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칼같은 글쓰기/ 아니 에르노 다시읽기/ 2019년의 책읽기

자몽미소 2019. 6. 2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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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을 다시 읽는 맛이 매우 좋다.

책 앞 장을 보니 2012년의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서 그 해 초여름, 우리가 걸었던 런던의 거리와 공원, 동네 빨래방에서 앉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그 시간이 여름냄새를 풍기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인상 깊은 문장을 밑줄을 그어 두는 것도 좋지만, 컴퓨터 자판으로 옮겨 보는 일도 즐겁다.

오늘은 <칼 같은 글쓰기>의 53쪽, 용해되고 싶은 욕망에 관한 아니 에르노의 글이다.


A.E.


내 작업 방식은 주로 기억에 근거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할 요소들을 환기시킵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있지 않아도, 집필중에 있는 책이 뇌는 동안 기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동안 기억은 마찬가지로 작용합니다. 언젠가 "기억은 물질적인 구체성을 띤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죠. 어쨌든 내게 기억은 극도로 감각적인 무엇이라, 본 사물, 들은 사실( 대개는 고립된 채 섬광처럼 하나씩 떠오르는 문장들이 이것을 되살리는 작용을 하죠), 행위와 장면을 아주 정확히 되살릴 수 있어요. 마법처럼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할까요. 이러한 끊임없는  '현현 '이 이 내 책의 재료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실의 증거이기도 하고요.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 이미지와 말을 있는 그대로 따와서 묘사하거나 인용하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서사나 서사적인 장면 묘사를 통해 장면, 세부 사항, 문장이 내게 환기시키는 감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내려고 애씁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의, 벌거벗은 상태의 감각이 도달하는 그 순간이 필요한 것이죠. 오직 그 순간을 맞은 후에야 단어들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것은 감각이 글쓰기의 기준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진실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글을 쓸 때는 매우 구체적인 작업과 메커니즘인데 이렇게 추상적인 용어들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곤혹스럽군요.

 모든 게 상상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래서 모든 것이 실제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마치 정지 버튼을 눌러 이미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거나, 혹은 종이 위에 단어들을 받아쓸 수 있을 때까지 자동 응답기의 메세지를 몇 번이고 듣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2019년 6월 21일 아침에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