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2010년에 읽는 책- 조지오웰< 동물농장>

자몽미소 2010. 3. 1. 17:30

 

 

 

 

소설-동물농장 

어떤 훌륭한 이상이 땅 위에 내려와 발아 하려할 때, 누가, 어떤 환경에서 그 이상을 길러내는가에 따라 열매는 매우 다르다는 건, 자연스러운 세상 이치일 것이다. 어떤 농부가 무슨 씨를 어느 밭에 뿌리는가에 따라서 열매가 크고 작으며 충실하거나 보잘것없게 되듯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상 사회가 러시아  땅에 가서 스탈린이 재배를 하기 시작하자, 원래 만들어 내려했던 사회에서 벗어나는 걸 보고< 아뿔싸! 이게 아닌데!>, 마르크스는 아마 땅 속에서 한탄에 한탄을 했을 터.

<동물 농장>은 영리한 돼지들이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다운 권리>를 찾아 <동물 농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부패한 권력은  처음에 대중을 단결하도록 했던 이상을 왜곡시키고, 대중을 무력화시키며,  권력 유지를 위해 군사력을 강화 시켜 우매한 민중 위에 군림하게 됨을 알려준다.   

이 소설이 나올 즈음 스탈린 체제는 견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기에 <동물 농장>은 인민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던 스탈린 체제가 어떻게 그 권력을 남용하며 인민을 억압하게 될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몰아내고 비로서 동물로서의 권리를 획득하였다고 믿게 된 동물들이 보이는 행동 패턴과 심리적인 상태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북돋운다. 돼지, 말, 개 등 주변의 친숙한 동물들이 나오기에 우화처럼 읽히지만 그 속에 동물적인 속성이 곁들여진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기에 <동물 농장> 의 배역들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분단 국가의 한 쪽에 살고 있는 나는 김일성 체제 속의 인민들을 대입하게 되고, 더 나가서는 효율성을 쫒는 산업 시대에 인간이 배제되고 기계가 우위에 선 작금의 자본주의도 대입하여 보게 된다.

지배 계급이 된 돼지들이 하층 동물들과 자신들을 편가르기 하기 위한 장치를 스스럼없이 강요하고, 생산 없이도 소득을 얻는 일에 결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존재가 이 소설 속 돼지들 뿐인가, 그런 인간이 과연 경찰국가에만 존재하는가?  아니다. 생산없이도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세상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이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돼지들의 동물 농장을 방문하여 효율과 질서를 부러워하던 인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들에게도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다는 건 <동물 농장>을 방문한 몇 명의 인간만의 주장이 아니다.  자본의 힘으로 권력을 쥐는 인간들이라면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속으로는 다스려야 할 하층계급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못 배운 자, 가난한 자들은 지배층과는 전혀 다른 족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설 <동물 농장> 의 돼지들의 생각을 그대로 베껴내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에세이-나는 왜 쓰는가- 책에서 옮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외한다면, 나는 작가들이 글을 쓰게 되는 데는(산문 작가의 경우) 네 가지 큰 동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동기들은 작가에 따라 그 각각의 정도가 다르고, 동일 작가의 경우에도 그 가 사는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각개 동기의 비중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네가지 동기란 이런 것이다.

 

1)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 인류의 대다수는 그리 격렬할 정도로 이기적이는 않다. 대체로 나이 서른쯤을 넘기면 사람들은 개인적 야심을 버리고 대체로 남을 위해 살거나 일상적 일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에는 소수의 재능있는 인간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고집센 인간들이 있고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진지한 작가들은 대체로 저널리스트보다 더한 허영과 자기 중심주의를 갖고 있다. 돈에 대한 관심을 덜 할지 모르지만.

2)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말의 아름다움과 말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주는 영향으 인지하는 즐거움,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그래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을 공유해 보려는 욕망.

 3)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래도 보고 진실한 사실들을 발견하며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모아 두려는 욕망.

4)정치적 목적: <정치적>이란 용어는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보려는 욕망.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1936 년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 줄 한 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여졌다. 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다....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더 많이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가진 미학적 지적 성실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도 더 많이 갖게 된다.

 

지난 10 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불의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일차적 관심은 내 말에 귀 기울에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글 쓴다는 것이 동시에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면 나는 책을 쓰지 못하고 잡지에 실릴 글조차도 쓸 수가 없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동기의 밑바닥에는 어떤 미스터리 하나가 놓여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런 투병 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씌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귀는 어린 아기가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질를 때의 본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개성을 끊임없이 지워 없애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어떤 읽을 만한 책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도 같다.

... 

내가 쓴 책들을 회고컨대,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 형용사들 속으로 속아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194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