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마이클폴란의 <맛있는 밥상>- 2009년의 책읽기 22

자몽미소 2009. 9. 4. 12:41

 

 

 책 중에 

p216-217

 전통식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존재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이 먹는 방식이다. 이 둘은 똑같이 우리의 건강에 중요하다.

전통식사는 건축 같은 문화의 토착적 창조물들과 비슷하다. 문화는 길고 점진적인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무엇이 좋은 것인지 찾아낸다. 그리하여 특별한 장소에서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것으로 인간의 필요를 최대한 충족시킨다. 지붕의 경사가 가파르면 그곳의 강수량이 많다는 뜻이다. 요리의 향료같은 것도 또 다른 식으로 지역의 기후를 반영한다. 향료를 뿌린 음식을 먹으면 몸을 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많은 향료는 항균성 또한 가지고 있다. 날씨가 더운 곳에서는 음식이 금방 상하기 때문에, 향료의 항균성이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더운 기후일수록 요리에서 더 많은 향신료가 발견된다고 한다.

물론 요리는 건강이나 생물학적으로만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요리법은 제멋대로이고 아무래도 정미만큼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요리는 순수하게 문화적으로 기능하여, 사회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다른 사회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런 문화적 목적은 왜 요리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나타나는지 설명해 준다. 이민자의 가정에서 同化 의 마지막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찬장이라는 말도 있다. 음식 심리학자 폴 로진이 지적했듯이, 변하지 않는 향신료들-지중해의 레몬과 올리브기름, 아시아의 간장과 생강, 심지어 미국의 케첩까지도-은 이질적인 맛으로 인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 모를 타문화의 새로운 음식을 흡수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식사는 다른 많은 문화적 관행들보다 자연이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한쪽에는 인간의 생리기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연 세계가 있다. 요리에서 음식을 조합하는 특정한 방식과 음식을 준비하는 특정한 방식은 식사와 건강과 장소에 관한 축적된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전통적 요리법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인데, 그 독창성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야 현대 과학에 의 해 종종 밝혀지고 있다.

 

어떤 사회든지 음식 주변을 둘러싼 음식문화없이 새로운 음식을 받아들이면, 사람들들은 병에 걸리게 된다. 옥수수가 처음으로 유럽, 앞리카, 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그랬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전체 맥락은 거의 음식 자체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음식가공"방법은 식품과학의 보다 새로운 가공 방법과 어떻게 다른가?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전통적인 방법은 세월의 시험을 견디며 사람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주고 지금까지 건강한 세대를 이어올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대표적인 미식가였던 브리야사바랭은 "먹이를 먹는'동물과 "식사를 하는 인간"의 영양 섭취를 구분하면서 인간의 식사가 생물학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음식은 즐거움에 관한 것이고 공동체에 관한 것이고 가족과 영성에 관한 것이고 우리와 자연 세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 표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 뒤부터 식사는 생물학 못지않게 문화와 관련되 행위가 되었다. 

 

* 영양주의

 

p249

영양주의는 음식이 무엇보다 영양에 관한 것이고, 영양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전문가와 산업만이 제대로 공급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p11

오늘날의 음식문화는 세대하마 한 차례 이상 바뀌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이러한 변화에는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무엇이 우리들의 식단에 이런 거침없는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우선 320 억 달러 규모의 식품판매업이다.

식품 판매업은  더욱 더 커지기 위해 끊임없는 변화를 계소해서 필요로 한다.

또다른 원인 제공자는 영양학이다.

영양학은 식사와 건강에 관한 지식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주는 대단한 학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장을 수시로 바꾸는 결함투성이 학문일 수도 있다. 

 

*신성화된 영양주의

영양주의-조르지스크리니스라는 오스트레일리아 과학사회학자의 말

 

영양주의는 형식적으로 보자면, 정말 중요한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성직자가 필요하다고 암시하는 유사 종교적인 개념이다.

 

*시장에 등장한 영양주의

영양주의는 식품의약국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완전히 실용적인 목적에서 정부는 음식을 확인된 영양소의 합에 불과한  것으로 재정의했다. 불순품은 식품과학 덕분에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

*식품과학의 황금시대 

일반적으로 날감자나 당근보다는 시리얼에 건강정보 표기를 붙이기가 간편해졌다. 그래서 건강에 좋은 식품은 농산물 코너에서 조용히 누워 있고, 시리얼 류는 완전곡물의 우수성을 광고하게 되었다.

영양주의는 식품업계에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영양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가공도가 높은 식품(이윤이 높은 식품)들을 지지해두고 의료계와 정부를 이런 식품의 판촉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정크푸드라 해도 영양주의의 논리의 손만 거치면 건강한 음식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영양주의는 우리에게 최근에 승인된 음식 비슷한 물질 들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한편으로는 음식을 고르고 먹는 행위를 둘러싼 엄청난 불안이 조성되었다.

제대로 고르고 먹기 위해서 최신 과학연구를 체크하고 혼란스러운 성분 표ㅣ르 좌해 보아야 한다. 미국인들은 영양 철학을 받아들였다. 미국 음식 문화는 맛을 즐기기 보다는 후닥닥 먹고 나가버리는 경향에서 볼 수 있듯이 음식에 관한 모호한 무관심을 낳았다.

음식 선택을 과학적인 방법에 맡긴다는 것은 음식에 민족적 색채와 역사적 내용을 없앤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과학적 식사법은 미국인들의 집 앞에 깔려 있는 잔디 같은 것이다 차이를 덮고 풍경을 미국화 하는 것. 이 경우 미적 다양성과 감각의 쾌락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102쪽 

음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나 영양주의가 우리 정신과 식단, 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식품 산업, 저널리즘, 정부는 큰 빚을 지고있다. 이 셋은 영양주의의 신호를 증폭시켰다. 저널리즘은 무비판적으로 식사에 관한 최신의 연구를 신문에 장식했고 식품산업은 빈약한 건강 정보를 근거로 음식처럼 보이는 이상한 상품을 판매했다. 업계가 만들어낸 기묘한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서 진짜 음식을 몰아내

버렸다.

이미 영양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식습관에서 전통과 상식의 영향력을 허물어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식품업계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172 쪽

 

영양주의 극복을 위해서

1-서구식 식사를 피하라

2-음식을 먹어라 

   -증조할머니가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음식은 먹지 않는다

   - 건강정보 표기가 있는 식품은 피한다

   - 슈퍼마켓에서는 가장 자리에서 물건을 사고, 가운데 쪽은 얼씬도 않는다

   -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든 슈퍼마켓에서 벗어난다

   

3-주로 채식을 하라:무엇을 먹을 것인가

   -주로 채식을 하고 특히 잎을 먹는다

   -우리는 우리 먹을 거리가 먹는 것을 그대로 먹느나

   -공간이 충분하다면 냉동고를 마련한다

   -잡식동물처럼 먹는다

   - 건강한 땅에서 잘 자란 동식물을 먹는다

   - 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야생에서 난 음식을 먹는다

   - 영양보충제를 먹는 부류(건강에 관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생활한다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 인도인이나 그리스인 처럼 식사를 한다

   -비전통적인 음식은 우선 의심의 눈길로 본다

   - 저녁식사를 하며 포도주를 한 잔 마신다

 

4.과식하지 마라-어떻게 먹을 것인가

  - 더 내고 덜 먹는다

   -식사를 한다(식사는 단순히 몸에 에너지를 주입하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먹든 식탁에서 먹는다

   -자동차가 연료를 공급받는 곳에서 자신의 연료를 채우는 일은 삼간다

   -혼자서 식사하지 않는다

   -배꼽시계를 확인한다

   -천천히 먹는다

 -직접 요리를 하고 가능하다면 뜰에 식물을 심는다

 

 

 

 책을 읽고 내 생각

 

몇 해 전에 한국남자에게 시집 온 일본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가 한국에 와서 가장 어려운 점은 <음식>이라고 했다. 그녀는

"한국 음식은 너무 복잡해요, 일본에서는 "땡" 하면  먹을 수 있는데, 한국 음식은 힘들어요"

라고 했다. 한국 음식이 복잡하다는 것에는 한편 동의를 하면서도 일본 음식이 그렇게 간편하게 만들어질까 의아했다.

일본에 가서야 알았지만, 그녀가 말한 "땡" 음식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음식들이었다.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을 위해 보다 간편하게 만들어진 슈퍼마켓의 음식들은 과연 전자레인지에서  2-3 분 데우면 "땡" 소리를 내며 바로 식탁에 꺼내 놓을 수 있었다. 그러한 음식이 우리 나라 보다 일본에 더 다양하게 많은 것인지 일본 음식이 모두 한국보다 더 간편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전통 음식이어도 만드는 과정을 기업이 맡고 소비자는 포장을 뜯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가공산업이 발달해서 그렇지, 일본의 음식들도 우리 나라처럼 시간을 들여 발표하고 저장하는 식품도 많았고, 기업에 따라서는 소비자의 욕구에 훨씬 더 가깝고자 포장 용기마저 그릇처럼 만들어 놓아, 일본에서 주부로 사는 일은 한국에서 보다는 간편해 뵈기도 했다.

 

이 책은 <음식>을 먹고 <식사>를 하자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서구식 식사라고 했지만 지은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미국식 식사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 영양주의가 대두하면서 식품산업체는 식품 가공을 통해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간파했다. 이후 보다 많은 가공식품들이 영양이 좋은 음식으로 광고되면서 손이 많이 가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전통 음식의 자리를 밀어냈다. 그러나 영양이 좋다고 광고되는 식품을 먹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식사를 하는 사람에 비해 살이 더 찌고, 암과 성인병에 걸리는  비율이 높았다. 과학과 산업, 정부가 합작이 되어 국민들을 "위험하고 불행한 식사"로 초대하고 만 것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에게 진짜 음식을 먹었던 전통을 되살리고, <증조 할머니의 음식>을 되찾아 우리의 밥상이 정말 우리 몸에 좋은 <행복한 밥상>이 되도록 우리 몸에 오는 음식 사슬을 확인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은 끼니를 떼우는 식량식품이 아니라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을 거리를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의 망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관계의 망 속에 인간은 일부를 이루고 있다. 각각 서로에게 의존하고, 궁극적으로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햇빛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

식물과 토양, 지배자와 사육자, 식물과 동물, 요리사와 먹는 사람들의 관계 또한 영양을 공급하고 영양을 공급받는 거대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마이크 폴란의 <욕망의 식물학>에서는 세계에 퍼진 대표적인 식물들이, 사실 인간의 욕망이기에 앞서 인간이 식물종 확산을 위해 이용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주장이 재미있었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읽을 때는 미국 전역을 돌며 관찰한 먹을 거리에 대한 고민이 재미있었다. 인간이 잡식을 선택한 이유는 인류역사를 통해 잡식이야말로 수많은 위험 변수에서 살아남는 가장 안전한 생명유지의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책은 <음식을 먹고 식사를 하자>는 주장은 어쩌면 느닷없이 당연한 주장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언제 음식 아닌 것을 먹었나? 라고 할 수도 있고, 세 끼 식사를 하고 있는데  또다른 식사가 있단 말인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도 벌써 어릴 적에 먹던 음식과 아주 다른 것을 먹으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고, 어릴 때 밥상머리 교육이라던 교육 방식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잘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집만 해도, 아들과 밥상을 함께 하는 일이 드물다. 그래서 아들에게 "너는 우리 食口 가 아닌가 벼" 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 적이 있는데, 어쩌다 집에 함께 있더라도 선호하는 음식이 달라 우리 따로 아들 따로인, 밥상은 같으되 먹을 음식은 다른 밥상이 되기도 한다. 내 어릴 적이었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처럼 서서히 변하고 만 우리의 식탁과 밥상 문화를 검토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고 보니 먹을 것을 구입하는데 주로 마트를 이용하고 있고, 마트엔 그러고 보니 자연음식의 비율보다 가공 식품의 비율이 더 높다. 소비자로서 신경 바짝 쓰고 음식에 대한 감수성을 놓쳐 버린다면, 어느 새 마트에도  자연식품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식품산업체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공 식품만으로 영양만점이라 자랑하는 완전가공식품으로 가득차 버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것밖에 먹을 게 없는 미래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광고하는 식품 보기

 

 

 

작은 글씨로 쓰여지 온갖 첨가품들

 

라면 한 그릇을 위해 들어가는 것들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인지?

 

식품 첨가물 보다 더 큰 글씨로 적혀진 영양성분

트랜스지방이 몸에 나쁘다는 영양학계의 의견이 나온 뒤, 식품가공 업체는 앞다투어 자기 회사의 식품엔 트랜즈지방이 없다는 걸 광고한다.

이 제품에 없을 수 있는 비타민이라든가 무기질에 관해서는 표시하지 않았지만, 소비자가 눈여겨 보고 안심해서 구매로까지 이어질 트랜스지방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0이라고).

무엇이 들어 있다 는 것도 광고할 수 있고, 무엇이 없다는 것도 광고로 이용해 소비자의 눈길을 끌 수 있다. 영양주의가 식품산업계에서 이용되는 사례이다.

 

그러나 자연식품인 쌀이나 당근에 이런 표시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 식품 소비자는 되도록 영양표기가 없고 첨가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들을 구입하여 먹는 것이 식품산업의 굴레에서 보다 자유롭게, 보다 더 주체적인 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