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2010년의 책읽기 12

자몽미소 2010. 4. 6. 21:15

 

 

 

 

  • 책을 읽고 내 생각

가난의 배고픔을 이야기해도 실지로 그게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나는 그 실상을 모른다. 집안의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못했다거나, 수학여행을 못 갔다는 식의 아쉬움 섞인 자조처럼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다는 말은 약간 슬프게는 들려도 그게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1960년대에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나는 배고픈 시절은 비껴간 세대이고, 그 몇 십 년 전의 사람들이 들으면 아연할 정도로, 몸을 위해 안 먹으려고 무지 애쓰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끔 서울에 가게 될 때, 지하철 통로 쪽이나 공원 벤취에서 신문지를 깔고 잠자리를 준비하는 사람을 본다. 그들을 바라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을까 까지 생각하고는, 그 사람이 몇 십 년 전 어느 집의 아들로 태어난 것 때문에 몹시도 자랑스러웠을 일을 떠올려 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본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본다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텔레비젼에서 보다가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을 뿐이다. 진짜로 이런 세상이 있구나, 여기는 동안 나는 그들을 지나치고 눈에 안 보이니 잊고 만다.

 

IMF 때 이런 사람들이 속출했고, 현재 진행되는 비정규직 문제가 이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 것이라는 진단에 대해서도 머리로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주위에서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삶을 힘들게 견디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가난한 누군가도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보니 나는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어째서 발생하게 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가난하게 되는 일은 몹시 두려운 일일 뿐더러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난해지는 것은 더더욱 꺼리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지난 달에 읽은 <마사 퀘스트>에서 마사의 부모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추상적이다. 나는 나보다 더 큰 집과 더 좋은 차를 가지고 있거나 물려 받은 유산이 있고 현재 돈을 벌고 있는 사람보다는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난의 진짜 얼굴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가난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를  나는 80년 전의 이야기에서 읽었다.

물론 이 시대의 우리 나라 소설에도 < 화수분>, <감자> 등에서 가난을 읽는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소설은 이미 내가 그 시대를 훨씬 벗어나 사는 바람에 소설로서만  읽고 말았다. 조지 오웰의 책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비슷한 시간의 기록이지만 현재를 읽고 있는 느낌이 났다. 이 책에서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과 <실직> 이라는 외부적 영향에 따라서 급속도로 빨리 가난의 대열에 끼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대열에 한번 합류되고 나서는 그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부랑자들>을 <쓰레기> 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한 번 부랑자는 영원히 부랑자가 되어 버리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 나라 서울에서 한 번 노숙자는 점점 더 노숙자의 세계로 빠져 들어 버리고 마는 것을 이 소설에서 보게 된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서야  조지 오웰의 글이라면 모두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쓴 순서와는 다르게 <동물 농장>을  먼저 읽었고, 그 다음 책으로 이 책을 읽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영국 북부의 탄광촌에 갔던 이야기였는데, 그 글을 읽고 나서야 <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D.H 로렌스와 조지 오웰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살았던 작가들이고, 두 사람의 글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에 대한 대비와 묘사가 있다. 그러나 로렌스의 소설에서는 뒷 배경으로 물러나 있던 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조지 오웰의 글에서는 선명히 앞으로 나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이 책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는 노동자 대열에서 쫓겨난 사람들, 실직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부랑자가 되어 살고 있는 런던의 밑바닥 인생을 다루면서 가난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때문에 그 시절을 살던 중산층 계급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을 보여준다. 게다가 글의 시간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 전세계로 그 여파를 몰고 오고 있는 때였다. 세계 모두가 가난의 굴레로 떨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꼭 모든 사람이 그 가난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조지 오웰은  파리에서 접시 닦이의 노동 현장 속에서 비수련 접시닦이 생활을 경험하면서 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도 없고, 노동의 댓가로서 자신의 삶을 바꾸지 못하는지를 파헤친다. 그들의 노동 조건이 가혹하고 노동의 댓가가 그들의 삶을 변화 시켜주지 못하는 것은  이들을 고용하는 집단의 이익을 언제라도 우선하기 때문이고, 이 집단의  사치도 아닌 사치를 위해  이들의 노동이 허무하게 소비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조지 오웰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가 속한 중산층 계급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부제하에 어떤 경험들의 선택과 배제가 있었을 것이고, 과장과 축소가 있었을 것이며 들은 이야기를 경험한 것처럼 꾸미는 허구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은 가난한 삶에 대한 것,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특히 주장하는 것은 우리들의 편견, 부랑자는 몹시 나쁜 인성을 가졌다거나 위험한 인물이라는 편견에 관해서이고, 제도가 이들의 삶을 더욱 더 불행하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 그래서 어쩌다가 부랑자가 된 사람은 게으르고 싶지 않아도 <강제된 게으름>의 상태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파리와 런던의 경험 후  조지 오웰은 각각의 분석을 따로 놓아 작가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설득해 놓았다. 그가 설득하려고 하는 집단은 물론 중산층 계급이다. 편견을 가진 제도와 부조리한 제도를  승인하고 부추기고 있는 중산층 계급에게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님을 역설하고자 한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보여주는 사람마다엔 무척이나 매력적인 데가 있다.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인간적인 풍모를 유지하는 이들에 대한 작가의 눈길은 진정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보인다. 이 글은 사회과학적인  분석이 끼어 있어 논리적인 글을 읽는 맛을 주면서도, 대개의  글은 정말 소설을 읽는 것처럼 독자가 그의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는 데 순조롭다.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번역도 무척이나 잘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원작자의 문체가 어땠을까를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지 오웰의 글맛이 이런 것이구나 싶게 번역글을 읽는 데 거슬리는 게 없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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