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1일 월요일, 저녁 9시 반. <코리아극장, 2% 필름페스티발>에서
영화 <바벨>을 보다
하느님 가까이 가고 싶어 만들어진 <바벨의 탑>, 그러나 신은 인간의 이 욕심에 노하셨고 탑은 무너졌으며 이후로 인류는 서로 소통하기가 어려워졌다. 노하심의 표현으로 신께서는 인간의 말을 서로 다르게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 <바벨>은 인간욕망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다른 사람끼리는 소통되지 않는다. 언어 문제이기도 하고 이해 문제이기도 하고 아무리 자기를 표현하고자 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이제 우리의 욕망은 더욱 더 혼란스럽다.
중앙성당에서 미사를 끝내고 코리아 극장으로 갔다. 남편과 아들을 거기서 만나기로 하였다. 중앙성당에 모인 신부님들은 해군기지유치에 반대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셨다.
오후 내내 뭔가에 바빠 저녁 밥을 못 챙겨 먹고 미사 시간에 맞추어 가느라 군것질로 못하고 갔더니 9시가 가까워질 즈음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겨우 한 끼를 건너 뛰었을 뿐인데도 배 고프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며칠 전에는 신부님들을 따라 평신도도 단식 농성을 한다면 나도 가담을 하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농성장에서 물만 마시고 있는 나를 상상했던 적도 있건만, 실지로 나는 한 끼의 식사에도 굴복한다. 배고파서 먹고 싶고, 자고 싶어서 자야 하고,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욕구, 가장 동물적인 이 욕구는 그러나 항상 과하지 않도록 조정하지 않으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인간이 바로 동물인데도 짐승같다고 한다. 나는 한 끼의 밥을 못 먹고 식량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극장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마땅히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어서 마른 빵 하나를 샀다. 그렇지만 한 번 들어간 먹을 것은 또다시 다른 먹을 것을 원했다. 영화가 시작이 되고 나서 아들은 빵 하나 때문에 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는 어미를 위해 극장 밖으로 나가 우유를 사왔다. 빵과 함께 축축하 우유가 한 병 내 몸을 채운 다음에야 나는 고요히 영화를 볼 수가 있었다.
사람의 마음과 몸은 때로 아주 따로 따로 논다. 고 짐승같은 이 몸을 인정했다.
영화는 양을 치고 사는 모로코 마을, 가정부를 두고 사는 미국 가정, 미국에서 돈 벌이를 하는 멕시코인의 결혼식장, 청각장애를 가진 일본인 소녀가 사는 일본을 비춘다. 서로 연결될 것이 없는 것 같은 이 4개의 장소가 한데 어울려지는 영화. 바벨은 기묘하게 얽혀 있다.
양을 지키기 위해 총을 사는 모로코의 농부
그 농부의 아들이 총을 갖고 놀다가 사고를 일으킨다.
누나의 맨 몸을 몰래 훔쳐보기도 하는 동생이 형과 내기를 하다가 버스에 총질을 한 것이다.
버스에 타고 있던 미국인이 총에 맞는다.
이들은 세번째 아이가 죽은 이후 서로를 힘들어 하던 중, 둘만의 여행을 왔던 미국사람들이다.
이 사고로 이들의 여행은 길어져버렸다.
총에 맞은 부인을 구출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 미국 대사관은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테러집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 이 단순한 총기사고는 세계뉴스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부부는 병원으로 가지 못하고 모로코의 마을에 갇힌 것처럼 지내야 한다. 의사라고 해 봐야 수의사 밖에 없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를 상황.
이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는 여인은 멕시코에서 이주해 온 여자다.
아들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는 이 부부의 동생이 와 주어야 하지만 약속이 깨지고 만다. 여자는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보지만 아무에게도 아이를 맡기지 못하고 미국 아이들을 멕시코의 자기 집으로 데려가게 된다.
그러나 아들의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여인과 이 여자의 조카는 밀입국자라는 오해를 받는다. 국경에서 조카는 여자와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다. 여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멕시코 국경의 사막을 헤맨다.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갈증 만큼이나 크다.
남자는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집으로 전화를 걸지만 아내르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부짖는다.
그들의 오해는 작고 사소한 거였으나 그것 때문에 여행을 했고 이 여행에서 아내는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이런 커다란 결과까지 오고만 것일까, 라고 그는 생각하는 듯하다.
어머니의 자살 이후 더욱 난폭해져가는 이 일본 여고생은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남자애들은 그녀가 청각장애라는 것을 알고는 도망을 간다.
팬티을 안 입은 채로 남자들을 놀려 주기도 하고 춤추러 가서 실컷 놀아 봐도 해소되지 않는 몸과 마음.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 온 형사를 만나게 되고, 그 형사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집으로 초대한다.
형사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옷을 벗고 그 앞에 선다.
형사는 실은 어머니의 자살을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모로코의 총기 사건에 이 여고생 아버지의 총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모로코로 여행을 했었다. 그때 여행 안내인에게 총을 선물로 주었었다.
이번에 일어난 총은 그 여행 안내인이 모로코의 농부에게 총을 팔았던 데서 시작되었다.
도쿄의 높다란 건물과 모로코의 흙벽집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도쿄의 현란한 밤, 춤을 추는 여고생과 놀 것이 없어 양치러 나갔다가 바위에 앉아 자위를 하며 사춘기의 돌입을 어쩌지 못하는 모로코의 소년은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서도 그 욕망을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소녀는 따돌려진다.
소년은 총을 쏘고 소녀는 거짓말을 한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멕시코인들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다. 많은 것을 가진 나라인 미국은 가난한 나라를 의심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이다. 미국인이 다쳤으니 테러일 것으로 보고 긴장하는 모습은 아들의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다가 국경에서 길을 잃은 여자를 범죄인 취급하는 모습에서 역력하다.
실지로 총에 맞은 미국인은 모로코의 마을에서 같이 여행했던 미국인들에게 버려졌다. 테러를 의심한 관광객들은 구급차가 오기도 전에 모로코 마을에서 도망쳐 버린다. 모로코 마을의 가난한 남자와 늙은 여자는 그들의 방식으로 미국인을 돕는다
멕시코의 여자는 아들의 결혼식에서 행복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기를 사랑하던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았고 아들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행복할 것이라 믿어졌었다.
불행은 의심하는 권력 경계에서 일어났다.
불법이민자로서 추방당하는 멕시코 여자와 테러라고 의심된 모로코 마을의 소년들은 경찰의 총앞에 노출되고 말았다. 소년은 죽고 여자는 추방당한다
일본의 소녀는 자살을 하고 싶어 베란다 앞에 섰다. 아버지가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녀는 맨몸으로 도시를 향해 서 있었다. 아버지와의 포옹장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버지와의 화해인지 근친상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영화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머리가 찌근거린다
이해하려는 끈을 잡았다가도 놓쳐버리는 이 얽힘때문이었다. 무엇을 이해하였는지 화면이 주는 충격에 멍청해지다가 몸이 더 피곤해지곤했다.
2007년 5월 23일 수요일, 점심밥 안 먹고 일도 안 하고 낮에, 나무의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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