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책,<살인의 해석>-마음을 읽는다는 것

자몽미소 2007. 4. 17. 13:19

 

 

 

 

 

 

 

 이 책의 앞 부분을 두 번 읽었다.

 

행복에 있어서 수수께끼란 없다.

불행한 이들은 모두 똑같다. 오래전부터 그들을 괴롭형온 상처와 거절된 소원, 자존심을 짓밞힌 마음의 상처가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경멸로 인해, 더 심각하게는 무관심으로 인해 꺼져버린 사람의 재가 되어 불행한 이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아니 그들이 이런 것들에 달라붙어 있다. 그리하여 불행한 이들은 수의처럼 자신들을 감싸는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행복한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을 바라보지도 않고, 다만 현재를 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곤란한 점이 있다. 현재가 결코 가져다주지 않는 게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의미다. 행복해지는 방법과 의미를 얻는 방법은 다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 단지 순간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미를 꿈과 비밀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얻고 싶다면, 아무리 어둡더라도 과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연은 행복과 의미를 우리 앞에 대롱대롱 흔들어대며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다그친다.

 

작가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곧 나는 이 책을 읽어볼 만한 책이라도 단정했다.

 

 

프로이트와 융이 미국을 방문하였던 날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범죄 추리 소설이다. 그러나 동시에 심리학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정신분석학이 미국에 당도하던 때의 이야기다. 물론 심한 저항에 부닥친 <정신분석학>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유럽에서 배척되던 프로이트의 개인사도 알아두면 좋겠다.

 

 

<살인의 해석>은 꿈을 해석한다. <꿈의 해석>은 이 소설의 중요한 기둥이다. 세익스피의 햄릿과 그의 고뇌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연구를 위해 인용하게 했지만, 주인공 영거 박사에게는 새로운 통찰을 만들어 준다. 프로이트의 연구에는 도라 라는 여성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노라는 심리학 박사 영거에게 자기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살인의 해석>은 범인을 �는다. 독자는 등장하는 형사의 예리한 눈빛을 따라가며 문장 안에 숨은 복선을 알아차리며 범인의 뒤를 쫓아간다. 잡힐 듯 하다 잡히지 않는 범인은 누구일까?

 

사실과 허구가 섞이고 실제와 거울상이 혼재한다. 미로 속의 미로를 걷고 열린 문에서 안도하다가도 범인의 어두운 그림자에 흠칫 놀라게 되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러나 <살인의 해석>의 가장 큰 묘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즉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심리파악에 이미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초가 나와 있다.

 

작가가 독자를 향해 가르치려하지 않고 독자의 몫을 많이 부여한 소설은 독자를 지겹게 하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었다. 다 읽고 나면, 앞에 이 소설을 선택하며 눈에 끌렸던 문장들은 이 소설을 이끄는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만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작가는 무척 심사숙고한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번 저 위의 문장을 읽었고, 마치 이 소설의 심장이나 되는 듯이 여겼다.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건 심리학이 되었든 문학이 되었든 내 주의를 끄는 부분이다. 더구나 행복과 불행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사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은 복잡한 인간의 마음이다.  100년 전 인간이든 현재의 인간이든 복잡미묘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 프로이트이 정신분석학이 완전하지 않았듯이 앞으로 마음에 관한 보고서는 산더미 같이 쌓여질 것이면서도 영원한 인간의 숙제이리라.

 

종결이란 없는 마음의 물결,

그러나 소설의 재미는 그 파랑같던 마음들이 엮어가는 사건에 마침표를 찍어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었다. 소설의 말미에 보여주는 작가의 판단이 있길래 100년 전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이 되고 독자는 작가를 따라 그가 안내해준 길 마지막까지 가 보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삶의 복잡성은 끝이 없지만 소설은 끝을 보여 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