에 언제 살아돌아갈수 있으랴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사이판은 벌써 함락되었고 마침내 파간섬의 일본군도 백기를 게양(揭揚)하였다.

어디로 가야하는가, 전경운은 암담한 열패감에 빠져버렸다.

<우리는 마음놓고 대낮에 어디든지 걸어다니며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또 한편 나는 어디로 가나 앞이 캄캄했다. 더구나 내 처는 차모로다. 나와 결혼한 것이 큰 잘못이 아닌가. 승자 편에 들어가야 앞으로 잘 살아갈수 있는데 내 마음은 매우 복잡해졌다. 다른 한편 나라는 자는 약자로 기회주의,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며 살아왔다. 변절자, 너는 어디로? 고국, 일본, 당시 나의 추리는 우리나라도 같이 해방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막연하였다. 에라, 오히려 폭탄에 맞아 쓰러진 자가 행복이었다. 왜 살아났을까, 앉아만 있으면 비애의 한에 잠겼다.>


미군 LST로 사이판 수용소에 이송되는 민간 포로들.

선상에서는 차모로인 군속이 일본인들을 통제, 이제 지위가 역전된 것이다.

전경운은 짙은 몰락감(沒落感)에 젖는다.

<나는 북도 5년 동안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이 보낸 편지에 돈을 벌러 간 것이 아니야. 일을 하고 돌아오라는 것이 문득 생각에 떠오른다, 나는 회사에 입사한 이래 봉투에 들어있는 월급은 두 번 밖에 받지 못하였다. 회사에 남긴 돈이라면 적어도 만 엔에 가깝다. 일본 패전은 나 역시 패망이었다. 그것 뿐인가, 내 숙소 아라마간 섬에는 그래도 5년 동안의 소재품(所在品), 책자 여러가지 기록이 있었는데 이제 이 몸은 이제 거지의 몸으로 사이판 섬으로 가자니 이것이 꿈 아닌 현실인가.>


미군이 점령한 사이판에는 조선인 캠프와 일본인 캠프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인 캠프는 철조망으로 둘러 싼 깨끗한 목조건물, 이웃에 있는 일본인 천막 캠프에 비하여 월등한 시설이었다.

조선인 수용인원은 1400여명, 전경운은 비로소 남양군도의 조선인 동포와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1400여명의 동포들이 한 곳에 모여 산다는게 놀라웠다. 나는 그동안 남양에 우리 조선인이 얼마나 살고있었는지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지 꼴의 자신에게 의류등 생필품을 주는 교포들.

<상부상조로 살아온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은자의 나라, 백의 동포라는 긍지를 새삼 느꼈다. 나에게는 6년간의 낙도 생활 동안 돈 쓸 데가 없어 모아진 2만원 여 현금 외에 국채도 잇었지만 일본 패망으로 내가 살던 곳까지 폭파되면서 한 조각 기념물도 남긴 것 없이 알몸 그대로 돌아왔으니 슬프다는 말만으로 형용이 되질 않았다.>


한국계 미국인 통역관이 중간 역할을 할뿐, 캠프는 전적으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지식인에 속하는 전경운은 사법주임이라는 일종의 경찰서장 직책으로 6개월 가량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곳에서 그는 <일반 교포들은 나를 경원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전경운의 이 한마디 멘트가 시사하는 바는 무얼까.


1946년 새해, 외지인의 고국 귀환명령.

조선인 캠프에서는 20여 가족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잔류 하겠다고 미군 정부에 신청하였다.

오키나와 출신(邦人)도 500여명이 잔류신청 하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미군 정부는 섬사람 이외에는 모두 강제로 각자의 고국으로 송환키로 원칙을 세웠다.


전경운은 진작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무슨 갈등이 있었을까.

<모든 걸 상실한 내 몰락, 처가 댁에 따라야만 살수 있는 상황과 처지. 이제 이 섬은 그들의 것이다..>

그가 남양 섬에 남을수 밖에 없는 당위를 그의 기록으로는 명확하게 이해할수 없었다.

남양 섬에 대한 애착이 그토록 컸거나 어떤 포부가 있었던지, 아내를 매우 사랑하였던지. 혹은 고국에 대한 모종의 죄의식이 있었을런지... 

전경운은 아내 편에서 신원을 보증하여 장인과 함께 잔류가 허락되었다.

1400 여명 동포가 떠난 텅 빈 캠프에는 그의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


조성윤 교수(編者)가 정리하여 책에 실은 부분은 여기까지이다.

잔경운이 남양군도에 잔류키로 한 그 이후, 기록의 뒷부분은 후일을 기약하며 이 책에는 싣지 않았다.

편자가 책의 모두(冒頭)에서 들려주는 개략적 후일담은 이렇다.

전경운은 사이판에서부터 괌을 거쳐 티니언에 정착하기까지 5, 6년 동안 여러가지 일을 하고 사업을 벌였다.

잡역부, 미군의 그림을 그려주는 일, 투계장 운영... 

그러다가 1951년 티니언 섬에 정착하여 농사업에 진력하였다. <남양무역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 회고록 뒷부분에서도 그런 면모가 뚜렷한 모양이었다.>

그는 1975년 잠시 한국을 방문한 이외에는 마리아나 제도를 떠난 적이 없다.

슬하에 9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 차모로 구성원으로 성장하여 절반은 미국 본토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육받고 살고 있다.

전경운은 신탁통치가 끝난 다음 미국령이 된 마리아나 제도의 시민으로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여태까지 전경운으로 호칭(呼稱)하였지만 그의 이름은 헤수스 마쓰모토이다.

남양무역 시절 그는 젠(全)이라고도 불렸고 마쓰모토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개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중 카톨릭 세례를 받을때 노신부는 귀가 어두워 그의 이름을 "졍경경?"하고 반복하여 물어 주위에서 폭소가 일었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가 마쓰모토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얼결에 교명(敎名)이 헤수수 마쓰모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카톨릭 문화권은 교회명(敎會名)이 통상의 이름이 된다고..>

마쓰모토라는 이름은 일제하 조선땅 강제적 창씨개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전경운은 이름이야 어떻든  아무런 거부감없이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자식들이 일본식 이름이 부끄럽다고하여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은 전(Juhn)으로 개명하기도 하였지만.>


전경운에게 조선인으로서의 뚜렷한 민족의식 같은건 엿볼수 없었다.

남양군도에는 수많은 조선인들, 자의로 혹은 강제로 온 노동자 병사 위안부들이 있었지만 그들과의 접촉 또한 없었다. (캠프시절을 제외하고>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귀환하는 조선인 중에 그는 끼어있지 아니하였다.

남양무역 회사 내에서 유일한 조선인이었지만 조센징이라고 하여 차별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다. 

배 안에서 처음으로 인종차별의 현장을 목격하고서 놀랐을 정도이다.

도민(島民)은 선상 갑판에서 옷을 펴고 자고 방인(邦人)은 선내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島民이라 함은 차모로인등의 원주민을 말함이고 방인(邦人)은 오키나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순전히 내 생각인데 일본인들의 하이라키(階級) 의식은 대충 이러지 않았을까. 본토인-오키나와인-조선인-중국인-차모로인-원주민. 그런데 전경운은 오키나와 일꾼들을 감독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남양군도의 치열한 포화 속에서도 그가 전쟁을 겪은 것은 짧은 동안의 미군기 기총소사를 경험한 것 뿐이다.


조성윤 교수의 주요 연구 주제 '섬'.

조교수는 제주도와 오키나와와 남양군도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유허지(遺墟址)를 답사하였다.

귀하게 접한 전경운의 기록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 시절 남양군도를 거처간 조선인들 뉘라 기록 한줄 남겼을까.>

그러나 생각건대, 기록은 조교수가 천착하고 있는 섬 연구에 있어서 적합한 사례는 아니었다. <기록 속에 묘사된 남양군도 여러 면의 사실적 디테일에서나마 취할 점이 있을랑가.>

전경운은 연구자에게 적절한 귀납과 연역의 보편성을 획득할수 없는 사람이었다. 

전경운은 특별한 사례의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느끼건대, 이 책의 출간은 조교수와 조교수의 아내되는 사람의 감상적 소회(所懷)의 산물일 것이다.


<나와 아내는 호텔에서 하루종일 이 회고록을 읽었다, 한국인 매국노라 불리던 한 남자의 인생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이런 인생이었구나, 감동과 연민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었다.-책 머릿말 부분->


<책이 나온 지 3주가 채 안 되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흔하게 하지만 새삼 그 말뜻을 이해하겠다. 내가 바로 그러니까. 팔리고 안 팔리고 보다는 책을 만들기까지 마음을 쏟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많았고 책이 되어 나오자 나는 오랫동안 겪던 내 심리적문제까지 해결된 것 같았다. 책이 잘 안 팔리면 전경운 씨는 섭섭해할까. 돌아가신 분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하지만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흔들리는 글씨로 자기 삶을 써내려가던 그분의 외로움과 고국의 사람들에게 자기 인생을 말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제대로 된 책 모양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자기회고록이라고 복사한 종이묶음으로 한인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자필 글씨는 어지러웠고 그 종이묶음을 건네 받은 한인들은 그의 인생을 읽어내기 어려웠다. 그걸 세상사람들이 잘 읽을 수 있도록, 책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지러운 글씨로 가득한 자필회고록이 그를 대신해서 부탁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오해를 나와 남편이 했을 뿐이다. 글자가 사람처럼 말을 건네오던 느낌. 세상의 예상대로 이 책은 더는 알려지지 않고 그래서 찍어내지 못하고 말지라도 이 정도라도 했으니 괜찮지요! 라고 전경운 할아버지께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책으로 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는 친일파 마쓰모토로 비난 받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일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도 말하고 싶다. 나는 그의 회고록에서 상황에 좌우되어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모습을 봤고 그 때문에 매력을 느꼈다. 전경운은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도 뭣도 아니고 업적이 크고 훌륭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그때의 삶에 진실하고자 하였다. -조교수 아내, 김미정의 블로그 글->


머릿속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본다.

놀 짙은 남국의 방갈로.

이방의 섬에서 일생을 보낸 늙은 사내의 실루엣.

장엄하지도 강렬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애틋하고 쓸쓸할 뿐이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누구보다 내 동생, 자식, 조카들을 위하여 우리 가족중에 살아남은 어른이며 선배로서, 제 체험이 일부분이나마 이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에서 써 보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회고록의 문체를 되도록 소설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자서전이기 때문에 그 안에 제 자신의 철학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기 위한 투지와 인내, 체관으로 자기 열등의식을 부인하며, 자살과 자폭은 인생의길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후배인 자손들에게 시사를 주려는 마음, 평범한 형이며 남편이며 어른으로서 서슴없이 써 본 것입니다. 또한 조상님들에게 대한 속죄의 마음도 있습니다.제가 죄인은 아닙니다 하는 변명도 되고, 또 우리 선배에게도 잘 살았건 못 살았건 배신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기록의 행간에는 죄의식도 숨어 있을 것이고, 위장(僞裝)과 과장과 변명도 스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살아 낸 삶, 그 현실을 이해 받고자하는 열망의 눈빛을 나는 본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우물을 들여다 보도록 성의를 다하여 흔적을 남겼다.


나 유아(乳兒)적 월북하여 북녘 어느 모롱이에서 돌아가셨을 내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그 이도 한조각 기록을 남겼을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으흠, 내게도 기록이 있거니와 야들아 후제 한번 우물속 들여다보거라.

내가 세상을 사랑하였는지 미워하였는지 몽롱함으로 자욱한 것이지만. ㅎ


마쓰모토더러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그 시대 지사(志士)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은 죄 친일파인가.

민족의식 엿보이지 않아 그것이 친일인가.

일본 회사에서 성심껏 일한 그것이 친일인가. 

일생을 일본이름으로 살았다고 하여 친일인가.

그대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그 시대 삶의 자리는 어떤 모습이었느뇨.

역사 속, 개별들이 살아 낸 삶의 자리.

이데올로기로 들여다보지 말라.

오히려 망탈리테의 자리이노니.



출처 : 동 우
글쓴이 : 동우 원글보기
메모 : 책부족민인 동우님의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