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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농담- 2011년의 책읽기 23

자몽미소 2011. 5. 31. 23:30

 

35718

 


농담(세계문학전집 29)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1999-06-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펴냈던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
가격비교

 

 

  • 책을 읽고 내 생각
  •  

     

    <불멸>을 읽었을 때처럼, 책을 덮으며 물밀듯이 닥친 감상을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농담이 통하지 않던 시대, 너무 진지한 나머지 우스꽝스럽게 되어 버렸지만, 결코 웃어 넘길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의 실수에 관한 글이다. 라고  문장을  만들어봤지만 이렇게 해선 이 책에 담긴 아무 것도 말한 게 아니다.

     

     

     주인공 루드빅이 고향 마을에 무언가 기획한 일을 하려 찾아오는 것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되지만, 도입부를 지나자 이 남자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기억은 15년 전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적, 보다 더 어렸던 주인공,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빴던 과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루드빅이 도모하는 이번 고향 방문에서의 그 일은 그가 오랫동안 증오를 해 왔던 사람에 대한 복수였기에 그는 주도면밀하게 이 일을 해 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관통하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모순이기도 한 우연과 운명이 이번에도 그의 주위를 맴돈다. 이야기는 루드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화자는 루드빅이 그의 고향 마을에서 만나려고 하는 여자, 헬레나와 그의 오래된 친구 야로슬라브, 코스트카를 오가며 루드빅의 지난 15년을 가끔은 아프게 또 어쩌면 슬프게, 어쩌다는 우스운 모습으로 비춘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 그의 복수는 가능했던가, 그가 한 일이 복수였는가.

     

     

    소련에 의해 침탈된 나라 체코, 그 속에서 미래의 가치를 찾으려던 열정이 그 배경이지만, 이 소설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와 더불어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 인간이 역사를 조종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역사가 스스로의 이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그의 소설 <불멸>의 주인공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사람들이었다면, 이 소설 <농담>의 주인공들은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의 나이와 비슷하다. 작가가 1929년 생이고 이 소설이 쓰여진 1965년은 작가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서른 여섯은 스무 살 보다 많지만 내가 훨씬 이전에 지나온 나이라는 점에서 나는 내 나이를 의식하면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나 보다 어린 영혼들이었고, 그래서 나 만큼이나 불완전하게 모순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젊은 밀란 쿤데라와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작가의 젊은 주인공은 지난 주  여행 중에 느닷없이 침범당해 위축되었던 마음을 다시 불러와  책을 받치고 있는 독서대처럼 내 앞에 꼿꼿이 세워놓았다.

    지난 주 계획 없는 자리에서 원하지 않던 사람(내가 고르지 않은 사람들)과의 조우를 하고 난 후,  나는 단단히 자존심이 상해 버렸고, 그 바람에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라고 한 주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복하리라 결심하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내가 과거 만이 아니라 지금도 어떤 실수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를 거듭 질문하고 있었다.

    <농담>을 읽으며 한 인간의 운명이 어떤 실수와 관련되었고, 또 어떤 상황과 연관되며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란 결코 위대한 무엇이 아닌데도 핍박은 너무나 크다는 것에서 나는 나의 실수와 내 상황과 내가 겪은 것이 피해인가 내가 모르는 다행인가를 따지고 있었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초라한 내 내면은 억울함의 울먹임을 더듬고 따졌으며, 주인공이 시도하던 복수를 나도 꿈꿨다는 것을 떠올렸다. 결국 나는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고 할 능력도 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복수에서 패배했고, 어떤 복수도 성공은 없다는 점을 내가 안다는 점에서,  내가 꿈꾸었던 복수에는 부끄러움을, 시도하지 않은 복수에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주인공 루드빅이 세월과 화해를 함으로써 내 가슴은 다시 데워졌고, 침울하던 5월 마지막 날,  그것은 자기 삶을 용서하는 사람만이 짧은 인생에서 가장 덜 실수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족1 : 루드빅의 고향 친구, 야로슬라브가 <왕들의 기마행렬> 에 대한 애정과 헌신, 그가 모라비아 민속 음악에 대하여 분석한 글 (190쪽)은 결국 밀란쿤데라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놀랍다.  항상, 그의  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안목이. 

     

    사족 2: 나는 이 책을 우리 책 부족민들에게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이럴 경우 동우님은 반갑기도 하지만 사양하는 손짓을 하실 것 같다).

    동우님에게는 <집단의 신념>에 관한 강한 거부가 있는데 이 책은 동우님이 그 동안 내놓지 못했던 느낌을 공유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민정은 <불멸>을 읽기 힘들어 했는데, 그건 오직 독자의 나이에 상관 될 것이라 여긴다. 밀란 쿤테라를 못 읽겠다고 미리 짐작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이 소설을 읽는다면 조지 오웰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작가의 글쓰기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조지 오웰이 산업사회로 접어든 환경, 자본의 무한증식이 불러 일으키는  인간의 소외를  가장 밑바닥의 위치에서 낱낱이 보고자 하였다면, 밀란 쿤데라는 역사라고 하는 거대 물결, 인간 개인은 어쩌지 못했던 그 물결 속에서 휩쓸린 인생의 내면을 보고자 하였다. 각 개인의 고유성을 그는 우정, 사랑, 남녀의 소통, 운명의 틀로 보려 했고, 사실은 어떤 한 개인의 사상이 거대 집단 보다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즉 그는 유럽을 휩쓴 운명이라는 것, 전쟁과 역사라는 거대 담론을 직접 말하지는 않으면서도 그것보다 더 진지한 것이 인간 개인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지 못한 상태이지만), 거대 담론을 피하면서 거대 담론을 일깨우는 소설쓰기는 독자에 대한 굉장한 배려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나면 독자는 결국 그가  거론하기 꺼려한 듯한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하게 하니까. 

     

     

    • 책 속의 밑줄 긋기

       

      p45

       

      어떤 여정을 거쳐 내가 내 인생 최초의 난파에 이르렀는지, 그 이야기를 가벼운 어조로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재미있게까지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나는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고, 마르케타는 농담을 절대 이해 못하는 치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케타는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자였고(그런 면에서 그 시대의 정신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잘 믿어버리는 능력을 갓난아기 때 벌써 최고의 장점으로 요정에게서 선사받은 그런 여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

       

      확실히 유머와 마르케타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고, 시대 정신과는 더 그랬다. 그때는 <48년 2월> 이후 첫 해였다. 새로운 삶,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 있었고, 내 기억 속에 박힌 그 새로운 삶의 모습은 경직되고 심각한 것이었는데, 그 심각함이란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고 오히려 미소 띤 겉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 그 시절은 그 어떤 때보다도 기쁨이 넘치는 때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즉시 노동 계급의 승리를 애통해하는 자라거나 또는 개인주의자로서 자신의 내밀함 슬픔에 빠져 버리는 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 시절에 나는 내밀한 슬픔 같은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장난기가 상당했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즐거움에 비추어서는 제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 농담들은 너무 진지한 데가 없었는데, 당시의 기쁨은 해학이나 아이러니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쁨은, 다시 말하지만 <승리에 찬 계급의 역사적 낙관주의> 라고 자랑스럽게 지칭되는 기쁨,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 한마디로 환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p 48

       내 행동과 미소가 지식인 냄새를 풍긴다고 동료들이 판단을 내렸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고 혁명 자체가, 시대 정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나 하나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말을 믿게 되었다. 나는 미소 지을 때 조금 조심하기 시작했고, 뒤어어 곧 내 안에서(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나는 정말 누구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아주 정직하게 대답하고 싶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

      나는 위선자들처럼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p 70

       

       지금 그때의 내 상황을 생각해 보면 신도들에게 근원적이고도 영원한 죄인임을 상기시키는 기독교의 저 막강한 힘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 혁명과 당 앞에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래서 장난으로 썼다 해서 내 엽서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되었으며, 머릿 속에서 자아 비판의 검토가 시작되었다.

       

      p113

       그러니까 내 기억 속에서 자꾸만 그 강당, 백 명이 손을 들어 내 삶의 파탄을 결정했던 그 강당이 떠오르곤 했던 것이다. 그 백 명의 사람들은 언젠가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나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라고 계산 했던 것이다. 쓰디쓴 풀을 자꾸 다시 씹어 보는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라 머릿 속 생각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집요한 법이어서, 나는 여러 번 내 사건의 변형판을 만들어,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이 제안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그랬다고 해도 모두 손을 들었으리라는 결론이 나올 뿐 다른 결론에 이르러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 232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의 등장 인물로서 사랑한다. 햄릿에게 엘시노어 성, 오필리아, 구체적 상황들의 전개, 자기 역할의 <텍스트>가 없다면 그는 대체 무엇이겠는가?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고 환상 같은 본질 외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아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헤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일들을 이해 했으며, 세월이 가면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거의 두려워졌다. 루치에가 더 이상 루치에가 아닐 장소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며, 이때 나는 끊긴 실을 다시 이을 방도를 찾지 못하리르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p275

      그들은 쩨쩨하고 치사한 사람들이 아니죠. 내 엽서를 읽었다면 아마 웃었을 겁니다!

      -

      그런 우발적인 답변을 해버림으로써 나는 단번에 그들의 사고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떨어져 나왔고, 수많은 회합, 수많은 징계 절차,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열렬히 비난함으로서(그렇게 해서 자신의 죄를 묻는 자들과 스스로를 동질화함으로써) 동정을 구해 보려 하는 피고의 역할을 하기를 거부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제마넥이 그 침묵을 깼다. 그는 나의 그 반당(反黨)적인 문구에서 웃음을 유발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가 없다고 혼자말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푸칙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위기 상황에서는 우회적 태도나 회의주의 같은 것은 반드시 배신으로 변하게 되어 있으며, 당은 내부에 배신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성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당과 대학에서 나를 추출할 것을 제안했다.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손을 들었고, 제마넥은 내게 당원증을 반납하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p372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그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관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 번 증오해 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나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오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이제 제마넥은 언제든 변했음을 선언할 수 있고, 내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화해한다면 나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깨져 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내 내면의 저울의 한쪽이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이런 고통을 초래한 악의 화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p379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를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p391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이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 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그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가 자기 고유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398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사물,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 또는 용서에 의해)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

       

      p 426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 그러나 정말 제대로 사랑하지는 못한 루치에, 네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나에게 와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인가? 유린된 세계에 대한 연민을 청원하러 온 것인가?

       

       

       

       

     

     

     


     

    한국문화예술 국제위원회에서 복사해 옴

    http://ciacc55.com/index_k.html

     

     

    제 목
       체코의 역사
    작성자
       최영주
    조회 : 272
    작성일 : 2004/06/04 14:08

    체코의 역사와 문화


    1. 국가의 성립


    체코인은 6세기 무렵 켈트족을 정복한 게르만족이 민족 대이동으로 남하하면서 정착을 시작하였다. 지금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는 체코인이 그리고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슬로바키아인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9세기 초에 모라비아 제국으로 통일되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한편 모라비아 제국의 왕 로스티슬라프는 비잔틴에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키릴과 메토디우스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그리스 정교로의 선교는 이루지 못했지만 최초의 슬라브 문자인 키릴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9세기 말 들어 대모라비아 제국은 마자르인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 때 체코인은 프르제미슬 왕조 아래 통합되어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였고, 슬로바키아인은 헝가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은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으로 통일될 때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다른 운명을 걷게 된다.

    건국 후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군주제를 확립시켰고, 1204년에는 로마 황제로부터 왕국의 독립을 인정받았다. 13세기 들어 체코는 오스트리아 공국을 찬탈하기도 하였고, 헝가리에도 침략하여 영토를 확대하며 국가 기반을 다져 나갔다. 1306년 바츨라프 3세를 끝으로 프르제미슬 왕조가 끝나고 왕위는 1310년 룩셈부르크 왕조의 존 왕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혼인을 통하여 보헤미아의 왕위를 획득하였고 체코를 독일 제국에 합류시켰다.


    2. 체코의 번성과 후스파 운동

    존 왕의 아들 카를 4세(Karl IV)는 1346년에 독일 제국뿐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 때부터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답게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크게 번성하였다. 1348년에는 프라하에 카렐 대학이 세워졌고, 프라하는 대주교의 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화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훗날 체코인과 독일인의 민족적 대립으로 이어진다.

    1415년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로마 교회의 권위에 반대했던 카렐 대학의 학장이며 종교 개혁자였던 얀 후스(Jan Hus)가 화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민족적인 후스파 교도들을 자극하였고, 이로부터 약 15년 동안 후스파는 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종교 전쟁의 양상을 띠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체코의 지배 세력이었던 독일인에 대한 민족 운동이었으며, 농노제를 강화하면서 특권 계급화된 귀족들에 대한 반(反)봉건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이후 후스파는 신성 로마 제국과 화친 조약을 맺어 후스주의를 인정받았고, 체코 민족 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3.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15세기 들어 오스만 투르크가 침략하여 헝가리 동쪽까지 점령해 오자 주변 강국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하였고, 체코와 헝가리는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체코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으로서 비운의 역사를 보냈다.

    합스부르크가가 체코를 지배하게 되자 그들은 중앙 집권적인 카톨릭 정책을 펴나갔다. 이에 체코의 신교파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체코의 신분제 의회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로부터 분리할 것을 의결하는 동시에 신교파인 프리드리히 5세를 체코 왕으로 선출하였다. 그러자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황제는 카톨릭 연합군을 이끌고 체코의 신교파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양측은 30년 동안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전쟁에 신교와 구교 세력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체코는 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도 감소했으며 체코어 대신 독일어가 강요되어 체코의 민족 문화와 경제가 파괴되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4. 민족주의의 대두

    19세기에 유럽 전역에 유행한 계몽주의 사상과 낭만주의 운동은 체코의 지식인들을 자극하여 민족 의식의 고양에 힘쓰게 했다. 특히 1848년 2월 프랑스 혁명과 3월의 빈 혁명을 계기로 체코에서도 체코 왕국의 통합과 체코어의 부활, 그리고 자유를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독일인과 체코인의 민족 대립을 더욱 악화시켰고 황제권이 더욱 강화되면서 체코의 민족주의 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한편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되면서 체코는 다시 이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산업 혁명 발전기에 접어들어 공업이 발전하게 되었고, 1867년에는 최초로 은행이 설립되어 체코의 국내 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5. 1차 세계 대전과 체코슬로바키아

    1914년, 남슬라브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고 체코는 마침내 슬로바키아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연방을 이루어 독립하였다. 독립 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고, 공업 수준도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함에 따라 비교적 안정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헝가리, 폴란드와의 영토 문제와 슬로바키아인과의 대립, 그리고 소수 민족 문제는 1930년대에 대두된 파시즘에 가세되어 다시 국가를 해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공통된 정서적 이유로 연방을 구성한 슬로바키아와는 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차이와 체코 중심의 중앙 집권 정책으로 고조된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으로 심하게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세계 공황의 여파로 경제마저 파탄하게 되고,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 지방이 독일에 할양되는 등 체코슬로바키아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1939년에 히틀러의 침공을 받고 점령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네시 대통령은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동맹 조약을 맺는다.


    6. 공산화와 `프라하의 봄"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다시 독립하게 되고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 연정이 구성되어 전후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이어 1946년 전후 최초의 총선으로 고트발트가 이끄는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였고, 대외 경제 관계 회복을 위해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한편, 1947년 미국의 유럽 경제 부흥안인 마셜 플랜이 발표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를 경제 발전의 기회로 보고 수용하려 했으나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194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베네시에 이어 고트발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농업을 집단화하고, COMECON(동유럽 경제 상호 원조 회의) 가입과 급속한 중공업화 정책을 펴 사회주의 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을 받은 스탈린식 숙청이 전국적으로 단행되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국명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칭하였는데 폴란드나 헝가리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을 계기로 반(反)스탈린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것과는 관계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가 계속 득세해 나간다.


    그러나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도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경직되고 교조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자유화 운동으로, 두브체크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파장이 다른 위성 국가에 파급될 것을 두려워한 소련이 8월 바르샤바 조약군을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침공하여 저지시켰다.


    이후 당 제1서기에 취임한 후사크는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개혁파들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계속되어 1977년 1월에는 극작가였던 하벨을 중심으로 한 반체제 인사들이 인권 억압에 저항하여 `77헌장"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1985년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함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개혁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마침내 1989년 10월, 민주 세력인 `시민 포럼"이 주도하여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벨벳 혁명이라 불리울 만큼 별다른 충돌 없이 공산 정권이 퇴진함으로써, 두브체크가 연방 의회 의장에,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혁명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1990년 6월 실시된 자유 총선에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시민 포럼"이 승리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장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 정부를 출범시켰다.

    한편 1993년 1월 1일부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74년 동안의 동맹을 끝내고 분리, 독립하였다. 독립 후 체코는 다른 동구권 국가에 비해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면서 착실한 성장을 해 나가고 있다.


    II. 자연 환경


    1. 개관

    체코는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보헤미아의 단층 지괴는 카르파티아 산맥보다 훨씬 오래 전에 형성되었다. 체코의 최고봉은 스네슈카(Sn区协ka)로 해발 1602m에 이른다. 보헤미아 북부의 숲은 화력 발전용 저질 갈탄의 사용으로 생성된 산성비로 황폐화되었고, 이 때문에 동부 오레(Ore) 산맥의 대부분은 민둥산이 되어 있을 정도이다. 자이언트 산맥의 침엽 수림은 폴란드 실레지아 지방으로부터 날아온 오염 물질로 고사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오염 문제는 현재 체코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체코는 내륙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나 지류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유럽의 지붕으로 불려 왔다.

    2. 기후

    체코의 기후는 온화한 편으로 덥지 않은 여름과 습한 겨울, 그리고 맑고 청명한 봄, 가을을 볼 수 있다. 프라하의 경우 5~9월까지의 하루 평균 기온은 14℃, 4월과 5월은 8℃ 이상, 그리고 12월과 1월은 영하의 기온을 보인다. 특히 겨울에는 어디서나 짙은 안개나 스모그 현상을 볼 수 있다.


    III. 정치

    1. 정치 형태

    체코는 1992년 12월 16일 채택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국가 수반으로 상원·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와 최고 국가 기관인 수상이 이끄는 내각, 그리고 최고 사법 기관인 대법원으로 이루어진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으며 상원·하원 합동 회의에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과 수상을 비롯한 정부 각료의 임명 및 해임권 등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대통령은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인데 극작가 출신인 그는 1989년 공산 정권 붕괴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1990년 최초의 자유 총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벨은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체코의 초대 대통령에 연임되는 등 체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입법권은 상·하 양원에 부여된다. 하원은 2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6년 임기의 상원은 8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그 가운데 3분의 1은 2년마다 선출된다. 법률 제정권, 대통령 선출권과 예산 심의권, 조약 비준권 등을 갖는다.

    내각은 국가 최고 행정 기관으로서 수상과 각료는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내각은 하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수상은 시민 민주당(CDP) 출신인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이고, 3명의 부수상과 14개의 부처로 구성되어 있다.

    사법부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두고 독립되어 있으며 대법원, 고등 법원, 지방 법원, 군법원의 4단계 사법 체제와 15명으로 구성된 헌법 재판소를 두고 있다.

    지방 행정 조직으로는 행정 구역상 70개의 군(Okresy)과, 프라하 및 브르노 2개의 특별시와 12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동·서·남·북·중부 보헤미아 지역과 남·북 모라비아 등의 7개 지역(Kraj)으로 나누어지고, 그 밑에 오크레시(Okresy)라는 하부 지역으로 구성되는 등 명확한 행정 구역 책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정당 현황

    현재 체코에는 15개의 정당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11개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해 있다. 현재 제1당인 시민 민주당(CDP)은 1991년, `시민 포럼" 내의 급진 개혁파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급속한 개혁 추진, EU(유럽 연합) 가입, 의회 민주주의 확립 등을 정강으로 채택하고 있고, 당수는 바츨라프 클라우스 현 수상이 맡고 있다. 그 밖에 기독 민주 연합­체코슬로바키아 인민당(CDU­CPP), 기독 민주당(Chr. DP), 시민 민주 동맹(CDA) 등이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3. 외교

    체코의 대외 정책의 기조는 주변국과의 결속을 다지면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를 확립시켜 궁극적으로는 서구에 편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91년 12월에 이미 EU의 준회원 자격을 획득하였고, CSCE(유럽 안보 협력 회의)와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와의 연계도 강화하고 있다. 1993년 연방 분리 후 슬로바키아와는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슬로바키아는 인정) 독자 화폐를 도입하는 등 독립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한편, 관세 동맹을 체결하여 상품 및 용역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4. 우리 나라와의 관계

    우리 나라와는 1990년 3월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92년 하벨 대통령이 공식 방한하였고, 1995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방문하여 정상 회담을 가졌다. 현재 양국간에는 1993년 연방 해체 후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무역 및 경제 협력 협정을 비롯하여 항공 협정, 투자 보장 협정, 이중 과세 방지 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다.



    IV. 경제

    체코는 동유럽 국가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으로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급속한 사유화, 가격과 통화의 안정, 새로운 은행 제도의 도입과 1994년 기준 3.5%의 낮은 실업률 유지 등 체코의 적극적인 경제 개혁은 체코 국민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어 많은 해외 투자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실제로 1995년 10월 대한 무역 투자 진흥 공사의 조사에서는 해외 투자에 나선 국내 기업들에게 체코가 종합 투자 만족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개혁 이후 체코의 1991년 GDP(국내 총생산)가 14. 2% 감소하는 등 불안한 출발을 보였지만, 1994년 들어 3%대의 성장률을 보이며 반전됐고, 특히 사유화 부문에서는 80% 이상이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등 체코는 본격 성장 국면을 맞고 있다. 그러나 1993년 연방 해체에 따른 경제력의 분산과 낮은 생산성, 기초 산업 부진, 불안정한 금융 시장 문제 등은 심각한 환경 오염과 함께 체코 정부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체코의 최대 공업 지역은 북모라비아 지방의 오스트라바(Ostrava)로 석탄, 화학 제품, 철강, 자동차 산업 등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자동차 생산 업체인 스코다(Skoda)사는 연간 20만 대의 자동차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독일 폭스바겐(Volkswagen)사와의 제휴로 품질을 높여 가고 있다.

    체코의 주요 교역국은 독일,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순으로 이들 국가가 전체 수출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철강은 총수출량의 11% 이상을 차지하는 체코 최대의 수출 품목이다.

    우리 나라는 KOTRA(대한 무역 진흥 공사)를 비롯하여 삼성, 현대, 대우, 한라 그룹 등이 진출해 있고, 교역 규모는 1993년 기준, 수출 약 5600만 달러, 수입 2600만 달러 수준으로 자동차, 전자 제품, 기계류 등을 수출하고, 철강, 유리 제품, 화학 제품 등을 주로 수입하고 있다.
    체코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993년 기준 2730달러, 월평균 급여는 200달러 수준이고, 연간 10%의 인플레율을 보이고 있다. 체코는 현재 IMF(국제 통화 기금), EBRD 등의 경제 기구에 가입되어 있으며 EU 준회원국 지위를 갖고 있다.


    V. 문화와 생활상


    1. 인구와 종교

    체코의 민족은 체코인 94%, 슬로바키아인 4%로 이루어져 있고, 소수의 폴란드인이 오스트라바 국경 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약 300만 명의 독일인이 보헤미아에서 퇴거되어 현재는 약 6만 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1993년 현재 1033만 4013명이고, 수도인 프라하에 150만 명, 브르노에 39만 명, 오스트라바에 33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의 약 43%인 440만 명이 카톨릭 신자이고 그 밖에 정교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등이 있다. 또한 체코 총인구의 30%정도는 무신론자로 알려져 있다.

    2. 예술과 예술인

    체코 문화는 독특하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프라하의 카렐 대학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348년에 설립되었다. 카렐 대학 설립을 계기로 당시의 프라하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후스에 의해 다수의 문학 작품이 체코어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또한 건축가인 페트르 파를레르시(Petr Parl r)는 프라하의 명물인 성(聖)비투스 성당과 카를루프(Karl赫v) 다리를 설계하였다. 17세기 초반에 체코 지역은 30년 전쟁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약 150년 동안 체코어로 된 성경의 구독이 금지되어 다수의 신교도들이 체코를 떠나야 했다. 교육 개혁자인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Jan 椽os Comenius:1592~1670)도 강제로 모라비아로 내몰렸다. 추방중에 그는 일련의 교과서들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이 거의 2세기 동안이나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그의 The Visible world in pictures는 오늘날의 삽화가 삽입된 교과서의 선구가 되었다.

    19세기 초의 국가 부흥기에는 체코어가 문화의 매개물로 재등장했다. 19세기 후반의 체코 낭만주의는 이라섹(Alois Jir ek:1851~1930)의 역사 소설로 대표된다. 그는 작품의 소재로 체코의 역사를 주로 이용하는데 그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어둠 Temno』은 국가 쇠멸기의 체코를 다루고 있다. 한편, 극작가인 차페크(Karel 匘apek:1890~1938)는 `로봇(robot)" 이란 말을 국제적인 언어로 탄생시켰는데, 인간성을 노예화시켜 버린 사람 같은 기계가 등장하는 1920년의 연극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카프카(Franz Kafka:1883∼1924)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흐라발(Bohumil Hraval:1914∼ )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인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29∼ ) 그리고 현 대통령이자 극작가인 하벨 등이 체코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3. 음악과 음악인

    17세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점령하에 있을 때 독일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다. 체코의 문화는 민속 음악으로부터 회생하기 시작한다. 보헤미아의 걸출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인 젤렌카(Jan Di午ma午 Zelenka:1679~1745)는 빈, 베니스, 드레스덴 등지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동시대인인 바흐에 의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에 와서야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체코 최고의 작곡가인 스메타나(Bed升ich Smetana:1824~1884)와 드보르작(Antonin Dvo升 :1841~1904)의 작품에는 체코인 특유의 향수와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의 민족 음악을 진정한 예술 음악으로 발전시켰다.

    스메타나는 낭만주의 음악가이지만 그의 음악의 목적은 조국과 모국어였다. 그는 대표적 작품인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 Vlast)"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기상을 표현했고, 대표적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는 체코어로 작곡된 국민 오페라라는 점에서 체코 국민 음악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드보르작 또한 `슬라브 무곡"에서 보여지듯 작품 전반에 걸쳐 체코 민속 음악의 요소를 도입하여 체코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그 밖에 야나첵(Leo午 Jan cek:1854~1928)은 드보르작의 민속 음악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면서 체코어의 억양(활용)을 가진 민요의 멜로디와 음계를 조합한 체코 고유의 양식을 창작하였다. 그의 크리스마스 미사는 크리스마스 때 체코의 교회에서 자주 불리고 있다.


    4. 문화 행사

    1946년부터 시작된 프라하 국제 음악제가 5월 중순께 개최되고, 6월에는 콜린(Kol )에서 금관 연주회가, 8월에는 쇼팽 음악제가 마리안스케 라즈네(Mari sk L n 에서 개최된다. 9월에는 추계 드보르작 음악제가, 10월에는 프라하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 프라하에서 열린다. 브르노에서도 10월에 음악제를 개최한다.

    6월 말께 브르노와 브라티슬라바의 `스트라즈니체(Str znice) 민속제"에서 모라비아의 전통 민속 공예를 볼 수 있고, 8월 중순에는 플젠(Plze千) 남부 도시인 도마즐리체(Doma协lice)에서 호드 페스티벌(Chod Festival)이 열려 서부와 남부 보헤미아의 민속춤과 전통 음악을 접할 수 있다. 또한 `브르노 국제 무역 박람회"가 매년 개최되고 농업 관련 전시회도 8월이나 9월에 체스케 부데요비체(匘esk Bud区jovice)에서 개최된다.


    5. 일과 시간과 공휴일

    주중에 상점들은 오전 8시 30분~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식료품점과 빵가게는 조금 일찍 문을 연다. 많은 작은 상점들은 점심 시간에 문을 닫는데, 어떤 곳은 오후 3시나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열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토요일 오전까지만 영업을 하고 일요일은 쉰다. 그러나 호텔의 레스토랑은 주말에도 영업을 한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에 휴관한다. 그리고 유적지나 성, 공원 등은 11~3월까지는 입장할 수 없고 4월과 10월에는 주말에만 입장할 수 있다. 그래서 체코를 여행할 때는 개관 여부를 미리 알아보아야 한다. 주요 도시의 박물관들은 연중 개관한다. 또한 학생은 50%의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교회는 예배 시간 이외에는 닫혀 있는 곳이 많다.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신정(1월 1일), 부활절(3월 4일), 노동절(5월 1일), 나치로부터의 해방일(5월 8일), 키릴과 메토디우스 기념일(7월 5일), 얀 후스 기념일(7월 6일), 공화국 선포 기념일(10월 28일), 크리스마스(12월 24일~25일), 성 스테판의 날(12월 26일) 등으로 공화국 선포 기념일은 1918년 10월 28일, 체코가 슬로바키아와 연방을 이루어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신정 전날(12월 31일) 저녁은 대부분의 레스토랑과 바는 파티를 위해 대여되거나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6. 물가 수준

    통화 단위는 코루나(K匸)이며 1코루나는 100할레루스(hal r奕)이다. 1993년 2월 8일부터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화폐가 분리되었다. 같은 해 9월까지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행된 구지폐는 모두 회수되었고 체코 내에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폐에 `코룬 체코슬로벤스키흐(Korun 匘eskoslo-vensk ch)"라고 쓰여 있는 것은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코룬 체스키흐(Korun 匘esk ch:약어 K匸)"라고 쓰여져 있나를 확인해야 한다. 동전도 1993년 11월부터 통용이 금지되고 새로운 동전이 발행되었다. 동전은 화장실과 교통 요금을 내기 위해 반드시 휴대하는 것이 좋다.

    환율은 1995년 말 기준, 달러당 29K匸. 우리 돈으로 1코루나당 약 28원 정도이다. 체코는 비교적 안정된 인플레율을 보이므로 변동 폭은 그리 크지 않다. 거리 곳곳에 있는 환전소에서는 환전 수수료를 10% 이상이나 터무니없이 받는다. 그러나 호텔의 환전소는 5%, 국영 여행사인 체도크(匘edok) 지사에서는 3%, 그리고 은행에서는 2%의 수수료만 받는다.

    체코는 이중 가격 체계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외국인은 시가의 두 배를 지불해야 한다 . 특히 극장표의 경우는 암표상이나 여행사 등이 매점하여 실제 가격의 몇 배로 되팔기도 한다.

    체코의 음식, 교통비, 입장료 등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숙박비는 동유럽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여름철인 경우에는 방을 구하기도 힘들어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보통 1인실은 350K匸, 2인실은 650K匸부터 있다.

    체코에서는 유료 공중 화장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우리 돈으로 70원 정도면 사용할 수 있다. 팁은 그리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보통 10K匸 정도면 적절하다. 체코에서는 도자기, 보헤미아산 수정, 가넷, 장신구, 가죽 제품, 자수품 등이 살 만하다. 특히 준보석인 가넷은 수세기 동안 보헤미아의 특산품으로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것이 사고를 막아 준다고 하여 여행시에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부분의 상점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쇼핑을 할 때는 매장에 비치되어 있는 바구니나 운반차(cart)를 이용하여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쇼핑을 하기 전에 유의할 점은 50달러 이상의 물품을 구입하면 최고 300%까지 수출세가 부과된다는 점이다. 보통 기념품은 면세되지만 세관원들은 특히 골동품이나 값어치가 나갈 만한 공예품 등을 세심하게 살펴본다.

    7. 스포츠와 레저

    체코에서는 아이스하키가 국민 스포츠로 가장 많이 사랑받고, 다음 축구와 테니스를 즐겨 한다. 유명 스포츠 클럽으로 아이스하키 클럽 중에는 프라하 클럽인 `스파르타(Sparta)"와 우리 나라의 상무격인 `두클라(Dukla)" 클럽, 그리고 실업팀인 `폴디(Poldi)" 등이 있고, 축구팀으로는 프라하에 `스파르타"와 `보헤미안스(Bohemians)" 등이 있다. 겨울에는 크로스 컨트리 스키도 널리 행해진다.

    체코인들은 온천을 좋아하는데 특히 보헤미아 서부 지방에 양질의 광천이 다수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헝가리와는 달리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고, 대부분 치료를 목적으로 환자들에게 예약을 받는다. 비용은 하루에 최저 45달러이고 성수기인 여름에는 100달러까지 오른다.

    8. 언론 매체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전국망을 가진 라디오 프라하, 라디오 블타바, 그리고 외국인을 위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방송되는 인터프로그램(Interprogramme) 등이 있다. 1993년 현재 44개의 사설 방송국이 지역 방송국으로 허가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37개 채널이 방송중이다.

    프라하에는 14개의 방송국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국으로는 프라하, 브르노 그리고 오스트라바에 텔레비전 스튜디오가 있고 150여 개의 케이블 텔레비전이 전국 방송을 하고 있다. 주요 방송국으로 체코 TV(匘esk televize)가 1992년 설립되어 2개 채널을 방송하고 있고, 상업 방송으로 1994년 설립된 Nova Television이 있다.

    격주로 발행되는 영자지 『프로그노시스Prognosis』가 1991년 3월에 창간되어 수준 높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Vistors Guide"라는 8면짜리 섹션을 두어 여행자를 위한 각종 정보와 뉴스를 제공한다. 가격은 1달러로 가판대에서 구입할 수 있다. 그 밖에 주간 경제 신문인 『프라하 포스트The Prague Post』와 『프라하 뉴스Prague News』 등이 여행자들에게 유용하다.

    프라하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는 모두 8종인데 스포츠 신문인 『데닉 스포츠 Den Sport』, 1893년 창간된 『리도베 노비니 Lidov noviny』, 그리고 석간인 『베체르닉 프라하 Ve匸ern Praha』 등이 유명하다.

    9. 음식

    체코는 뭐니뭐니 해도 맥주 애호가의 천국이다. 질 좋은 맥주 `필스너(Pilsner)"를 500cc컵 석 잔을 마시고도 1달러면 충분하다. 체코의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특히, `부드바르(Budvar:오리지널 버드와이저)"와 `플젠스키 프라즈드로이(Plze千sk Prazdroj:오리지널 Pilsner)"가 가장 유명하다. 500cc 한 컵에 7~14k匸. 우리 돈으로 약 200~400원이다. 체코어로 맥주는 `피보(Pivo)"라 부르고 무알코올 맥주는 `피토(Pito)"라고 한다.

    모라비아 남부 지방은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데 Vin na(와인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다.

    그 밖에 체코의 특산주로 쓰면서도 달콤한 맛이 절묘한 베체로브카(Becherovka), 허브 추출액이 포함된 보드카인 주브로브카(zubrovka), 자두 브랜디인 슬리보비체(Slivovice) 등이 있으며 그로키(Grog)는 럼주에 뜨거운 물과 설탕을 가미한 것인데 정력제로 마신다고 한다. 그리고 무알코올주로 리모나다(Limon a) 등이 유명하다.

    10. 관광지

    체코는 역사 도시의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마다 고유의 역사와 풍물을 간직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수도 프라하를 비롯하여 체스케 부데요비체(匘esk Bud区jovice), 체스키 크루믈로프(匘esk Krumlov), 쿠트나 호라(Kutn Hora), 타보르(T or) 그리고 텔치(Tel匸) 등이 손꼽힌다.

    프라하의 유태 박물관은 동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와 권위를 자랑한다. 프라하의 성 지역에는 훌륭한 화랑들이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슈테른베르스키(匨ternbersk ) 궁의 국립 미술관 소장품이 눈여겨 볼 만하다. 또한 흥미로운 곳으로 플젠(Plze千)의 맥주 박물관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칼 4세의 카를슈테인(Karl午tejn) 성은 14세기에 건축된 아름다운 성이다. 9세기에 세워진 프라하 성은 값진 예술품이 가득한데 현재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브르노의 17세기에 세워진슈필베르크(匨pilberk) 성은 합스부르크가 통치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자료출처
    http://www.travel21.co.kr



    체코의 역사 2

    슬라브족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뒤 이어 5~7세기에 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이주, 정착하였다. 슬라브족의 일파인 체크족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 슬로바크족은 슬로바키아 지역에 각각 정착하였다. 이 두 종족은 833년 연합하여 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모라비아 왕국은 번성하여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서부, 폴란드 일부를 차지하는 광대한 판도를 이루었다.

    906년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모라비아 왕국을 침략하여 슬로바키아를 점령함으로써 이후 1000여 년 동안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분리되어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모라비아 왕국이 몰락하자 체코인들은 895년 프라하를 중심으로 보헤미아, 모라비아, 슐레지엔을 포함하는 지역에 독자적인 국가, 즉 보헤미아 왕국을 세웠다. 보헤미아 왕국은 번성하여 1346년에는 국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기까지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으로 서진하자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에 의지하게 되었다.

    1526년에는 합스부르크 가의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1918년까지 3백 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민족 지도자 마사리크(Masaryk)와 그 제자인 베네시는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전쟁이 종결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10월 28일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 점령당한한 체코슬로바키아는 1945년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에게 루테니아 지역을 할양해야 했고 공산당과 비공산주의자가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1946년 총선거에서 공산당이 37.9%를 얻어 제 1당이 되었다. 공산당은 1948년 쿠데타를 일으켜 연립 내각을 무너뜨리고 일당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1960년에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국명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68년 공산당 제 1서기 두브체크에 의해 개혁이 있었으나 소련군이 침공하여 좌절되었다. 1988년 소련의 개혁바람이 동구권에 불어닥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민주화 요구가 일어났고 12월 공산정권은 퇴진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 으로 변경하였으며 6월에 자유총선을 실시하였다. 1993년 1월 연방의회의 결의에 따라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문화

    프라하의 카렐 대학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348년에 설립되었다. 카렐 대학 설립 이후 프라하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체코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문화면에서도 손실이 막대해 문예가 부흥하기에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세기 국가 부흥기에 체코어로 쓰여진 많은 문학 작품이 나왔고 이중 『어둠』이라는 걸작이 유명하다.

    20세기에는 카프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흐라발과 밀란 쿤데라 등이 대표작가이다. 음악에서도 유럽 문화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는데 바로크 시대의 젤렌카(Zelenka)로부 터 19세기의 스메타나(Smetana), 드보르작(Dvorjak)에 이르기까지 많은 거장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