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내 생각
3년 전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간 후에 내 경험의 일부가 학문과 교차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다. 그때 한참 음식에 관하여 책을 읽고 있던 터라 고향 마을의 농업 환경 변화가 눈에 보였는데 그것에 대한 고민이 학문의 길로 접어들려는 내게는 용기있는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부모님을 인터뷰해서 농사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는 것부터 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남편이 관여하는 학술지에서 음식 문화에 관한 특집을 내기로 했기에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 인터뷰하고 정리하였고 그 내용에 관해 내 의견을 달아 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글을 학술지에 실었다. 논문을 싣는 그 책에 내 글을 싣자니 좋다는 사람도 있고 논문 아닌 글이니 책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거나 책은 나왔고, 내 글이 실린 책이니 교수님께는 드리는 게 예의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받는 수업이 문화인류학 수업이라 내 딴에는 그 교수님으로부터 지도 편달의 말씀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교수님의 한마디는 내 가슴을 쿵 때렸다. 뭐하러 가족 이야기를 이런 학술지에 쓰냐고, 정통 학문에서는 금기시하는 것이 가족 이야기라는 것과 써봐야 손해만 나지 이익은 없다는 식의 코멘트에 책 드린 손이 부끄러웠다. 책을 내놓고 후회막심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받아본 다른 교수님이 격려의 전화를 남편 앞으로 해 오셨다. 그 분은 인문학계의 박학다식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주강현 선생님이셨다. 주 선생님은 그런 살아있는 소재야말로 발굴하고 기록해야 할 것들이라며 그 책 중에서 내 글만 읽었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완강히 주강현 선생님의 칭찬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미 내놓은 글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이 바닥을 치고 온 상태라 주선생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꼴이 될 정도로 선생님의 칭찬은 나를 위한 배려로만 이해하려 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생각이 난 것은
이 프랑스 작가의 자신감, 자기 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경이롭게 다가왔기 떄문이다. (역시 나와는 다른 사람의 미덕은 사람을 매혹시킨다)
이 책은 내노라 하는 두 작가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질문하는 사람 쪽의 말은 줄이고, 주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에 관한 고백으로 채워졌다. 대담이라고 하지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닌 이 메일을 이용하였고 그 방식을 아니 에르노가 좋아했다는 점은 그녀의 일면을 이해하게 해 준다. 주제별로 나누어 그녀의 글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는 이 책을 통해 나와 글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한 것은 이 책의 소득이다. 분명히, 밑줄 쭉쭉 긋고 읽는 책은 내게 감동을 준다. 이 책이 그랬는데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만나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이 책에 내게 남기는 숙제와 감동은 여러 겹의 무늬가 되었다. 또한 이 책에서 언급했던 다른 작가들의 책들도 독서 목록에 기꺼이 끼워 넣는다. 누구보다도 먼저 도스토예프스키와 브르디외를 읽어야겠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은 책을 찾아봐야겠다.
칼 같은 글쓰기
책 속에서 밑줄 긋기
플로베르- 쓰고자 하는 작품은 매번 그 자신의 글쓰기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프루스트: 사방 벽 속에 고립된 삶 속에 하나의 출구를 뚫어주는 것은 지성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프에 대한 쓴 글 : 존재하기 위해서 산다? 하지만 하나의 관념을 위해, 하나의 희망을 위해, 하나의 변덕을 위해서조차도, 그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천 번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삶은 그에게 한 번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고 그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따름이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누군가 내게 “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 이 책은 바로 나에요” 라고 말할 때랍니다.
-주어진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난 글을 쓸 때 내가 단어가 아닌 사물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추상적일 수 있는 감정, 혹은 그와 반대로 기억에 떠오르는 장면이나 이미지처럼 구체적일 수 있는 것들과 만난다는 말이죠. 단어들은 내가 찾지 않아도 내게 오거나, 아니면 반대로 노력이 아닌 어떤 극도의 긴장을, 정신적 표상에 정확히 부합하기 위한 긴장을 요구합니다. 문장의 리듬에 관해 말하자면, 난 의도적으로 작업하지는 않습니다. 내 내면의 귀로 듣고, 옮겨 적을 뿐이지요.
-어쨌든 내가 앎의 한 방법처럼, 일종의 사명처럼, 마치 내가 그것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그것이 정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늘 가능한 한 더 멀리 가야하는 임무를 짊어진 양 글쓰기를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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