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일식-히라노게이치로/2011년의 책읽기

자몽미소 2011. 10. 14. 19:52

 

 

*책을 읽고, 내 생각

 

최근 나온 책『소설을 읽는 방법』을 읽다가 지은이가『일식』을 쓴 작가라는 걸 알았다.

책 제목을 보고 서둘러 아들방에 가서 책장을 봤더니 『일식』은 두 권이나 있었다. 하나는 남편이 사서 읽었던 것이고, 내 책에는 1999년 4월에 읽었다고 메모되어 있었다. 남편은 이 작가가 『소설을 읽는 방법』에서 엘리아데의 소설을 인용하였다면서, 엘리아데는 남편이 좋아하는 종교학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남편은 『일식』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지만 내겐 이 소설이 재밌었다는 기억이 없었다. 더듬어보니 중세의 수도사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종교사적인 사상의 변화와 고대의 철학사상까지 아울렀기에  99년 당시에 신간이라고 해서 구입했지만 읽다가 그만 두었었고 그 후 다시는 책을 열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단숨에 읽었다.

독서력(讀書力)이란 말은 없지만 독서력(讀書歷)이  몸에 작용하는 근육의 힘처럼 책읽는 힘을 길러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떤 책이 이해하거나 매력을 느끼기에 어려울지라도 어느 시기가 오면 새로운 힘이 생겨 과거에 음미하지 못한 책을 읽도록 돕는 것 같다. 그때 못 읽었던 책을 지금 읽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잘 읽어내지 못하는 책들도 어느 시간이 되면 잘 읽힐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게, 책 읽는 사람의 자세로서는 매우 좋다는 모범생 같은 생각을 해 보았다.

 

 

 

노년의 수도사가 과거의 한 때를 회상하는 형식의 이 소설은 <마녀 재판>이 온 유럽을 휩쓸기 바로 이전을 그리고 있다. 곳곳에서 새로운 신앙 운동이 생겨나면서 이단이라는 말도 생겨나던 시기, 고대의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이성이 신성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 서로 다른 길을 갈 것인가를 갈등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소설 제목으로 달이 해를 먹어 버리는 일식이 갖는 은유는 서로의 궤도에서 잘 돌아가던 것들이 한 쪽의 우세로 말미암아 오히려 어둠과 암흑을 만들어 내었던 것을 그리려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소설 속 중세 유럽의 상황이 오늘날의 혼돈과 그리 다르지 않게 보인다. 무엇만이 옳다는 주장은 마녀재판의 맹목처럼 위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녀재판은 옳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막아내지도 못하는 것이다. 소설 주인공인 젊은 수도사는 그가 만났던 연금술사가 신앙에서 전혀 문제될 게 없으며 정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녀로 몰릴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를 비호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는, 또는 우리는 어떤 대세를 만났을 때  뒤로 한발짝 물러나면서  이후 벌어질 사태만  속절없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몸으로 부딛히는 대신 머리로만 갈등하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비오는 오후에 소설은 매우 잘 읽혔지만, 이번에도 나는 작가의 사유를 즐길만큼의 독서는 하지 못했다. 이 책을 더 잘 읽으려면 중세 유럽사와 사상에 관한 일련의 독서가  이미 마련되어 있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 없이 분명하였다.

 

 

 

작가 소개

 

이 작가의 다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