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오후, 비 오는 날(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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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내 생각
1.오늘날에도 여전한 주제
책을 읽고 있던 중에 부산의 실종 여성 사건을 뉴스로 보게 되었다. 죽은 여자의 가족들은 그 비참한 죽음이 돈이 얽힌 문제라고 주장했다. 며칠 후 경찰은 그 여자를 죽인 범인이 남편이며 그의 애인이 범행에 동조했다고 발표하였다. 여자는 해외로 피신하고 남자는 구속되었다.
죽은 사람은 안 됐고, 죽인 사람은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했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더구나 남편은 교수 직분 때문에 더욱더 동정의 가치조차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비참하고 우스운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일 생각을 하였으나 실패했고, 그의 실패는 비과학적인 원혼의 억울함이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결혼과 돈이 얽혀 들어가자 인간 관계는 더러워졌다가 결국 파멸하였다. 이 끔찍함의 원인을 돈에 눈먼 현대인의 추악함이라거나 현대 사회의 물질만능주의 탓으로 돌리고 방송은 이 뉴스를 일단 접었고, 새로운 사건을 보도했다.
스포츠 선수와 관련한 연애 사건이었다. 이번에도 여성이 죽었다.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사람은 자기가 왜 죽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도 그 처지에선 죽음 밖에 길이 없다는 판단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작은 몸짓에 불과하더라도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는 상대의 배반은 자기 죽음으로도 덮을 수 없는치욕과 모멸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죽음은 <고리오 영감>을 읽던 이번 주에 대서 특필되었다. 물질에 집착하고 욕망하는 인간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병폐라고 쉽게 말하고 말지만, 사랑하고 욕망하는 인간은이 책 속에도 여전했다.
2. 번역자에게 씨부렁 거리기
오노레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지금으로부터 150 여 년 전의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문제가 돈 문제이고 작중 인물들이 돈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 150년 전의 인간이나 현대의 인간이나 <돈 때문에 생기는 일>에 있어서는 대동 소이한 반응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여러 곳에서 무엇을 사는 데 얼마의 프랑이 필요하다는 게 나왔으므로 나는 그 돈 단위에 100을 곱해 보기도 하고 1000을 곱해 보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100을 곱했을 때의 액수에 수긍을 하다가 어떤 때는 1000을 곱해야 현대의 화폐 단위로도 맞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 시대의 화폐 프랑이 도대체 요즘 화폐로 치면 얼마나한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었는데 여러 곳을 검색해 봤지만 잘 알 수 없었다.
이런 부분은 번역자가 면밀하게 제공해 주어야 할 책 내용 이해를 위한 팁 같은 게 되었을텐데 아쉬웠다.
발자크의 소설은 이 책 외에 읽은 게 없었고, 책 말미에 번역자가 해설한 부분은 이 책의 인물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번역자의 논문이었던 발자크 연구를 인용한 것에 불과해 책을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돈이 있어야 사람 꼴을 하고 살 수 있다는 주요 인물 보트랭의 말마따나 현대 사회도 <돈 없으면 시체> 라는 건 어린 애들까지 뼛속까지 느끼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으센"은 법률가 지망생인 법학도였고, 그랬으니 어느 정도는 사회적 출세를 보장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어떤 여자를 잘 꼬셔서 상류사회에 입성하고 어떤 여자의 지참금으로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법률가란 직업이 사회적인 위치와 경제적 지위가 있는지는 기본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주인공 "으센"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번역자는 이 책의 주인공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 위치를 이해할만한 그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안내가 없었다.
물론 책 말미에 번역이 힘들었다고 고백하긴 했지만, 번역이 제대로 잘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을 아끼고 싶지는 않다. 고전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하던 발자크는 이 소설 때문에 그 당시의 문학가로부터 소설도 아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근대화적인 소설 기법을 적용하였다는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시도한 소설 속의 <프랑스어 비틀기> 같은 것은 원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글맛을 알 수 있겠지만, 외국인 독자는 순전히 번역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프랑스말이 글로 바뀌면서 일으키는 웃음을 한국인 독자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웃길려고 작정을 했는데 독자는 멀뚱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여러 군데 있었다. 민음사가 표방하는 <새로운 번역> 에 대한 책 광고가 무색해지는 책으로 이 소설을 다시 덧붙인다.
3. 지나치게 몰입하는 남자들, 그리고 현대판 고리오 영감
-지나친 부성애자, 그래서 본능충실자 고리오 영감
-부도덕한 사회의 편승자 라스티냐크 으센
-프랑스의 홍길동을 꿈꾸는 보트랭
이 중 나에게 가장 솔직하고 흥미로운 인물은 보트랭이지만, 작가는 이야기 도중 불사신의 체포를 구상하여 이 인물을 삭제해 버렸다. 물론 이 남자의 연설은 장황해서 작가가 보트랭을 통해 사회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으센에게 가장 애정을 쏟은 것 같다.
으센이 사교계의 여왕인 자작 부인을 이용해서 사교계에 입문하는 행위는, 현대 독자들로서는 왜 꼭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하나 싶은 나머지 이 새파랗게 어린 청년의 사고 방식에 도덕군자 같은 일침을 가하고 싶지만, 작가는 그 시대의 어떤 한 청년, 자기와 처지가 비슷했던 청년을 소설에 끌어옴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숭고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 연보를 보면 "발자크의 딸이라고 추정되는" 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자크 자신도 어떤 부인들과의 사랑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이고, 그랬으니 가난한 법률학도 라스티냐크 으센과 가난한 문학도인 자신은 동일시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결혼한 여자의 연애에 대해서 결코 낭만적 시선을 주지 않고 법률적으로도 받아들여줄 수 없으니, <고리오 영감>의 자매들과 귀족 부인들의 프랑스식 연애는 의아하다. 그것이 당시의 귀족과 브르조아 사회의 일반적 현상인지, 그래서 소설 속 남자들처럼 자기 부인의 연애르 모른척 해야 신사였던 것인지, 그러므로 부부간 서로 다른 상대를 찾아가도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로서는 부도덕의 딱지를 붙일 연애를 발자크가 비난을 하려 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사랑에 집착하고, 또 자신의 출세욕구를 사랑으로 포장하려는 주인공 으센을 나는 작가만큼 관용하거나 아껴줄 수 없었다.으젠의 여자들에 대한 헌신의 몸짓과 언어에 내가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인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가. 으젠은 이 소설이 참으로 구시대의 소설이구나 여기게 했던 인물이었다.
오히려 그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보트랭이다. 그의 냉소 속에는 비열한 사회를 꼬집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하면 그 사회에서 출세를 하는지 선생의 위치에서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권력이 숨어 있다. 경찰의 요주의 인물인 그는 결국 잡혀가지만 그가 남긴 장황한 설교는 지독히 현실적이어서 오늘날까지 유효한 듯하다. 외면하고 싶으나 인간이라면 언제나 가지고 있는 속물성을 제대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악으로서 악을 없애려고 하는 욕망의 인물이다. 나는 그에게서 의적이라고 자칭하던 홍길동을 본다. 우리나라에선 소설로서 홍길동이 태어나던 때에, 프랑스에선 혁명과 귀족정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의리의 권력을 행하고 싶었던 인물이 발자크 소설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부성애자, 이 소설의 주인공 고리오 영감.
이 소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을 때는 고리오 영감이 수전노 영감인가 싶었다. 그러나 곧 그의 궁핍이 부유한 딸들 때문임이 드러났다. 독자로서는 안타까움에 안타까움을 더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소설 말미,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의 오락가락하는 그의 정신 상태에 가서야 독자는 그가 오랫동안 진실을 외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모습만 믿었다. 그는 죽은 아내 대신에 딸에게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바쳤다. 사랑을 위해 엎드린 자의 비참함은, 그가 딸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더 비참해졌다. 딸을 훈육할 수 없었던 낮은 아버지, 그래서 모든 불행을 만든 장본인인 아버지가 고리오 영감이었다.
그런데 현대판 고리오 영감은 막 산업 시대를 벗어나 자본주의 시대가 무르익어 가면서 돈이야말로 가장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때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 기러기 아빠>라고 불리워지는 남자들이다. 그 속에도 여러 등급이 있겠지만 딸에게 집착하는 아빠들, 폭을 넓혀 자식들에게 집착하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자기 딸과 아들을 공주와 왕자로 키우려는 그 부모들이 바로 고리오 영감의 후예들이란 생각을 해 봤다.
(2011년 5월 26일, 영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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