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민족지연구 쪽글 (5)-생애사와 구술사

자몽미소 2009. 10. 7. 22:02

민족지연구 

 

읽을 거리

제5강  생애사와 구술사

   -윤형숙, “생애사 연구의 발달과 방법론적 쟁점들,” <배종무총장 퇴임기념  사학논총>, Pp. 515-530, 1994.

   -유철인, “구술된 경험 읽기: 제주 4․3 관련 수형인 여성의 생애사,” <한국문화인류 학> 37(1): 3-39, 2004.

   -유철인, “물질하는 것도 머리싸움: 제주해녀의 생애이야기,” <한국문화인류학> 31(1):  97-117, 1998.

   -유철인,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하게 되었다: 생애이야기의 주제와  서술전략,”  <한국문화인류학> 29(2): 397-419, 1996.

  -유철인, “생애사와 신세타령: 자료와 텍스트의 문제,”<한국문화인류학> 22: 301-308,  1990.

   -한경혜, “사회적 시간과 한국남성의 결혼연령의 역사적 변화: 생애과정 관점과 구술생활사 방법의 연계”, <한국사회학> 27(겨울호): 295-317,1993.

 

 

글을 읽고 내 생각 쓰기


<생애사, 애닯은 것에 대한 애쓰기 >

한국학 박사과정 1학기 kmj 

 

1. 독자로서 울다.


텔레비전이거나 영화거나, 또는 문자로 표현된 것들이라 해도 누군가 오랜 이별을 하였다가 어떤 다행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매번 나는 가슴 저 아래서 뜨거운 것들이 북받쳐 올라옴을 느낀다. 감정과 눈물이 메말라버린 40 대 후반의 이 나이에도 누군가의 상봉 장면은 이별을 겪었던 이들의 슬픔과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바람에 그들을 느끼는 동안은 슬픔의 우물에 빠뜨려진 것만 같다.

유철인의 글, “물질하는 것도 머리싸움: 제주 해녀의 생애 이야기” 에서도 그랬다. 해녀 김순자가 어릴 때 헤어진 언니가 자신을 찾아온 날 언니를 보자마자 놀라서 부엌에 숨어 있었다고 이야기 할 때, 만약 그 여자 아이가 나였다면, 나는 부엌 구석에서 훌쩍거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과 함께 내가 읽고 있는 글이 논문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가슴이 마구 쿵쾅 거렸다.

문화인류학 강좌가 다섯 번째로 접어들었고, 이번 주에는 주로 생애사에 대한 논문을 읽었다. 그 중 해녀 김순자의 이야기는 자기 정체성 인식에 관한 연구로서 그녀는 제주출신이 아니면서 자기 마을에서 가장 물질을 잘하는 젊은 해녀이다. 해녀의 인구가 점차 노령화 되는 근래의 상황에 비추어 젊은 해녀 김순자는 돋보이는 존재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생애사를 접하게 된 연구자는 그녀의 이야기의 결과 결을 더듬으며 그녀가 겪은 생의 단면, 즉 어린 시절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겪게 되는 가족과의 이별, 새로운 가족의 형성과 그 이후의 결혼, 결혼 후에 보여주는 생의 고달픔과 의지까지를 생애사 관점의 논문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의 논문이라는 것이 한정된 독자들(주로 대학원학생, 인접학문을 하는 교수들)에게나 소비되는 이즈음의 행태를 볼 때 이번 논문읽기는 색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나는 이 논문에서 독자의 위치로서 이야기 주인공인 김순자란 사람을 만났고, 이 사람의 생애사에서 한 편의 소설만큼 또는 소설 이상의 울림을 받았다. 그녀는 사는 일이 주는 고달픔에 씩씩하게 대처했고 마음이 건강해 보였다. 그런 생의 태도는 그 흔한 자기 계발서의 지침보다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독자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고백하는 동안 그 행간에 스며 있는 생의 스산함을 읽어 내지만 곧이어 주인공이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임을 확인하고 안심하게 된다. 작가의 말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 것들은 독자에게 매우 인상적인 감동을 남기게 된다. 해녀 김순자는 자기 긍정의 힘으로 삶을 헤쳐 나가는 사람임을 본다. 다만 이 논문에선 논문의 글쓰기 방법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연구자의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건 연구자의 몫이고, 독자는 연구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볼 수도 있다. 연구자의 연구물은 독자에게 전해진 다음엔 연구자가 그은 한계를 자유롭게 넘어가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독자인 나는 <해녀의 생애 이야기>를 잘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전부터 점차로 어떤 학문도 어떤 연구도 사람의 삶을 배제하고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문학도 문화인류학도, 철학과 종교조차도 말해야 하고 보여주어야 할 것들의 지향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귄터그라스의 소설 <넙치>가 4,000년 동안의 인류 역사에 관한 말하기라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충돌>도 인류역사에 관한 말하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고 독자들은 취향에 따라 어떤 책을 더 재밌게 읽거나 지루하게 읽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인류학의 생애사 관점은 “문제적 인간의 문제적 행동”에 관해 말하는 문학이 추구하는 지점을 같이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른 것은 보여주기의 방식일 뿐이다.


2. 입장 바꿔 아프다.


생선의 물이 좋거나 나쁘거나 또는 생선을 써는 칼에 따라서 아니면 칼을 다루는 요리사의 손재주에 따라서 생선회가 달라지듯이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법으로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자가 얻는 것의 질과 양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생애사 기술은 매우 정교한 솜씨의 연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교하기만 하고 그 기술된 이야기가 이야기의 주인공을 배제해 버릴 때, 배제할 의도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배제하게 되었을 때 그 연구는 도덕성과 목적성에 관한 혐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내가 꼭 지키고 싶은 개인적인 목적일까? 아직 스스로 이 문제에 관해 크게 직면해 보지 못했으니 다만 관념적으로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일 뿐일까?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했다”를 읽으면서 나는 신세타령을 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내 앞에는 한국에서 온 지식인 남자가 앉아 있다. 둘 사이에 식은 커피가 놓여 있을까, 아니면 음악이 흐르는 카페의 둥근 의자에 기대어 앉아 와인을 한 잔 나누고 있을지도.., 하여간 그 장면에서 나는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그러나 전혀 행복하지 않은 그 여자가 되었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싶지만 자꾸만 일이 꼬이고, 자꾸만 나를 못 살게 구는 사람들 틈에 사는 것 같다. 살아온 내 이야기를 한다. 내 앞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에게 그때 그 일은 당신이 잘못 생각을 하였네요 라든가, 지금 그 생각은 앞으로 사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 위험해요, 생각하는 방법을 고치는 게 낫겠어요 라든가 이야기를 해 줄 것도 같지만 그는 그냥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말하다가 너무 내 개인적인 문제가 까발려지는 것 같아 이야기하길 그만 두었더니 그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 이야기 해 보세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한다. 그 다음 이야기를. 하지만 그 남자가 어쩐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강 이야기를 마치고 말았다. 더 속 깊은 이야기, 스무 살에 왜 고향을 떠나오게 되었는지, 지금 남편과는 실지로는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 내 앞에 앉은 저 사람도 남자고 한국 남자인데 더 많이 이야기 해 본들, 내 신세가 달라질 것도 없지 않는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내 이야기만 하다 보니 내가 입이 싼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고, 양공주였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말만 하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불편하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한국에 가서 소문내고 다닐 것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 이야기 했으면 되었겠다 싶어서 이야기하기를 멈춘다. 남자도 더 이야기 들을 게 없다든지 더 궁금해 하지도 않고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던 잔도 비었다. 그래서 이야기는 끝났다.

이 상상이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했다”를 읽으며 내 머리 속을 떠다녔고, 독자인 나는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겠다는 그 이야기를 글로 재생산시켜 보고 있다. 마치 범죄를 공모한 사람들처럼 그 여자에게 내가 미안해진다. 지금 이 글 또한 그녀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고, 연구자는 그 여자의 이름을 가명으로 했음에도 연구자의 연구물은 실지의 사건을 가지고 하는 것이므로 그녀와의 만남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도 어떤 여자의 아프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텍스트로 읽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 했다”라는 논문은 자기 생애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신세타령이라는 한국식 이야기 방식이며, 이 생애 이야기가 생애사란 문화인류학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얻는 결론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 논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자의 시간, 여자의 과거와 여자의 상처가 소비 되었다고 느낀다. 나는 그것이 아프다.

어제, 수업 시작 전에 이 문제에 관해 생각을 조금 하다가 미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쪽글도 쓰지 못한 채 수업에 들어갔는데, 토론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미군과 결혼했다”는 논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고, 이 논문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배제했기 때문에 독자로서 불편했고, 연구자였어도 불편했을 것이며, 만약 입장이 바뀌어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라도 한다면, 이런 연구에 화가 났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해 주는 학생들이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은 연구를 방해할뿐더러 연구자로서 자격이 없다거나, 왜 당신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를 하는 성격이냐는 비판도 받았다. 이 글을 쓴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으나 명쾌한 답변을 들은 것 같지 않다. 대개의 의견이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연구자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개입을 하느냐 또는 개입을 하고 나서 어떻게 글로 발표를 할 수 있겠느냐는 등, 계속해서 내 의견에 동조하는 말은 나오지 않고 내 성격이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는 데 방해요인이 될 것이라는 충고를 들었다. 조금 부드러운 충고라면 이런 식의 자기 고백, 자기 신세타령이 자기 치유의 한 방법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신세타령을 읽으며 느끼는 염려와 불안처럼 추측일 뿐이다. 실제로 그 여자가 그 후 좀 더 현명하여졌거나 덜 아프게 되었거나 자기 인식 방식이 건강해졌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이 글의 주인공에게 연구자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데 그녀의 사고방식, 삶의 태도에 내가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나친 개입일까? 그녀가 앞으로도 삶이 위태하다는 것은 나의 부정적인 추측과 염려이겠지만, 그렇다고 막연한 긍정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어제 이후로 이 문제를 줄곧 생각해 오고 있는데 어제 수업 때나 지금 이 글을 쓸 때나 내 마음과 생각을 상대에게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물어야 하는 질문,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라는 걸림돌이 앞으로 많은 일들 앞에 나타날 테지만 나는 내 생각의 앞에 이 걸림돌을 두려한다. 왜냐하면 이 생각의 걸림돌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나 자신을 밀고 나갈 우를 막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아니 되고 자칫 누가 될 일을 삼가고 싶기 때문이다.


3. 애쓰며 보다.


글쓴이를 비판하자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표현하고자 그래서 왜 내가 이런 일을 할까를 내 생각의 앞에 걸림돌로 두자고 바로 앞에 적어 두었는데, 2장의 글을 읽어보니 혹시 “미군과 결혼했다” 논문을 쓴 교수님이 내 글 때문에 힘들어하실까 괜히 염려가 된다. 만약 내 글이 상처가 되었다면 어제 수업 시간에는 무척이나 내가 미웠을 것이다. 말을 그만 하면 좋겠는데 나는 계속 이 논문을 물고 늘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교수님 말씀 중에 “연구자는 봐야 할 것을 봐야 한다” 했으니까, 준연구자인 대학원생으로서는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술된 경험 읽기: 제주 4․3 관련수형인 여성의 생애사”는 한 수형인의 삶을 통해 4․3의 다른 측면을 보게 해준 글이었다. 게다가 연구방법의 섬세함이 돋보여  1차 구술 자료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경험을 읽을 때 앞선 연구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재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인의 솜씨를 보는 것만으로 장인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앞으로 연구를 해야 할 게 있다면 이 방법을 선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를 8쪽으로 가르고 그 한쪽마다 슬라이스로 잘라내어 그 속에 스민 무늬와 맛을 파헤치는 연구자의 기법 같은 걸 이번 논문에서 보았다.

하지만, 끝에 읽은 한경혜의 논문은 조각낸 것들의 의미해석이 맛이 밍밍한 물을 여러 번 들이키는 느낌이 들었다. 한데 섞어 놓으니 도루 한 그릇의 물일 뿐 갈라놓고 해석해본들 읽는 이에겐 지루함을, 글 쓰는 사람은 독자가 애써 듣지도 않는 것을 괜한 노력을 해가며 말하게 한 것 같았다.  논문 끝에 달린 참고문헌의 정보량을 보고 있자면 논문이라는 게 사실은 간단히 한 문장으로 말할 것을 글쓴이가 이미 읽은 정보를 덧붙여 그럴 듯한 위엄을 부리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이런 폄하야말로 어느 날 나에게 곧바로 돌아올 부메랑 같은 것이라 함부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한국 남성의 결혼연령의 역사적 변화에 대해, 어제 수업 시간에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수강생 중에는 이 문제에 관해 특히 관심을 가질 것 같은 이가 있었음에도 결혼연령에 관한 논의는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었었다. 함께 읽었으나 관심을 받지 못한 글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간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남의 눈에 잘 안 띄거나 관심을 얻지 못하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넣는 것이므로, 글이 맛이 없다 하여 논문 자체를 비판해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겠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글쓴이가 글로 내놓은 이상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겠다. 이후 “보아야 할 것을 봐야 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도 함께 보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자신의 연구를 글로 만들게 할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시야의 좁음을 먼저 탓하고 노력할 일이다. 잘 안 읽히는 글을 읽으며 내 식견의 좁음을 먼저 인정해 본다. 그래도 솔직히 한경혜의 글은 싱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