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 일본학과 2020-

독서분투기 우수상에

자몽미소 2020. 11. 24. 10:29

 

 

 

 

 

 

아들이 돌아버려서 쓸쓸해요?”

몇 년 전, 라인(LINE) 앱으로 후루가와씨가 보낸 메세지였다.

아들이 군 복무 중에 휴가를 왔다가 복귀하였는데 라인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던 후루가와 씨는 아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을 나를 위로해 주고 싶어했다. 군대 휴가 왔다가 돌아버린 아들이란 후루가와씨의 표현에 한바탕 웃음이 나서 쓸쓸하던 마음에 정말 위로가 되었다. 일본에서 한글을 배우는 있고 자칭 한류 아줌마인 후루가와씨가 쓰고 싶었던 한국말은 아드님이 돌아가 버려서 쓸쓸하겠습니다.” 였을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후루가와씨와 일본어를 배우는 나는 라인 메시지로 상대 나라의 말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새로 배운 단어가 있으면 다음 메시지를 쓸 때 응용하기도 한다. 갱년기 불면증으로 다소 불편을 겪던 나는 최근에 잠을 푹 자게 하는 일본제품의 약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ぐっすり 자게 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굿쓰리, 굿쓰리!’ 하며 발음하고 있으니 푹 자고 일어난 아침에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는 내 모습이 연상되었다. 실제로 그 약은 잠을 푹 자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단어를 쓸 일이 생겼다.

장시간 여행 후에 피곤하다는 후루가와씨에게 나는 오늘 밤에 푹 주무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今晩ぐったりってください라고 적어 보냈다. 내가 쓴 ぐったり는 한국말로는 욕에 가까운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며칠 걸렸다. 번역하자면, ‘오늘밤 퍼져 자라라거나 뻗고 자라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나는 또 구다사이라고 붙였기 때문에 주무세요라고 하는 줄로 착각했다. 나보다 연상이기도 한 후루가와씨에게 일본인 화자라면 쓸 수 없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후루가와씨는 ぐっすり라고 쓸 걸 ぐったり라고 쓴 나의 실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한동안은 퍼져 자라는 말을 저녁 인사말로 자주 사용했다. 어느 날 문득 사전을 찾아보고서야 미안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후루가와씨는 내가 두 단어를 혼동한 줄 짐작하였고 푹 주무세요로 알아듣고 있었다.

일본어와 커뮤니케이션을 읽으며 후루가와씨와 나의 메시지 교환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인끼리라면 경어법이 맞지 않거나 해서 기분 나빠졌을 표현들, 어법에 맞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우리 두 사람은 몇 년 동안이나 사이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14쪽에는 메시지 발신자가 궁리를 거듭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기호화하더라도 최종적인 이해는 수신자가 기호 해석한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메신저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수신자이지 발신자가 아니다. 메시지의 의미는 수신하는 쪽이 결정한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하시모토, 2006)” 라는 문장이 있었다. 잘 알아듣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외국어로 쓰는 사람들끼리의 경우만이 아니라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에게서도 중요하다. 일본어와 커뮤니케이션는 일본어의 특징을 알고 배우기에 좋은 텍스트였지만 한국 사람들끼리의 언어소통을 대입해 읽어보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내가 방송대 일본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하였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일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 ‘일제식민지, 공출, 강제연행, 위안부, 아베와 자민당, 독도와 쪽발이라는 말을 한 바가지에 담고 와서 얼굴에 펴 바른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공부할 게 그거밖에 없나?”

공부할 게 그것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고 싶은 외국어가 일본어이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도 알고 싶은 나에게 그들의 찌푸린 얼굴은 38도선 이상의 벽처럼 느껴졌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내가 100여 년 전에 일본에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의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계했다. 내가 일본학과를 졸업이라도 하고 나면 한일합병 110년 기념으로 새로운 친일파가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인지 일본에 배울 게 뭐 있다고 조롱하는가 하면 일본학이 공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본이라면 무조건 싫다는 반응에 새삼스레 놀라며 한국사람끼리 한국말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지는 거리감을 느꼈다.

일본에서도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한류 아줌마들을 한심한 족속으로 보면서 한국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다. 길거리에서 확성기를 틀고 다니는 극력 우익들은 한국과의 사이가 나빠질 때면 신이 나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들에게 한국이란 일본을 귀찮게 하는 적일 뿐이다. 구체적인 한국 사람, 역사의 어떤 사건, 또는 한국의 문화를 자세히 알고 있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싫다는 미움이 가득한 태도를 보인다. 전쟁터에서 무찔러야 할 적군과도 협상의 여지가 있는데 한국타도를 외치는 확성기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한국은 밟아 죽여도 좋다는 듯이 일본 우익들의 몸짓은 거만하고 무례하다. 어떤 정치세력들은 이런 사람들을 지원하여 상대의 말을 듣지 않도록 만든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양국의 정치권력은 내 목소리만 높이고 상대의 목소리는 무시하는 전략을 써서 국민들을 선동해왔다.

이렇게 이웃나라를 자기 생각과 감정의 잣대로 보고 판단하는 국민들 속에서 한일 양국 사이의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역사의 과오에 대해서 사과를 했고 배상을 다 했다는 일본과 사과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국 측의 생각은 늘 정치적인 갈등을 만들어왔다. 이 일은 양국간의 정치판도에 따라 화해의 분위기로 갔다가 금세 나빠져 왔다. 일제강점기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측이 일본측에게 우리측의 입장을 전달하더라도 일본측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만 말을 하고 대응하기에 역사문제는 점점 정치적 해결보다 국민감정을 나쁘게 부채질하는 데 동원되곤 한다.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과 일본이 왜 서로의 말을 존중하여 잘 알아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정치권에서 나온 말들은 점점 부풀려지면서 상대 나라를 기분 나쁘게 하고 있는 것일까.

264쪽에는 일본인이 사고와 감정을 기호화할 때는 일본어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에 따라서 행하며, 메시지 송신자에게서 수신한 기호를 해석할 때도 상대방이 일본어 문화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에 따라 기호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려 한다.” 라고 쓰여있다. 이 말은 한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일본인의 말을 일본의 문화권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우리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 안에 일본 나라에 대한 나쁜 감정이 축척되어 오는 동안 우리는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언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역사문제 해결에도 적용해 보려는 노력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역으로 일본 또한 한국인의 정서, 일제 강점기 때의 피해 등을 고려해서 우리의 말을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서로 간의 부실한 노력이 현재의 한일 양국간의 갈등을 더 깊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게 보면 정치 영역이지만 그 정치를 만들어가는 것은 서로 간의 언어가 기본이고 언어는 문화를 반영하며 문화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본어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저자들은 일본어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커뮤니케이션에서 발생하는 오해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같은 유교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이지만 각각의 나라의 독특한 언어습관을 언급하며 차이점을 알려주는 대목은 특히 유용했다. 68쪽에서 일본식 의례에서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인사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인사든, 상대의 얼굴이나 눈을 보는 것은 거북하므로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사 동작과 대인 거리를 설명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일본 영화에서 보이는 도게자의 인사법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도게자나 중국의 고두는 거룩한 상대의 시선에서 보다 더 멀리 자신의 눈높이를 두는 안전장치로서의 몸짓이다. 심리적 거리는 인사말에서도 나타난다. 인사말은 염려, 날씨, 시간, 재회, 말걸기 계열로 정리를 해 보니 (74)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살피는 탐색계열의 인사를 한다.

우리 한국어의 일반적인 인사는 안녕하세요?’로 아침에 만난 사람에게는 밤새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아침을 맞았느냐는 염려가 들어있다. 식사하셨습니까?’로 오전부터 이른 오후 사이에 상대에게 건네는 인사말에도 배를 곯지 않고 지내고 있느냐는 염려가 들어있다. 이 말을 들은 외국인들은 같이 식사를 하려고 그러는지 아닌지 곤란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그러나 이 두 인사 모두 상대의 안녕이나 식사유무를 물어보는 것은 아니고 정형화된 한국인사말일 뿐이다.

내가 사는 제주도에서도 길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요즘처럼 도시가 커진 이후는 점점 사라져가는 인사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상대가 가려고 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볼 일이 있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나의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 한국어의 인사말의 특징은 상대를 염려하고 관찰하는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인사말은 중도 종료형의 발화 형태로서 뒤에 언급할 내용을 다 말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영어권에는 좋은 아침이라며 날씨를 이야기 하거나 헬로우!’ 라고 말 걸기 게열에 속한다. 여기서 대인간 거리가 가장 가까운 인사는 탐색계열이고, 먼 인사는 중도 종료 계열, 즉 일본어가 그에 해당된다. 세계의 각 지역마다 인사말에는 대인 간의 거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매우 재미있다.

책을 읽으며 일본어가 다른 나라 말과 어떻게 다르게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언어와 대인관계를 중심으로 엮어진 이 책은 언어심리학의 한 부분을 공부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저자들이 쉽게 설명을 해 준 덕분에 짧은 시간에 읽고 공부가 많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것이다. 특히 일본어의 수사를 설명한 오노마토페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12) 그러나 이 영역은 일본어를 더 많이 공부하고, 문학 작품도 더 많이 읽은 후에나 이해의 폭을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의 유희를 이해하기엔 내 일본어는 한참이나 부족하다.

책의 어느 장을 읽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일본어의 기능과 작용을 새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여 서로 소통을 잘 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며 읽었다. 그러므로, 나는 한일 양국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공부하고 더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공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입장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여유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쥐고 싶은 정치가들의 선동에서 비켜서서 한일 문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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