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메이지 천황을 읽고

자몽미소 2007. 2. 21. 12:42

 

 

  고등학교에 들어가 세계사를 배우던 시간에 <메이지> 라는 이름은 우리의 역사를 부끄럽게 만드는 상징으로 들렸다. 그때 세계사 선생님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재빨리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조선왕조가 너무 오래 권력을 쥐고 있던 바람에 우리나라는 모든 것에서 뒤쳐져 버렸다 고  쯔쯧쯧 하시던 표정엔 대학원에 들어가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있었던 학구적인 선생님의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 

  근대화 라는 말이 국가의 의무가 되었던 시대를 조금 벗어나 있었던 시기였지만 그때 까지도 근대화는 여기 저기 걸려 있었다. 자취방 골목길을 나서면 보이는 구멍가게의 이름은 근대화 연쇄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근대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 근대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지만  문학에서의 근대란 무슨 의미인가를 강의 들으면서 근대는 순대,근대 가 비슷한 음이지만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것처럼 근대가 뭐냐고 물어보면 할 말을 잊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더욱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 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고 유행어 속의 근대는 무슨 식물로 만든 것인지, 무슨 맛인지를 모르는 요리책 속의 근대국보다 더 생소했다.

 

  일본의 근대화와 동일시 되는 <메이지> 라는 단어는 메이지유신 과 동일어였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책과 섞여지면서 헌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한다는 이미지로 굳혀졌고 일본이 우리 나라 보다 근대화를 빨리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와 백성이 합심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 했다.  조선왕조 500백년이란 시간이 그 후 한일합방의 치욕, 잇따른 동족간 전쟁까지 만든 것이라 여기게 되니, 텔레비젼에서 방송되는 드라마 속의 여인들간 권력투쟁과 세력간의 당쟁도 우리 나라에 <메이지유신>과 같은 국민적 각성을 만들지 못하게  방해 했던  암투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일본은 간단하게 메이지 유신을 하고 부강한 나라로 일찍 접어들 수 있었을까,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웃나라의 대동단결에 대한 부러움을 내 나라 역사시간에 배웠다. 그러나 과연 내가 받은 교육이 바른 것이기만 했을까, 우리 나라 백성들과는 달리 이 나라 일본은 그렇게 간단히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에 관해 더 알아보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처음 일본에 여행을 왔던 2003년 여름에 <메이지 신궁>을 관광으로 둘러 보았지만 신도가 국가의 종교이니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셨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 했었다.

 

일본에서 생활하게 될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할 때쯤 일본역사 소설을 읽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비로소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이에야스의 권력잡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일본의 중세에 대해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사회과학 쪽의 책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화려한 군주-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

 

였다. 근대화 라는 이름 아래에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과 국가의례의 가식을 이때 되돌아보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우리 나라의 1970년대 근대화에도 여러 가지 닮은 꼴이 보였고  부국에 근대화는 필수적이라는 명분을 내 건 정치적인 욕망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지난 해 4월에   동경, 하찌오지시에 살면서 그 옆 도시인 다찌가와의 소화 미도리 공원 http://blog.daum.net/namu-dal/8247466 에 갔었다. 

 

그 전 해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뿌리와 이파리>

 

 를  읽으면서 히로히토 천황에 대하 궁금증이 일던 차라  공원을 가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튼튼히 건재하고 있는 이 나라의 우익세력의 존재를 느꼈다. <미도리 공원>은 히로히토 천황을 기리며 만들어진 공원이었다. 메이지 신궁이 메이지 천황을 기려 만들어진 것처럼. 그러나 인간 선언을 한 히로히토는 신궁을 만들수 없었다. 그래서 보수 우익 세력들이 신궁 대신 엄청나게 넓은 소화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반면 별 볼일 없었던 그의 아버지 다이쇼 천황은 기념하는 공원도 신궁도 없다. 하찌오지시에 있는 다이쇼 천황의 무덤만이  역사에서 별 치적 없이 존재하다 사라진 그를 기억할 뿐이다.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은 소화기념공원을 다녀오고 난 후 읽은 책이었다. 어떻게 천황이라는 존재가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 신비감을 갖고 존경심을 갖게 하는지를 파헤친 그 책에서 이 나라의 천황이 백성의 마음 위로 자리 잡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은 역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시작이 바로 메이지 천황이었다. 조슈번과 사쓰마 번은 일찌기 서양세력과 교통을 하고 있었고 이미 무역을 통해 부강해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토쿠가와 시대 200년간의 정치에서 기인했다. 토쿠가와 정치권에서 밀려난 그들은  스스로의 힘을 길렀고 다시 한 번 정권을 잡게 된 것이 메이지유신이었다.

 

메이지 유신은 내가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고메이 천황은 서양 사람들이 일본 땅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싫어했으며 어떻게든지 개항을 막아 보려고 했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서양세력으로 부터 나라의 문에 단단한 열쇠를 채워 두는 것이었다.

 

그가 죽고 어린 천황이 등극했다. 

 

이 책은 메이지 천황의 나고 자라고 치세하고 죽기 까지의 일을 그린 역사서이다. 그 시간 속에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이 있었고 뤼순 사건과 같은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으며 한일 합방이 있었고, 오끼나와 와 대만 같은 주변 국가를 먹어치우는 제국주의의 야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 메이지천황은 과연 어디 까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전하고 작용시킨 것일까,  역사 속의 한 인간에 대한 탐구는 그러나 그다지 쉬어 보이지 않는다. 천황을 증거해 줄 인물들의 고백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황의 수많은 일화 속에서도 천황의 진심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메이지 천황이란 인간에게 흠뻑 빠지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대한 저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들썩이는 욕망과 우연을 잘 볼 수 있는 역사서이다.

 

우리가 대한독립의 영웅이라고 하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도 그가 파악하는 것은 색다르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한일합방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관점이라든지, 민비와 대원군에 비해 무능했던 고종에 대한 서술은 눈을 비비며 읽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이 쓴 역사책을 볼 때와는 다른 관점으로 우리 나라 역사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저자가 참고하였던 책 중에는 <조선의 양이와 개화> 라는 책이 있다. 재일 역사가 강재언 선생의 저서이다. 오늘 나와 남편은 그 분의 초대를 받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오늘 책을 덮으며 저자 주를 읽어 보니 강 선생님의 책을 상당 부분 참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옥균 일파의 개화세력의 이야기가  또 재미있었다. 대체로 이 책에서는 역사적 사건이 아주 작은 우연이 겹쳐 일어나게 된 사연을 자주 보여준다. 나는 잠깐씩 <나비 효과>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역사적 가정이란 참으로 허무한 것이긴 해도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우리 나라의 역사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음을 기억할 때 더욱 그랬다.

  그의 역사적 상상력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글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서 알아보려 해도 알 수 없었던 메이지 천황의 심리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저자의 상상에 의한 것이었지 사실이 어떠한지는 몰라서 역사적인 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 책을 쓴 도널드 킨은 문학사를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이 책은 <신조 45>라는 잡지에 매달 연재 되었던 것으로 이 책의 근간이 되는 것은 <메이지 천황기 (전 13권)>이다. 그러나 책 뒤의 방대한 저자 주도 따로 읽어 보니 재미있었다.

 

일본을 알고 싶다는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을 아는 다른 창이 된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