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내 생각
- 이 소설의 타미나는 조국을 떠나 조용히 살다가 어느 날 사라진다
이 이미지는 <불멸>의 야네스를 생각나게 한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결국은 일관성을 갖고 맺어져 있는 구조.
이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으로 인해 밀란 쿤데라는 교수직에서 박탈당하고 이후 프랑스로 건너와서 <불멸>을 쓰는데, <불멸>은 <웃음과 망각> 에서 변주된 소설의 교향곡이라 하겠다.
책 차례
1-잃어버린 편지들
2-어머니
3-천사들
4-잃어버린 편지들
5-리토스트
6-천사들
7-경계
책 속 밑줄 긋기
- 나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대비시키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야기를 꾸민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모든 것에 대답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소설의 현명함은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는 데 있다. (밀란 쿤테라)
1- 잃어버린 편지들
- 지금은 1971년, 미렉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 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말하곤 했다.
-방글라데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기억을 덮어 버렸고, 아옌덴의 암살은 방글라데시의 신음 소리를 가라앉혔으며, 또한 시나이 사막의 전쟁은 아옌덴 사건을, 캄보디아의 대량학살은 시나이 사막의 전쟁을 잊게 했다.
이러한 식으로 매사는 계속되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망각할 때까지 되풀이된다.
역사가 아직도 느릿느릿 진행되고 있었던 무렵에는 많지 않은 사건들이 쉽게 기억 속에 새겨져서 누구나 알고 있는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비슷한 문장이 <불멸>에 있지 않았나?- 할머니의 시대에는 세계의 가난을 할머니의 감각으로 알고 있었으나 현대는 바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골목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도 모르고 지나가며 뉴스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광고하면 이 세계가 그런 줄로 믿는다 든가 하는 이야기!)
그 배경 앞에서 개인의 갖가지 아슬아슬한 모험들이 감동적으로 펼쳐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역사가 성큼성큼 지나간다. 이제 역사의 사건이란 아침 이슬처럼 신선하게 반짝이다 다음 날 곧 잊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 사건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모험 그 자체가 되어 버렸고, 그 모험이란 모두에게 잘 알려진 개인의 진부한 사생활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 미렉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가 그녀와 정사 장면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 정사 장면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그녀 위에서 일부러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으며, 마치 주인의 슬리퍼와 싸우는 개처럼 할딱거리는 소리를 한참 동안 억지로 냈다. 그러나 자기 몸 밑에 깔려 있는 여자가 차분히 침묵을 지키며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다소 놀라워했다.
차 안에는 25년 전의 그 신음 소리가 울리었다. 그의 복종과 비굴한 헌신을 나타내는 참을 수 없는 그 소리는 그의 열의와 추종, 우스꽝스러움과 비참함을 나타내는 소리였다. 그렇다. 사실은 그러했던 것이다.
미렉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게끔 자기가 벼락출세에 눈이 뒤집힌 사람이라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 진실이란, 예쁜 여자에게 구애할 용기가 없어서 못 생긴 여자와 잤다는 것이다. 즈데나는 그가 당시 자신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드러내는 실마리였다. 그 의지박약함과 초라함이야말로 그가 숨기고 싶은 비밀인 것이다.
- 왜 그 여자 따위를 만나러 갔을까? 왜 그 편지들을 돌려 받으려는 생각 따위를 했을까?
그는 이번 여행의 어리석음, 우스꽝스러움, 유치함을 뼈저리게 자책하고 있음을 느끼었다. 그를 그 여자에게로 이끌어 간 것은 어떤 계산의 결과같이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억누르기 어려운 하나의 소망이었다.
먼 과거까지 팔을 뻗어서 그 과거를 주먹으로 산산조각 내주고 싶다는 소망, 자신의 청춘 시절이라는 그림을 칼로 찢어 발기고 싶다는 소망, 이제껏 억제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채워지지 못한 채 남을 격렬한 소망인 것이다.
- 미렉이 그녀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없었던 것으로 하여 그녀의 이미지를 지워 버린 것은 마치 당의 선전부가 고드발트가 역사적 연설을 한 발코니 위의 사진에서 클레멘티스를 말살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미렉은 흡사 공산당처럼, 모든 정당처럼, 모든 국민, 인간처럼 역사를 고쳐 쓰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따위로 외쳐대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미래란 다만 아무의 관심도 끌지 않는 무심한 공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는 생명이 넘쳐 우리를 못살게 굴고 도발하고 모욕하고 우리가 과거를 다시 고쳐 쓰고 다시 칠하게끔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는 과거를 고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미래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사진을 수정하거나 전기나 역사를 고쳐 쓰는 연구실에 드나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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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천사들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은 이상한 매력이 있다. 그러한 원은 태고적 기억의 심연을 뚫고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 나 역시 원 안에서 춤을 춘 적이 있다. 1948 년 봄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갓 승리하고 사회당이나 기독교 민주당 장관들이 외국으로 속속 망명길에 오르고 있었다.
- 우리는 거의 매달 그렇게 춤을 추었다-- 과거의 부정이 구명되고 새로운 부정이 자행되고 공장이 국영화되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의료비가 무료로 되고 담배 가게들이 압수되고 고참 노동자가 난생 처음으로 몰수된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출발했고, 우리는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발설하여 당에서 축출되었고 원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때 비로서 나는 원이 가지는 마력의 의미를 깨달았다. 줄에서 이탈한 경우라면 돌아올 수라도 있다. 줄은 열린 조직이다. 그러나 원은 단 한 번 닫히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에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의해 가차없이 멀리 날려지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행성에서 갈라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 밖으로 나와 버렸으며, 아직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원 안에 남아 있는가 하면, 긴 추락 끝에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잃어버린 원에 대한 말 못할 향수를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품고 있다. 결국 우리는 모든 만물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이 우주의 주민이기 때문이다.
6- 천사들
교향곡은 음악의 서사시이다. 교향곡은 무한한 외계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여행에 비교할 수 있다.
변주곡 역시 하나의 여행이다. 그러나 이 여행은 무한한 외계를 향한 여행이 아니다. 여러분은 파스칼이 <팡세>에서 무한한 거대함과 무한한 왜소함 사이의 심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쓴 것을 기억할 것이다. 변주곡의 여행은 그 또 하나의 무한, 모든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의 내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베토벤이 그의 변주곡에서 발견한 것은 또 하나의 공간과 또 하나의 방향성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변주곡은 또 하나의 여행에의 초대이다.
변주곡이라는 형식은 최대한의 집중을 요하는 형식이다. 그 덕택으로 작곡가는 본질적인 면만 다루면 되고, 사물의 핵심에 직행할 수 있다.
변주곡의 소재는 흔히 16 소절을 넘지 않는 <여행에의 초대-보들레르의 시> 테마이다. 베토벤은 마치 지구 중심에 이르는 광산을 내려가는 것처럼 그 16 소절의 내부 깊숙이 들어간다.
또 하나의 무한을 향하는 여행은 서사시적 여행보다 순탄한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원자의 신비로운 내부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베토벤은 하나의 변주곡마다 최초의 테마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서, 원래의 테마와 마직막 테마는 마치 꽃과 현미경으로 본 꽃처럼 판이하게 다르다.
인간은 태양이나 별들이 있는 우주를 품안에 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또 하나의 무한, 아주 가까이 있어서 손의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무한을 잃도록 운명지어지는 것 역시 견디기 어려운 일임을 안다.
타미나는 자기의 사랑의 무한함을 놓치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우리 모두는 뭘 하든지 뭔가를 잃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을 추구한다면 사물의 핵심까지 이르러야 하는데도, 우리는 결코 핵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외계의 무한함이 우리에게서 달아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감수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무한을 놓치게 되면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우리는 별들의 무한함을 깊이 생각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 속에 지니고 있는 그 무한함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그러므로 변주곡이 완숙해진 베토벤이 열렬히 사랑하는 형식이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베토벤은 타미나와 나처럼 우리가 사랑해 온 사람. 그 16 소설과 그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내적 세계를 잃은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가 변주곡 형식의 소설이다. 각 부는 하나의 여행 행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여행은 하나의 테마, 하나의 사상,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황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여행이뎌. 이에 대한 이해는 머나먼 무한 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은 타미나에 관한 소설이며, 타미나가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요, 그 내용을 듣는 주요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이며, 거울처럼 그녀의 인생 속에서 다시 모이게 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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