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2009년의 책읽기 23

자몽미소 2009. 9. 4. 12:42

 

 

"흔들러 갔다가 흔들려 나왔다."

 

언어학자 다니엘에버렛의 30년 동안의 기록이라고 봐도 좋겠다.

브라질원주민인 피다한 부족에게 선교하러 들어간 게 1970년 초, 그러나 원주민 부락의 선교사들을 추방하라는 브라질 정부의 명령에 의해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다시 언어학도로서 그 부족에게 들어가게 된다. 언어학자로 들어갔지만 그의 최종 목적은 피다한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리려는 것이었다. 피다한 사람들의 말로 성경을 번역해 알려 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가 피다한 사람들과 접하면서 깨달은  것은 "문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언어의 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피다한 문화를 하나하나 이해해 간다. 왜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려하지 않는지, 왜 그들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지, 왜 그들은 싸우지 않고 늘 웃으면서 사는 사람들인지, 또 왜 그들은 도구를 만들어 보다 효율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지 등을 알아낸다.또 그게 피다한의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피다한 사람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행복지수가 높았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웃는 부족이었다. 그들에겐 예수가 필요없었다. 현재 내 눈 앞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그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피다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종교를 전파하러 간 그를 흔들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그때까지 가졌던 것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되었고 의심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 바람에 30년의 연구 생활 동안 밀림의 험난한 생활을 같이 했던 그의 가족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 고유의 주체성과 자유를 위해서 종교를 버렸으므로 그는 더 행복한 학자가  되어 자신이 경험했던 피다한 문화를 이 책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문법이 아니고 문화와 연관된다"

 

그가 언어학계에 피다한 언어를 발표하였을 때, 미국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변형생성문법"이라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며 생래적인 문법생성능력을 통해 끊임없이 문장을 생성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다니엘이 연구한 피다한 말은 촘스키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언어였다. 촘스키는 문법이 언어를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다니엘이 연구한 피다한 말은 피다한 부족 특유의 문화가 언어를 만들고 있었다. 피다한 말에는 복문이 없다. 언어의 효율성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단문구조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렇다고 이들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촘스키의 언어학이 인간 언어 전체를 아우를 수는 없다는 것을 현지의 사례로 보여주면서, 점차 언어학이 현장연구, 문화인류학자들처럼 현장 언어를 갖고 연구하지 않고, 실험실에서 이론만을 가지고 이론이 이론을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을 비판한다. 현장 연구를 통해서라야만 점차 사라지고 있는 세계의 언어들, 그 다양한 인간의 언어 체계를 알아낼 수 있고, 또 급속도로 사라져버리는 언어들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보는 한 사람의 일생

 

책은 쉽고 평이한 문체로 이루어졌지만 30년 동안의 연구 생활동안 일어났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에는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원주민들과의 생활, 밀림 속에서 아주 다급하고 위험했던 순간들, 또는 평화의 진면목을 맛보던 순간들까지, 일기처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사람 말이 아니라 새의 소리나 사람의 모양을 한  원숭이들의 집단 괴성 쯤으로 들리는 피다한 말을  기록하여 언어 체계를 밝혀내 는 학문적인 부분이 있다. 두 부분에서 모두 그가 겪는 경험을 통해 내일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언어학자이면서도 그가 겪었던 피다한 사람들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고, 언어를 위해서도 그렇고 피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항상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성품에도 반하게 되는 책이 흔치 않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그리고, 이 작가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하나 뿐이던 남동생도 열 다섯 살에 잃었고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었다. 가정이 매우 불우한 청년이었다. 열일곱에 기독교에 입문했고 열 아홉살에 결혼해서 선교사로서 원주민부족에게 살러 들어갈 때는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 우리 나라의 청년이 이 상황이었다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그를 공부로 이끈 곳은 기독교의 선교사업단이긴 했으나 아이 셋 딸린 우리 나라 불우한 청년 같으면 어떤 한 분야에서 이런 정도의 학문적 성과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미국의 학계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을 돕는 시스템이 잘 발달된 덕분은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작가 개인의 노력과 성실함과 재능이 밑받침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받혀 주는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교육에 대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한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비교하게도 된다. 

 

번역엔 문제가 좀 있었다.  와/과 를 쓰임과 달리 잘못 적은 것은 번역기를 돌릴 때 일어나는 문제이거니와 번역가가 그렇게 하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류의 잘못이 많이 보인다. 번역이 문제가 아니라 교정하는 사람의 정성 부족인가 싶기도 하였다. 오자와 탈자가 상당히 눈에 많이 띄어 적어 두었는데, 출판사로 보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꽤 좋은 책인데 한국에서 출판사의 정성 부족이 옥에 티를 만들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