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책부족의 7월 독후감- 분노의 포도 1,2

자몽미소 2011. 7. 18. 16:28
  • 책부족의 독후감

 

 


분노의 포도

저자
존 스타인벡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08-03-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작품『분노의 포도』.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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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상)

저자
존 스타인벡 지음
출판사
출판사 | 1998-11-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대공황 및 농업의 기계화에 밀려 땅을 빼앗기고 이주 길에 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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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읽고 내 생각

- <분노의 포도>를 읽는 시간

 

삼성출판사 판 <삼성세계문학전집>을 샀던 게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이니 벌써 28년 전 일이다. 세계문학전집은 문학에 대한 끌림이라기 보다는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이만큼은 읽었어야 하는데 늦었다는 생각에서 월부책 장사가 권했을 때는 두말않고 사게 되어 버린 책, 그래서 숙제 같던 책들이었다.

내가 <세계문학 읽기 모임>을 꼭 하고 싶었던 것은 세계문학 중에서 유명한 책들일수록 그걸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제목만 알면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 읽고도 잊어 버린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던 답답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본 실력을 갖추지 못한 것 같은 안절부절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책읽기에 있어서 해방을 느끼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세계문학은 꼭 읽어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이번 달에도 세계문학전집(이제는 민음사판으로) 중 하나를  읽었다.

 

그때 전집으로 산 세계문학 50권은 여름방학까지 집에 있다가 가을 되어서 가출 해 버리는 바람에 읽지  몇 권 읽지 못했고( 읽다가 덮은 책이 더 많았다), 아이 업고 돌아왔을 때는 창고에 버려졌던 그 책들이 장마에 곰팡이가 피고 얼룩이 져서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내가 세계 문학 전집을 손에 만지고 어쩌고 하던 것은 그러니까 스무살 되던 해의 겨울과 여름까지 뿐이었다. 제대로 읽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분노의 포도> 또한  읽었으되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게 그 책은 참 읽기 힘든 책이었고, 그렇더라도 마쳐야 할 책으로 인상에 남았다. 가도 가도 힘든 길이 이어졌다는 느낌만 남았고, 왜  제목에 <포도>가 붙었는지 알 수 없는 채  분노에 쌓여 "포효하는 길" 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던 기억만이 남았다.

그리고 몇 해 전, 영화로 나왔던 <분노의 포도>를 디비디로 봤다.  대학생 초기에 책으로 읽을 때는 미국의 농촌이 막 산업 농업 시대로 가는 시대적 배경을 알지 못하다가 영화를 볼 때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되어 있던 상태라서 영화를 흥미롭게 봤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오래 전에 지루하게 읽었으나  꽤나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했다. 

 

 

- 내용에선 놀라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내용면에서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1930년대의 미국 농촌의 모습에만 있었다. 거기에다 이 소설이 보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현실이 현대 한국의 기업과 노동자간의 행태에서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은 놀라웠다. 이미 80년 전 미국의 농촌이, 개발이라는 논리하에 땅을 빼앗기고 있는 한국의 농촌 현실과 다를 것도 없었다. 효율성 면에서 인간은 기계보다 못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이다. 그 가장 아래 가난한 인간이 있으되 끝없는 길과 길의 미로에서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 물질적 가난은 그 길이 길어질수록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지혜를 버리게 한다.

 

광활한 농지에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고 사람의 노동력 대신 기계가 일을 하는 미국 농촌의 모습은 참으로 좋아보였던 우리였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 중 하나여서 우리 농촌은 왜 그렇게 안 되는가 자문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농촌의 모습은 가난한 소농들의 등을 짓밟고 세운 것이고, 그곳에서 재배되는 것들은 생명의 땅에서 소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식 토지에서 수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조금씩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교육과 의료와 무역과 산업 방식에서는 미국식의 효율성을 답습하는 행정이 권력을 잡고 있고, 자본은 그 등 뒤에서 그들의 욕망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다.  

 

다만, < 분노의 포도> 에서는 끝까지 그 가족을 보듬은 어머니의 모습이나, 천막촌의 공동체가 안간힘을 쓰면 버텨보지만, 그 힘이 거대 자본을 이길 수는 없었다. 굳건한 모성이나  함께 나누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거나 문학의 희망처럼만 보였다. 소설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딸 샤론이 늙은 남자에게 자기 가슴을 열어 젖을 먹이려는 모습에서 소설은 끝났고, 작가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희망을 물었덨던 같다.

 

 -미학에선 지루하고

 

하지만 <분노의 포도>는 내게 좋은 소설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어느새 소설이 갖추면 좋은 것들에 대한 바람이 가득해서 서사가 좋지 않아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이나,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들지 못하거나, 생각을 다듬도록 돕는 소설이 아닐 경우에  읽기 힘들어 하고 있다.

이 책은 결코 내가 바라는 소설적 미학을  발휘하려 애쓰지 않았다.  드문 드문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보였고, 물질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들어 있었으나 그것들이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이 소설이 쓰여진 때가 1930년대이기 때문에 그 시기란 사실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 시기의 소설에 현대 독자인 내가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불만이라기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현대 독자임을 보다 더 분명히 자각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이틀만에 다 읽어 치웠다. 매우 빠르게 읽었으니 속독을 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속독이 모든 글자를 읽고 모두 이해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속독이라기 보다는 건너 뛰며 읽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때로는 문단의 처음만 읽고 이 문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알아채고 다음 문단으로 뛰어 가는 방법을 써서 아주 빠르게 읽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소설이었다 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