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3일 일요일, 햇살 쨍쨍
영화는 2010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차잔에 따뜻한 오차가 담겨 있고 석양을 향해 부부가 있다. 여자는 다사롭게 웃고 있고 남자는 무표정이다.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은 여자의 모습이 곱다.
그 두 사람을 아름다운 들판과 그림같은 나무 집이 다시 감싸안으면
영화는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2004년 봄, 알츠하이머 병이 시작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현재는 주인공이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는 삶을 포기하거나 두려워 하는 부분으로 메워진다. 현재는 자신에게 온 병에 대한 거부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하다.
직장에서 버림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 일터를 놓치는 것이 인생을 놓치는 것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남자는 자신의 병을 숨긴다.
자신의 병을 숨기는 진짜 이유는 또 한가지 있었다.
가을에 있을 딸의 결혼식까지는 일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고 싶었던 것이다. 봄에 발병하고 가을까지 그는 무지 무지 애쓰는 아버지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에 걸린 남자는 회사에서 사퇴하게 된다. 그가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었던 회사로부터 그는 잘려나가게 된 것이다. 회사는 병에 걸린 그에게서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한다. 돈이 필요했으므로 아내는 직장을 가지게 되고 일터에 나간 아내를 대신하여 그는 아내가 했던 안 청소를 해 본다.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물고기에 밥을 주고 또 준다
자신도 밥을 먹고 더 먹고, 밥 먹는 순서 조차도 잊는다. 때로 그는 그만 다녔던 직장에도 출근하려 한다
영화가 단순히 알츠하이머 병의 슬픈 행태만은 보여 주었다면 뻔한 스토리에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영화의 매력은 시간을 오고가며 그려내는 기억의 회귀에서 빛이 나는 듯 하다.
시간을 붙잡고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20대 시절의 두 사람을 그가 만나게 장치한다. 과거의 영혼이 현재의 불행을 다독이는 방법은 매우 독특해서. 일본 영화에서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기묘한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현재의 그에게 다가오는 스무살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 그들이 나누던 사랑의 맹세는 실지로 그가 기억을 잃어버린다 해도 아내는 그의 옆에 오래도록 있을 것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확인시킨다.
요양소에 가기를 거부하며 돌연 나타난 옛스승은 과거와 현재와 혼재하고 꿈과 소망이 섞여지며 우리 삶의 시간이 뭐 그리 불행한 일 뿐이었겠는가고를 말한다, 사라진다고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하룻밤, 사랑은 기억을 잃어 버리는 사내에게 꼭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를 보는 우리도 안심시킨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는 듯하다.
실로 옛스승이 구워준 오차잔은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불량품이었지만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아내의 이름을 새김으로써 남자의 마음에 새긴 사랑이 된다. 불의 언약으로 새긴 이름이랄까.
그러나 그 날 밤 이후로 그는 아내를 기억하지 못한다. 엣 추억을 따라 갔던 산길에서 돌아오던 남자는 자기를 찾으러 오는 아내를 만난다. 아내는 반가움과 안도감에 한 숨을 푹 쉬고 활짝 웃어 보인다
그러나 남자는 처음 만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위해 무엇을 하여 주면 좋을지를 고민하다가 역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한다. 특히 남자에게만은 그럴 것이다. 아내는 기억이 사라지는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일본어로는 아시따노 기오크> 라고 발음하는 영화 <내일의 기억>을 작년 일본에서 보았다. 울남편은 그때 울었고 관객들의 흐느낌을 나도 들었다. 그때 남편과 함께 눈물을 흘렸던 나는 어제도 아들을 옆에 두고 울었다. 그때는 서투른 일본어로 안 들리는 부분들, 회의 장면이라든가 남자의 빠른 말 같은 것은 알아듣지 못했었는데, 어제 한국말 자막이 아래 쓰여 있는 영화를 보면서는 이해했다,
작년에 영화를 볼 때는 왜 일본 영화에서는 가족들이 핵가족 하나로만 표현되지? 우리 나라 같으면 친척들의 개입도 자연스럽게 삽입 되었을 텐데, 싶었는데 한국말 자막으로 보면서야 결혼식에 친척들이 참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부인의 감정 표현도 지나치게 절제되지 않았는가 했었지만 어제 볼 때는 자연스럽게 보였다. 보편적인 일본 여성이라기 보다 사랑을 알고 사람과 가정을 소중히 하는 특별한 여자로서 보니 그대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음악이 특히 좋다. 음악이 좋고, 두 사람이 묵었던 요양소가 좋아 보였다. 요양소의 들판과 개울과 요양소로 가는 길이 좋았다.
일본에 가서 미타카 쪽 기차를 타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마치 그 요양소에 가 본 사람처럼 즐겁기도 하였다. 영화의 배경이 이렇게도 마음에 들 줄이야.
작년에 일본에 있을 때는 잘 몰랐던 부분이지만, 이제야 이 영화를 보면서 시부야 역이 내게 아련해지고 있었다. 일본의 거리가 낯이 익었고, 주인공이 걷던 오솔길의 스기(삼나무)가 눈에 확 띠었다. 우리가족이 지난 봄에 함께 갔던 다까오산의 숲길이 영화에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산에도 스기 (일본삼나무)가 많았었다. 아들은 이곳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정을 일본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말로 대신했다. 아들도 영화를 보고 일본이 그리워진 것이다. 잠깐 살았던 곳을 영화에서 만난 셈이다. 그것도 영화가 주는 즐거움의 하나다.
작년에 이 영화를 보고 원작인 책 <아시타노 기오크>를 샀었다.
책엔 주인공의 아버지도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것으로 나온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알츠하이머 병 증상을 매우 자세하게 적었고 그 때문에 알츠하이머 명이라면 치를 떨었다.
문장이 좋았다고 여겨진다. 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병증상을 기록한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어 기억하고 있다.
<마치 사막의 모래에 물을 뿌리는 심정이다>
무엇을 기억하려 해 본들 거대한 사막같은 망각의 세포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자기의 기억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원작의 작가가 쓴 일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영화와는 다른 맛으로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의 기억>을 보며 생각나는 것.
언제가 내가 아프게 될 미래
언젠가는 내가 늙은 이가 되어 있을 미래
언젠가는 내가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낼 미래
언젠가는 내가 죽어 사라질 미래
언제나 오늘 다음은 내일인 것처럼
자연인 인간의 운명도 내일이 오듯
그렇게 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죽음도 늙음도 사라짐도 나에게 올 것을 기억해야해.
오늘로부터 내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로 부터 오늘로 뒤돌아 와 보자고.
2007년 5월 14일 월요일, 10시 9분, 나무의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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