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안나카레니나1-3/톨스토이:자기심판과 자기용서에 관한 긴 이야기-2013년 책읽기

자몽미소 2013. 1. 10. 19:30

읽은 날짜: 2012년 12월 4일-2013년 1월 9일

 

책을 읽고 내 생각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카레니나를 읽어야했던 이유는 소설의 첫머리에 나온 이 문장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1권을 읽을 때까지 톨스토이는 어떻게 불행한 가정을 묘사하였고 행복한 가정의 비슷한 모습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눈여겨 보려하였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이 주어가 된 이 문장은 세 권, 1500 페이지의 분량으로 서술이 늘어났다. 한 달여, 책을 놓았다 펼쳤다 하며 나는 톨스토이의 "가정사용설명서"에 방점을 찍고 소설을 읽었다.

   각 가정의 여주인인 안나, 키티, 돌리의 가정을 들여다 보았고,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과 애인인 브론스키, 키티의 남편인 레빈, 돌리의 남편인 스테판을 문제적 인간으로 들여다보았다. 가정의 안주인과 바깥주인의 관계맺기를 보면서 최근 방송에서 자주 다루는 <남편이 달라졌어요, 엄마가 달라졌어요> 프로그램의 담당 피디처럼 각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가 가정 안에서 어떤 문제점을 만들어내는지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안나가 브론스키와의 만남 후에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역에서 만난 남편의 귀를 보고 못생겼다는 생각을 한 것이나 아들이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서술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 묘사는 첫눈에 반한 남자의  작은 불씨 하나가 안나의 가슴에 떨어졌을 뿐인데, 안나의 마음에선 벌써 배반의 칼을 베어든 상태를 잘 그려주었다. 안나의 가정이 곧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전조로 읽혔다.

   안나는 이전보다 더 남편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가정을 지키려는 남편의 요청을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말로 들었다. 이쯤에서 100년 전 러시아 귀족들의 가정과 연애와 사교계의 문화는 일부일처제 이외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비도덕이라는 가치관을 부여받은 현대독자에게 약간의 혼란을 안겨주었다.   

   나는 대체로 안나가 이래도 되는 건가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고, 장차 아이를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라든가, 가정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염려를, 안나보다 몇 살 더 나이 먹은 언니처럼 하고 있었다. 대체로 안나의 남편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여겨지지 않았고, 다소 재미없고 매력이 없을지 몰라도 신사적인 데가 있었다. 물론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가정을 지킨다는 쪽이지, 안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나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깨나 먹어버린 나로서는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기울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안나는 아들을 두고 브론스키를 따라 여행을 떠나 버린다.

  

   키티도 안나처럼 브론스키에게 반했지만, 브론스키가 매력을 느끼는 쪽은 키티가 아니었다. 키티의 상심은 병으로 나타나고 그녀는 요양을 하러 떠난다. 그곳에서 키티는 정신적인 성숙의 계기를 마련하고 온다. 키티에게는 참 좋은 아버지가 있었고 키티는 아버지를 신뢰하였다. 키티는 아버지에게 믿음을 준 레빈과 결국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가정은 현명한 아내의 모범을 보여준다.

 

   키티의 언니이며 안나의 올케인 돌리는 가정을 소홀히 하는 남편 때문에 항상 속이 상하다. 바람을 피우고 가정에서 쓸 돈을 잘 가져다주지도 않는 남편 스테판과 이혼을 결심해 보지만 그녀는 아이가 많고 남편 없이 독립할 처지도 못 된다. 그녀는 인내하는 여자다. 아이들 교육에 헌신하고 가정을 돌보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돌리는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릴 수도 있던 안나의 열정을 부러워하지만, 곧 자기 가정의 책임자로 돌아온다. 그녀는 가정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책임만 하는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주위 도움을 받으며 자기 삶을 지탱해 나간다.그녀는 남자에 대한 사랑보다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세 여자 중에 안나는 가장 화려하게 살았고 자기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았으나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되고 만 이유는 무엇인가. 소설 첫 문장이 제시하는 대로 각 가정에 내재한 어떤 문제들이 개인의 불행을 증폭시켰을까, 그렇다면 그녀들의 남편들이야말로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에 결정적인 존재들인가.

 

   카레닌과 브론스키는 매력의 농도와 색깔은 다르지만 카레닌이 매우 나쁘거나 부족한 남자는 아니다. 안나가 떠나고 난 후 카레닌을 흠모하던 백작 부인이 연인으로 나타났으며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좋았다.

브론스키는 자칫 바람둥이가 아닌가 싶지만 그는 타고난 매력이 많은 사람이고, 안나에게는 충실했다.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는 안나에게 모든 걸 내주려 한다. 다만 자신의 자유가 너무 침해 받지 말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안나와 충돌이 일긴 했지만 그럴 때도 예의를 갖추어 안나를 달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군인의 길보다는 사랑을 선택한 남자다.

   돌리의 남편 스테판은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다든지, 가정보다는 사회생활에서 재미를 더 느끼는 남자이지만 가정을 버릴만큼 연애를 한다든가, 그것에 빠지지는 않는다. 인생 재밌게 살아보자는 주의자로서 아내와 만들어가야 하는 가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질 뿐 사회적 지위나 경제 문제에 민감한 남자다.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도 않지만 사람좋은 사회성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 그러니까 결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

   남자 중에 가장 문제가 많아 보이는 사람은 레빈이다. 그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자기 이상과 현실이 서로 갈등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사색하고 연구하고 비판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는 브론스키나 스테판, 카레닌과는 사뭇 다른 경험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위의 세 남자가 땅 위에서 어떻게 실패하지 않고 자기 영역을 확보하면서 살아가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레빈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세계의 미래와 자기가 밟고 있는 땅의 생명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그의 고민은  그의 삶을 힘들게 한다. 그는 키티와 결혼하고 나서도 작고 사소한 문제에 걸려 괴로워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보려하고 해결점을 찾으려 하나 그에게 다가온 결론은 죽음이다. 그는 자살을 꿈꾼다. 

 

   죽음은 안나에게 왔다. 그녀는 브론스키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죽음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안나는 기차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자주 악령의 지배하에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물리치지 못했고,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려 사악한 마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랑을 위해 가정과 아들을 버렸지만 자기 사랑에  불안의 씨앗을 함께 심어 버린 안나는 점점 커져버린 자기 모멸감 때문에  스스로를 죽였다.

   죽음을 생각했던 레빈은 총으로 자살하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매지도 않았다. 그는 키티가 마련해준 행복한 가정 덕분에 확고하고 분명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상은 인류와 러시아와 자기가 사는 마을과 농촌 전체의 도움을 위해 있었으나 그 실행자체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는 자신이 해 왔던 것들을 계속 해야 한다고 알았고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과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이런 게 믿음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믿기가 두려웠다. '나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는 북받쳐오르는 흐느낌을 삼키며 두 손으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레빈의 이런 깨달음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으로 보인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나 선이, 어떤 이에게는 인류 구원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이유가 된다고 할지라도 자기 삶에 대한 심판은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자 했던 처음의 독법은 다소 빗나간 점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레빈, 두 주인공을 통해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자기 삶을 돌아보는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미덕이다. 그러나 자기 삶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자신이 자초한 불행의 용서를 허락하지 않는다. 신의 가르침은 세상 잘못의 시작을 <내 탓이오>하라고 하였지만, 용서를 모르는 신이 있어 < 내 탓> 뿐인 인간을 불행의 늪으로 밀어버린다면 자신을 구할 인간은 없다. 안나는 그 생각의 늪에 자기를 버렸다. 안나는 그 늪에 자기고통을 버렸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끌어올렸다. 안나는 그러길 바라며 죽었다. 브론스키로 하여금 생의 시간동안 자신과 같은 <내탓>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레빈은 자기 삶의 목적이 실행하기 어렵다는 걸 그대로 인정했다. 자신의 모자람을 받아들이고나서 살던 모습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후, 그는 하느님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자기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한 곳에 우리 삶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키웠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이유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꼭 어떤 잘못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게 된다. 살거나 죽거나의 결정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은 일이란 오늘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푸른 창공이 왜 거기에 있는지 묻기보다는 푸른 하늘이 있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 삶은 기쁨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100 년이 넘는 시간 동안이나 불행하려는 사람들에게 레빈의 각성을 선물했지만, 여전히 안나는 살아나고 다시 자신을 죽인다.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에게서 나를 보았다. 자책하며 자멸하려는 속성이 나에게 있다. 나는 또  레빈을 본다. 그리고 자주 회한의 늪으로 빠지는 나를 건져 올리며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 넝마 같지만, 행복한 사람의  마음은 단정하다. 매사에 감사하라는 신의 가르침으로 단정히 마음을 닦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