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내 생각*
1. 직업이 교수인 남편
몇 년 전,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로 주민 운동에 동참했을 때, 해군 기지를 찬성하는 사람을 만나 그들의 언어와 맞닥뜨릴 때 참으로 난감했다. 잘못 하다가는 말싸움이 될 것도 같아 가만 있자니 어째서 사람들이 해군 기지에 경제논리를 덧씌워 찬성쪽으로 유도해 버린 제주도 행정의 과오을 보지 못할까 안타까웠다. 반대대책 위원회는 이윽고 주민 동의도 없이 해군기지를 들여오도록 한 김태환 지사를 소환하자는 데 동의, 김태환 지사 퇴진을 위한 주민 선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난항을 겪었다. 심정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주민 투표에 응하게 되면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힌다 하여 선거에 아예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더욱 놀라운 것은 제주대학교 학생회의 태도였는데 그때 나는 속상한 나머지 남편에게 도대체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쳤냐고 볼 멘 소리를 하며, 다른 것은 못해도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가르쳐야 할 게 아니냐고 몸 아픈 남편을 윽박지르기 까지 했다.
남편은 강의실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정치적 선동이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무릇 스승이라면 세상의 진실이 무엇인지 제자가 진실을 향해 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편 앞에서는 꽤 똑똑한 척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는 내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것에 젬병인데다가 대인공포증 비슷하게 그런 일에는 두려움까지 느끼는 나로서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는 남편을 의지해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다른 이들에게 관철시키고 싶었었다.
물론 그 일은 우리 생각대로 되지도 않았고, 그 도지사는 작년 선거에 나오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레 물러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옳다는 일에 있어서 내가 말을 하고 주장하고 설득하지 못할 때면, 남편을 등 떠미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하는 말은
"당신은 교수니까! " 이다.
2. 예전의 베버 팬, 그리고 어떤 강의
"네가 베버를 알아?" 라고 물으면 나는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한 사람이야!" 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나는 베버를 안다고 생각했다.
베버가 <만남>을 역설했다는 것은 교육 대학원에 다닐 때 교양과목으로 '교육사와 철학' 수업을 받을 때였다. 교육의 역사에 베버가 나타나서 < 교육은 만남이다> 라고 일설 해 준 결과, 우리의 교육은 한층 인간적이 되었다는 게 강의 교수의 말씀이었다.
그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매우 흡족했다. 옳지,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어야 해, 그때 대학원 수업을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선 교사였고, 교육의 현장은 교사와 학생의 만남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서양의 유명한 학자가 해 준 그 말은 마음에 더욱 단단하게 박혔다.
아니 나에게는 머리에 콱 박힐 정도로 베버가 멋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말도 어렵지 않게 해 주었지, 철학적인 말인 것 같은데도 어려운 단어도 안 들어갔지, 그래서 나는 베버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베버의 다른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교육사와 철학>은 베버를 강의한 후 바로 종강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10 여 년 동안 <베버= 만남> 이라고 공식처럼 외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주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게 되었다. 학자와 예술가는 자기의 삶의 길 안에 결코 실용적이랄 수는 없는 "몰입"을 하게 되며,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영감"이 나와 그것이 학문이 되고 예술이 된다는 말에 동의했다. 독서 초기에는 베버에 대한 전적인 신뢰 때문에 이 말은 태평양 건너 친구에게 까지 전해줄만큼 멋진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나는 이 책을 읽기가 힘들어져갔다. 연설문이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다독이며 내가 앞 페이지에서 읽은 게 무엇인가를 되새기며 읽어야 했다. 처음에 읽은 것은 범우사 문고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나서는 결국 다른 출판사의 책을 구해 다시 읽었다. 번역이 다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범우사에서 이해하지 못하던 내용이 문예출판사에서 번역한 책에서는 쉽게 이해 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종종 있어 어느 출판사 책 번역이 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최근에 나남출판사에서도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건 읽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출판사에서 많은 번역자들이 공을 들여 우리말로 옮겨 놓는 베버의 사상은, 번역이라는 이중의 걸름망을 못 본 척 하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공들여 본다면 어떨까. 번역이 걸리는 것 때문에 이 책이 어렵게 읽히는가 아니면, 그의 생각이 어려운 것인가, 그게 아니라 독일어가 원래 한국어로 번역하기엔 어려운 개념들을 갖고 있기에 글이 어려워져버렸는가.
독자에 따라서 이 책에서 발견하는 것이 사뭇 다를 것이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까지 베버의 팬이었던 것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어졌다.
우선 내가 그의 팬이라고 하기엔 나는 그의 책을 아무 것도 읽지 않았으며 그저 소문처럼 전해들은 이야기로서 팬을 자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만나는 첫 책 <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나는 10여 년 전 우리에게 베버를 아주 멋지게 전해준 그 교수는 진짜로 베버를 잘 읽었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그의 강의를 다시 기억해 봐도 <직업으로서의 학문> 에서 보이는 베버의 생각은 전해 준 바가 없었고, <교육은 만남이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유명한 서양학자 한 사람을 들먹인 게 아닌가 싶어진다.
3. 베버가 불편하다
내가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나온 여러 가지 생각 중에서 유독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 우리는 단지 교사로서만 강단에 서는 것입니다" 라는 말 때문이다. 그는 교사와 지도자가 별개이며 교사는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되고 학생들이어떤 가치와 사실에 대해서 분석을 하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했다. 옳다. 옳은 말씀이다. 그리고 베버가 예로 든 경우처럼 어떤 교사가 종교적인 자기의 신념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할 경우라면, 베버의 충고는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의 말이 옳긴 옳은데 이 사람을 나의 교사 또는 스승님으로는 대하고 싶지 않으니 이건 왜 그럴까.
나는 오랫동안 <지행합일>이야말로 숭고한 교육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생각의 자리는 베버의 가치관과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듯 "배운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교사와 지도자를 구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학생들을 멀찌감치 대상화 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그가 말했다는 <교육은 만남이다> 라고 한 게 그 사람이 말한 게 맞나 싶다.
배움에 관한 생각 중에 동의하는 또 하나는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 와 같은 우리 나라 속담에도 있다. 배운 사람은 보다 겸손하고 자기의 행동을 먼저 살펴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배운 사람들, 나로서는 능력이 안 되어서 들어가지 못했던 서울 대학교나 카이스트의 박사들이 자기의 연구가 미래의 세상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인 것 같아서 그들은 한 쪽 뇌만 발달한 기형인간이라고 안타까워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
특히 몇 년 전 사회적 반향이 컸던 줄기세포 문제에 있어서도, 줄기세포 연구가 결국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되지 않고, 돈 많은 이들을 위한 상품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생각에 그 서울대학교 교수의 잘난 얼굴이 무척 밉게 보였다.
카길이라는 농산업 회사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유전자공학 연구가 장차 미래의 식량 자원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라고 그들 스스로는 믿고 있겠지만, 사실 그들의 학문은 카길이라는 재벌회사의 자산을 키우고, 가난한 나라의 농민들의 삶을 짓밟는 것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내가 믿고 있는 <지행합일>의 " 지"나 <익은 벼의 겸손>은 인문학적이며 철학적인 것이지, 과학자가 축척하고 있는 지식과는 거리가 먼 "배움"이며 학문이다.
베버는 이 책에서 지식을 말할 때, 그리고 지식을 제공하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교수의 일을 이야기 할 때 <과학자의 지식>까지 모두 합쳐서 이야기를 했던 것인데, 나는 그걸 배제하고 베버의 강연을 듣고 평가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베버의 생각과 내 생각이 어긋났던 것은 "지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가치관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면서 달라진 "지"의 영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지행합일>의 믿음이 근대 이전의 가치관이고, 베버가 말하는 <지식>이 근대 이후의 지식이기에 생긴 균열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의실에서 베버가 도덕과 삶의 진실, 세상사의 굴곡을 포함하여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짐작하고는 그 다음 주제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기 싫어져 버렸다.
4. 베버를 다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나에게 베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공부하고 <교육은 만남이다> 라는 말을 베버가 했다고 했던 것일까 다시 궁금해진다. 그러려면, 베버를 미리 속단하지 말고, 다른 책도 직접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여전히 <동물농장>을 쓴 조지 오웰처럼 배운 것이 양심이 되고, 그래서 그의 글이 직접 몸으로 겪으며 깨닫는 것을 쓰는 것이라 좋았고,그런 글이야말로 울림이 있어 진정으로 그를 작가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교수가 아니지만, 교수는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작가여야 한다. 글 짓는 사람으로서의 작가 말이다. 그렇다면 교수에게 조지 오웰 식의 글쓰기를 원한다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런데 베버에게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베버의 한국말 번역 조차 믿을 수 없고, 베버를 배운 교수의 말도 의심이 되고, 학문하는 일에 대한 베버의 생각도 그리 탐탁하지 않으니 앞으로 그의 글을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일단 내 가치관의 허점을 고백하긴 했으나, 그의 책 <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으면서는 결코 혁명의 선두에 나서지 않을 남자, 이것도 저것도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남자, 동물로 치면 박쥐나 쥐, 사람으로 치면 눈치빠른 처세가 식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져서 그의 저서를 읽는 데 좀 애를 먹을 것 같다.
우선 왜 그를 읽어야 할지를 잘 모르고 있다.
베버를 모르면 사회학을 모른다는 말 때문에 안 읽으면 안 되어서 읽은 것이었지만, 첫인상이 이래 가지고서야 베버에 대한 태도를 바꾸긴 어려울 것도 같다.
(2011-3-17-목요일
원고지 분량 :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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