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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부족의 4월 독후감- 밀란쿤테라의 <불멸>

자몽미소 2011. 5. 12. 11:08

책부족의 독후감

 


불멸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0-03-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불멸을 향한 인간의 허망한 욕망!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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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을 읽고 내 생각 (1)- 참 유치한 독후감- 4월 26일

* 향연

소설 <불멸>을 읽으며 만찬에 초대된 것 같았다. 음미해야 할 문장들은 밑줄을 그었고, 두고 보고 싶은 작가의 말은 기록을 따로 해 두려 했다. 읽어도 또 읽어도 다시 음미해야만 할 문장과 사유는 계속 되었다. 성대한 만찬을 앞에 펼쳐들고 허겁지겁 읽은 글을 두 번째로 읽을 때, 작가가 소설은 향연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찾아냈다. 그의 말대로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을 위해서도 독자들을 위해서도 참 잘 차려진 향연처럼 보였다. 오늘 두번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덮었지만, 몇 달 후, 또는 몇 년 후에 아녜스의 상상을, 또는 작가가 그려낸 인물들을 다시 찾아 보게 될 거라고, 한 웅큼의 미련을 남겨 두고 있다.

 

그렇게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할 말이 참 많을 것이고 독후감은 참 길어지리라 생각했다.

 

*5차방정식 같은

 

오늘 오전에 남편과 함께 숲길 산책을 하면서, 남편에게 이 소설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부분은 <모호성>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가 아녜스를 모호성의 냉철한 관찰자 라고 구분하였을 때, 벌어졌던 한 사건, 폴의 무릎 위에 앉은 로라와 딸을 남편에게 말로 그려 보여 주었으나 그것은 그 모호함 덕택에 폴과 로라가 결혼하고 나서 금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섹스를 하는 것까지를 설명해야 했다. 또, 아녜스가 폴과의 결혼생활을 행복해 하지 않았고, 그녀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아버지 라는 것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아녜스가 좋아했던 <길>과 폴이 좋아했던 <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야 했다. 아녜스가 남편 폴과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으나 동생 로라는 형부인 폴을 강력하게 원하고 둘은 서로 잘 통했으며 그 때문에 아녜스는 남편에게서 더욱 더 멀어지고 싶었다는 것과 아녜스가 어릴 때 했던 상상, 즉 죽음의 사선에서 어머니에게 자식과 남편 중 셋이 아니라 하나나 둘을 고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지, 거기서 아녜스가 느꼈던 감정을 말해 주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녜스와 로라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골이 서로의 운명을 어떻게 할퀴고 있는지도 다시 말해야 했다.  모호성을 이야기 하려 했으나 그것은 자매간의 성격 차이와 부모의 성격과 결혼도 이야기 하게 하고, 타고난 성격이 인생 전체를 어떻게 쥐고 흔드는지로 이야기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남편에게 이야기 해 주어야 할 것은 끝이 없었다. 며칠 전에는 이마골로기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설명하다가 내 이해의 깊이가 얕음을 인정해야 했다.

 

숲길 초입에서 <불멸>의 한 부분, 즉 모호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한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고 드디어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잠시 쉬게 되었을 때도 <불멸>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남편이 아하, 그런 이야기였구나 했을 때는 " 아니, 아니에요.난 지금 이 소설의 십분의 일도, 백분의 일도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어요. "라고  해야 했다.

 

몸짓, 이미지,불멸에 대한 욕망, 동시에 소멸에 대한 욕망과 사랑을 대하는 방식의 다양함,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유럽의 역사, 운명의 문자반, 에피소드를 무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한 반대,  그리고... 또또..

 

그리고, 불쑥 소설의 등장 인물로 나오던 작가가 야네스의 상상과 루벤스의 상상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다가 폴이나 로라, 베티나, 그리고 다른 인물을 그릴 때는 관찰자 시점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 그래서 작가가 소설 말미에 폴을 만났을 때 슬퍼하는 모습은, 슬픔에 동감하는 하게  하는 게 아니라,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 당기는 순진하지만 노련한 소설가의 책략처럼 보이기도 했다. 즉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서 슬퍼하는 작가는 귀여웠지만, 소설 속으로 작가 자신을 끌어들이고도 이 복잡한 소설의 얼개를 꽉 쥐고 있는 작가의 노련함에 감탄 했던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동감하며 밑줄을 긋고, 서로 연관된 이미지와 몸짓의 반복이 음악의 변주와 닮았음을 눈치채고,제법 이 소설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책장을 덮고 난 지금 나는 독후감을 쓸 말이 없음을 고백한다.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이미지란, 칠판에 가득 쓰여진 3차나 4차나 5차 방정식(그런 게 있다면)을 친절한 수학 선생님이 다시 한 번, 또 한 번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설명하는 말이 어렵지 않았고 증거로 내 놓은 사례들은 마치 내 경험이기도 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불러세워, 내가 이해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혹은 조금 전 풀어놓은 방정식 문제를 다시 풀어 보라 그랬을 때, 내가 겪을 난감함, 나는 그저 아까까지는 이해했던 수학 공식의 얼개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막막한 칠판 앞에 선 학생이 바로 나라고 이야기 한다면 될까.

 

 *불멸 후에 남는 것

작가가 소설의 인물 중에 가장 애정을 쏟았던 인물은 아녜스와 루벤스였던 것 같다. 수영장 물 속에서  꺼내와 (인물의 창조) 독자가 그녀의 머리속을 함께 보도록 하였으며, 그의 정부였던 루벤스가 겪는 사랑의 역사도 그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게 함으로써, 수많은 여자와 연애질을 하였던 남자를 여자인 나조차 오히려 진심으로 동정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을 읽는 다른 이들에게는 누가 가장 잘 이해되는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루벤스가 여자들을 만나며 변해가는 생각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작가 덕분에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애정관을 가진 남자의 머리속을 구경했다.

 

그리고 나는 아녜스에서 비롯되고 로라에게로 건너가는 몸짓을 어느 날 문득 하고 싶어지리라는 것을 안다. 아녜스의 검은 선글라스와 로라의 선글라스가 각각 의미가 다른 물건이었듯이 내게 검은 선글라스는 레이저 수술 후에 심해진 눈부심 증상을 완화하려는 의료용의 기능이 더 큰 것이지만, 내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어떤 길을 걸을 때,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무척이나 흥미있는 상상이다. 아녜스와 로라의 검은 선글라스는 그 뿐만 아니라, 나도 그녀들처럼 어떤 우아한 몸짓 하나쯤을 내 것으로 하고 싶다는 참 웃기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가끔은 수줍음의 몸짓으로 또 가끔은 로라의 유혹하는 몸짓으로 내 이미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 보일까, 누구를 위한 몸짓이려는가를 생각하자마자, 소설을 읽고 주인공을 따라 해 보는 일은 참으로 유치한 독후감을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내 생각 (2)- 에피소드에 붙잡히다- 4월 27일

 독후감을 올려놓고도  밀란 쿤테라의 <불멸>은 내 마음의 집에서 나가지 못했다.

 공감하고 탄복한 소설인데도 독후감쓰기가 왜 어려웠을까를 생각하는 하루였다.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이 수많은 <에피소드>를 배열하고 엮으며 그 너무 많은 <에피소드>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의 큰 줄거리를 잡아 < 이 소설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야> 라고 간단히 말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레스의 시학은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 사이에 필연성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개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문학이론의 정석이 되었다. 하지만 밀란 쿤테라는 이 소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소설은 에피소드의 향연이어야 한다고 했으며 바로 자신의 소설쓰기에 적용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이미지로 기억한다. 루벤스가 지나간 여인들의 이름을 잊어 버렸듯이 나는 내가 읽으며 도취했던 문장들을 잊는다. 그러다가도 간혹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소설 전체 속에서 그것은 아주 미미한 이야기였을 뿐이었고 소설 전체에 가하는 힘도 적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게 남는 것, 나는 루벤스가 아녜스와의 기억을 일곱 장이나 여덟장의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그녀를 기억하듯, 일곱이나 여덟개의 에피소드, 그들이 내게 남긴 인상으로 이 소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중에서 아녜스의 상상 하나를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어린 아녜스가 침대 맡에서 했던 상상은 저격수에게 남겨진 아버지였다. 엄마가 셋 중 둘만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와야 했을 때 엄마는 두 딸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남겨둔다. 아녜스는 뒤에 남겨진 아버지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선택을 수용해야 하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녜스는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나를 25년 전의 겨울, 우리집 현관에서 내 딸과 헤어지던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 나는 내 딸의 장래를 두고 무엇인가를 상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솝 우화의 두 여자가 벌인 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한 아이를 가운데 두고 두 여자가 바로 자신이 그 아이의 친어머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솔로몬 왕은 두 여자로 하여금 아이의 팔을 잡아 당겨 아이의 어머니임을 증명하도록 하였다.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바로 아이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왕은 말했고 두 여자는 아이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서 잡아 당겼다. 아이는 팔이 찢길 것 같아 울부짖었고 비로소 한 여자가 아이의 팔을 놓아 버렸다. 아이의 팔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여자가  이제 아이의 어머니가 될 차례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왕은 아이의 팔을 놓아 버려 이 싸움에서 진 여자가 아이의 진짜 어머니라고 판결하였다. 친엄마만이 아이가 팔이 찢길 것을 두려워하기에 그렇다고 왕은 덧붙였다. 

   나는 그 즈음 딸 아이의 아빠와는 결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고 어쨌거나 딸 아이는 나날이 크고 있었기 때문에 조속히 내 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들의 팔을 먼저 놓아 버림으로써 아이 어머니의 권리를 포기하였지만 아이를 죽게 내버릴 수 없었던 여자의 심정처럼, 내가 딸 아이를 앞에 두고 딸의 아빠와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또 곧 닥쳐올 시간에 대한 상상도 했다. 25살의 미혼모로 취직의 희망도 없고 다만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 취업처럼 결혼을 하는 일 밖에는 나를 구원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던 시기였기에, 딸을 데리고 시집을 가든가, 부모님께 맡기고 시집을 가든가 뾰족한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서 눈칫밥을 먹이게 될 일도 딸에게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내 부모님께 맡겨 딸 아이가 내 어린시절을 반복하며 자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은 모처럼의 친정 나들이 때  엎드려 마루를 닦고 있을 딸,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가서 농약줄을 거두고 있을 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은근한 잔소리를 참아 내야 할 딸, 눈치가 빨라 항상 불안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살아가야 할 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장면을 상상했다. 딸이 자기 아빠에게로 가면 새엄마라는 적군 이외엔 모두 아군이라는 것, 할머니도 고모도  딸의 새엄마가 딸을 함부로 못하도록 감시해 줄 것이라는 것,  우리집에서 내 딸이 크는 것은 천덕꾸러기이겠으나, 자기 친가에 가서는 당당하게 자기 몫을 받아낼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딸의 손을 놓기로 했고, 1988년 1월 24일 아침에 딸은 우리집 현관 앞에 섰던 것이다.

 

28 개월된 딸이 물었다. " 엄마, 나 서귀포 갈 거야?"  서귀포는 내 친구가 살던 곳이었는데 그곳에 간다고 자주 말을 했었던가 뜬금없이 그렇게 물었고, 중학교 2학년이던 막내동생은 나 대신 딸아이의 손을 잡고 딸의 아빠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 외출은 우리 아버지와 막내동생, 그리고 딸아이 셋이 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아침 청소를 했다. 마루를 쓸려고 비를 들고 있었던 것 같다. 항상 하던 일이라서 그랬을 것이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빗자루를 잡았을 것이지만, 나는 딸 아이를 쓸어 내 버리려 했던가.

서귀포에 갈 것이냐고 묻고 그것을 좋아하는 얼굴이어서 나는 얼른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서귀포가 아니라 제주시에 있는 아빠에게로 가는 것이니까 좋은 일이긴 한 거라고 속으로 내 거짓말을 위로했다. 제주시의 어느 여관에 어제 저녁 제주에 온 아빠와 고모와 고모부가 있는 줄을 딸 아이는 모르고 있었고, 나와 우리 가족은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현관에 서서 마치 장난감 사러가는양  빠이빠이 손을 흔들던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았던 내 심정을 동시에 기억해 왔다. 그런데 오늘 그 장면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까지는  밝은 얼굴의 딸 아이와 신이 난 목소리의 딸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며 내 결단을 번복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내 마음이 이 그림의 색깔이고 구도였으나, 오늘 나는 그때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말이 생겨나면서 생각이 돋아 크고 있었고 그랬기에 자기 삶에 기억의 씨앗을 잉태하던 28개월된 딸 아이의 눈으로 나를 본다.

 

아이는 그날부터 갑자기 엄마가 사라졌고, 갑자기 달라진 사람들틈 속에서 자라야했고, 새로 만나 얼굴을 익힌 아빠조차도 새학기가 되자 자기 결을 떠나 버린 것을 견뎌야했다. 아이는 할머니와 산골집에 남겨졌고, 그제서야 아이는 마루를 쓸던 엄마와 자기 손을 잡고 어떤 방으로 가서는 자기를 넘기고 그후 결코 얼굴을 내밀지 않는 이모와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또 그들을 기다리고 울었으며 오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다가 종내는 살기 위해서 모두 잊어야 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새끼를 잃으면 소도 운다. 그 말은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으나 나는 가슴을 찢어발기면서, 피 흘리는 내 가슴을 들이대면서 대들고 싶었다. 아버지도 나를 한 번 버려보시지요! 아버지야말로  아버지 살자고 나를 버리실건가요?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으나 그 후로 나는 무슨 일인가 생겼다면 내 아버지는 어린 나를 버렸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좋은 의도였어도, 결과가 아무리 좋았어도 어린 아이가 겪는 몇 달, 몇 년의 고통, 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 내려앉아 전혀 기억의 모습으로는 떠오르지 않으나, 내면의 울림으로 늘 삶을 우울하게 하는 뿌리가 되었기에, 결코 버려지기 전의 명랑한 신뢰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아녜스의 상상은 결국 내 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였다. 아녜스의 어머니가 아녜스와 아버지를 남기고 로라만 데리고 가버렸을 때 아녜스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였으나, 내 딸은 아버지에게 자기를 보내버린 엄마를 생각할 때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불멸>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나는 아녜스의 상상편에 발목을 붙잡혔다.

갑자기 엄마를 잃고 세 살 된 내 딸 아이는 송아지처럼 울었을 것이나, 나는 그때  내 결단을 번복하고 딸아이를 찾으러 가지 못하였기에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 아이가 크고 나는 늙어가는 여자가 되었을 오늘의 시간이었다. 그때 내가 가장 길게 잡은 미래는 겨우 10년, 아이의 열 살 무렵일 뿐이었다.  장차 세상의 가치관이 바뀌고 미혼모에 대한 복지정책 같은 게 생겨날 줄도 몰랐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살게 될 줄도 결코 알 수 없었고, 지금처럼 딸이 어디에 사는지 알게 되었으면서도 이젠 너무 늦어 찾으러 가지 못하는 엄마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는 내가 마흔 여덟이 되고 딸이 스물 일곱이 될 날에 대해서는 죽음 이후의 시간처럼 알 수 없었다. 그랬으니 더욱 불안한 결단이었으나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나는 솔로몬 왕의 지혜를 너무 믿었던가.

 

  내가 그때 그렇게 결심했기에 딸이 아버지에게 가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믿는 날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게 남은 장면은 서귀포에 갈 거라며 좋아하던 세 살 아기이고, 아이를 속이고 있던 스물 다섯 살의 엄마인 나다. 이 장면에 스민 죄책감과 후회는 사라져가다가도 어느 틈에 뒤를 돌아 다시 내게 온다. 나 죽고서야 사라질까.  불멸과 소멸에 대한 소설 속 에피소드 중에서 유독 내 마음을 흔든  아녜스의 상상 에피소드는 내 25년 세월을 지우고 슬픔의 등에 불을 켠다.

책을 읽고 내 생각- 세 번째( 2011년 5월 12일)

 

 

어제 친구와 밤에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 달 책부족의 책 <불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었다. 친구에게 <불멸>에 대해 소개를 해 주어야 해서 말하다 보니까, " 이 소설은 " 아이러니"로 이루어졌어!" 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게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며 구조가 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 것이다. 밀란 쿤테라의 불멸은, 불멸하고자 하나 우스꽝스러운 불멸을 낳았던 인물이나, 소멸하고 싶어 도로에 나앉았으나  그 순간 세상이 자기에게 소리를 내는 것을 알아차리고 돌연 길에서 죽을 것을 포기하는 바람에 그녀와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킨 소녀,  그 소녀가 갖던 소멸의 욕망이 실패함으로써 아녜스의 꿈,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오던 긴 소망이 깨어지고 이 순환은 독자는 봤으나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고 작가와 하느님은 그 사건을 만들었으나 그 사건과 연관 되어 일어나는 다른 인물의 삶의 방향은 통제하기 불가능한 상황 , 한 존재와 또 한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인간 관계가 없었더라도 무수한 끈으로 타인이 나와 맺어지는 모습들이, 아이러니 가 아닌가, 그래서 그는 문자반이라는 팔자소관이라는 운명론을 끼어 넣으면서도, 그 또한 통제란 불가능하고 저들끼리 주고받는 우연으로 또다른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아침에 서민정과 향편님의 독후감을 읽고 동우님의 댓글도 읽고 나서 어제밤에 떠오른 생각을 얼른 적어 놓긴 하고 있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으니 오늘의 독후감도 인상비평, 불멸에 대한 감상은 앞으로도 내내 이어질 것 같다. 다 읽은 사람도 다 읽지 못하는 책, 불멸... 나로서는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드는 이 소설을 힘들어 하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읽으면 잘 읽을 수 있다고 안내해 줄 수도 없어서, 그저 나는 생각나는대로 끄적끄적하기만 하고 있는 아침. 아, 오늘도 나는 살아 났구나. 밥을 해야지. 이 생각말고는 더는 못해 독후감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