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짓과 말들을, 그들의 구체적인 몸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순수한 존재로 만들었었다.- 109 쪽
-그 자신은 모르는 사치를 내가 누릴 수 있기만을 바라며 나를 키웠던 아버지는 흐믓했지만,던홉필로 가구나 옛날 서랍장 같은 것은 그에게 내 성공을 확증해 주는 것 이상의다른 의미는 없었다. 이 모든 걸 요약하듯 그는 말하곤 했다. " 그럼 너희들은 당연히 누려야지!"
- Y 에 최초의 수퍼마켓이 나타나 온 시내의 노동 계층 고객들을 쓸어갔다. 드디어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친지나 손님들 앞에서 그는 내가 나이가 열일곱이나 되었음에도 아직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거북스러운, 아니 거의 부끄럼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내 또래의 소녀들은 모두 사무실이나 공장에 다니든지 부모의 가게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게으름뱅이로, 그리고 자신은 허세꾼으로 여길까 봐 걱정했다.
-그는 항상 내가 잘 배운다고 말했고, 공부를 잘한다 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겐 오직 두 손으로 하는 것만이 공부였다. 그에게 공부는 일상적인 삶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학기 중에 사범학교를 그만 두자 그는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자유의 문제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 알아서 먹이고 키워 주는, 그렇게 확실한 곳을 떠나는 것을 그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 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인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뻗대고 있고, 어머니에 대해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의미 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함을 느낀다.
- 문과 대학생이 된 내게 남아 있는 그녀의 이미지는 고함과 폭력이 사라진 정제된 것이었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그녀가 그립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는 친절, 거의 수줍음이라고 할 만한 것들, 여러 해 동안 나와 그녀의 관계는 떠났다가 돌아감의 반복에 머물렀다.
-가공의 존재로서의 어머니가 실질적 부재로서의 어머니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그 느낌이 아마도 망각의 첫 번째 형태이리라.
-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 책을 읽고 내 생각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마을 시대의 고향 마을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 이야기인 <남자의 자리>는 딸의 장래 직업을 중등학교 교사로 미리 점찍어 두었던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작가가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옷 주머니 속에서 꺼낸 것은 자신이 중등교사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는 신문기사 내용이었는데, 언제가 내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교사 자리를 그만 두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알렸을 때 아버지가 충격받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을 적어야 할 것이다.
어머니 이야기인 <한 여자>는 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내놓으려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다가도 버거워 하는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머니는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어째서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했는지 딸이 보기에 모순으로 느껴지는 어머니의 행동들은 그 저변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소설처럼 읽혔다. 아줌마가 된 이후로 대한민국 아줌마 파마 이외의 다른 머리를 해 보지 않은 우리 어머니는 어떤 여자였는가, 어머니의 삶을 이 책 속 어머니의 연대기와 함께 따라 그려 보니 어머니에게 나는 어떤 딸, 어떤 여자였는지도 궁금해졌다.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우리의 모녀관계를 확인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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