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역으로>- 읽던 중에 만나는 칼마르크스와 엥겔스
(2024년 5월 18일, 267 쪽까지 읽고 메모)
1948년 12월 19일에, 내 외할아버지는 죽었다. 나는 그가 서른둘의 나이로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여섯 살이었던 그의 딸의 딸이다. 나의 어머니인 그의 딸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쯤은 아버지 얼굴을 봤던 것 같다고 했다. 세상에 나와서 여섯 해를 사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게 하는 어떤 날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날이 어땠길래 아버지의 모습이 그 기억 속에는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의 어머니는 중산간인 납읍 마을에서 바닷가의 애월 마을로 피신을 온 외할머니를 만나러 다녀온 일을 기억한다. 애월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생을 업은 어머니 뒤를 울며 따라 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길 어느쯤에선가는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고, 어떤 여자들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통곡하며 무언가를 찾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리고 구엄리 마을 바닷가의 동굴에 숨어 있던 일과 그 동굴 안에서 들었던 총소리를 기억한다. 여섯 살이던 어머니에게 4.3의 모습은 눈물과 울음소리와 총소리였고,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 책, <핀란드 역으로>의 약 삼분의 일 정도를 읽었다.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을 오가던 19세기 말의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며 다다를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을 건너와 살고 있고, 그 시기 유럽에 관한 것이라면 역사적인 사건과 사람을 얕은 교양으로나 알고 있는 정도라서 나로서는 읽기 쉽지 않은 책이다.
오늘까지 267쪽을 읽었는데, 기억나는 인물의 이름은 칼 맑스, 엥겔스, 생시몽, 헤겔,아놀드 프랑스, 나폴레옹 정도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귀에 익은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그들 외에도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이름이 많았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들에 관한 일화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읽으면서 잊어버리는 식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라 소개한 조성윤 교수는 앞부분을 대략 읽으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맑스로 넘어가 읽으라고 했다. 조언대로 앞부분을 대략 훑고 맑스와 엥겔스 부분을 읽고 있는 지금 왜 이 책 제목이 <핀란드역으로> 인지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였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동시대인들이 헤겔 철학에서 이끌어낸 한 가지는 역사변천의 개념이라고 한다. 헤겔은 역사상의 위대한 혁명가들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역사의 큰 산을 움직인 뛰어난 개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위대한 역사가의 배후에 있는 사회의 여러 세력이 그 개인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목적을 달성하는 대행자라고 밝혔다.( 225쪽)
이 책의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업적은 방대하게 축적된 지식을 집대성하고, 갖가지 조류의 이론을 결합하고, 생생하게 새로운 관점을 수립했다는 점에 있다고 하였다. 이 두 독일 청년은 새로운 사회 발동기에 동력을 제공하는 전류를 발생시킨 것으로, 이러한 맑스주의의 전류 형성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적 사건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전야의 정치 정세 속에서 헤겔은 유도액체 구실을 했다.
1848년은 프랑스 혁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해를 기점으로 칼 맑스와 엥겔스는 이전까지의 인기가 급락하는 것 같았다. 다른 나라로 피신했다고 추방된다든가, 부모님조차도 받아주지 않아 유럽 일대를 헤매고 다니는 두 사람의 일화를 읽었다. 프랑스 혁명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맑스와 엥겔스라는 개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것일까, 앞으로 책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나는 이 해, 1848년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1948년의 제주가 그 두 사람이 살았던 유럽의 정치와 철학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어렵풋이 들었다.
<공산단 선언>이 1948년 2월에 런던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독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동맹 회원 몇 백 명에게 책자가 배포되었을 뿐 일반에게 판매되지는 않았다. 또한 파리의 노동자 운동이 패배하면서 <공산당 선언> 책자도 어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점차 서구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점점 세계 사람들이 읽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를 독자로 삼으려던 이 책의 파도가 산과 바다를 건넜고, 이윽고 일본에서 해방된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어땠을까.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은 것은 온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라는 공산당 선언의 구호에 벌벌 떠는 집단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한국의 지도자와 새로운 세계의 지도자를 자처한 미국이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이해해야 한다. 세상의 욕망을 알기 위해서 내 생각이나 감정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곤 한다. 나는 <핀란드 역에서> 이 책의 내용을 저자가 알려주려는 만큼 이해할 수는 없고 때로 너무 자세한 설명에 독서가 지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속사정을 읽는 맛이 이 책의 매력인 것 같았다. 그래서 1848년과 1948년을 이어보며 내 삶의 한 부분에 세계사가 닿아 있다고 여기는가 하면, 맑스와 엥겔스의 성격이 요즘 갑질하는 인간형에 가깝구나 여기며 웃음이 났다.
위대한 철학자와 역사가의 사상이 시간을 지나면서 변하는 바람에 꼭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지역사에서 또는 인간사에서도 벌어지는 양상이 비슷하다고 느낀다. 그나저나 아직도 이 책을 다 읽으려면 며칠이 걸리겠다. 왜 <핀란드 역으로>라고 제목을 지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라도 책을 덮어서는 안 되겠다고, 오늘 시점에서 생각해 본다. 사연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마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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