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가상의례-篠田節子・2014년의 책읽기

자몽미소 2014. 10. 14. 16:45

 

 

*책을 읽고 내 생각

- 천주교 신자가 되긴 했지만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은 내 생각과는 배치된다. 천당과 지옥이라 나누어 사후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와 닿지 않는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태어나고 자라다가  운이 좋으면 자손을 낳고, 늙고 죽는 과정을 밟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전생에 의한 윤회를 한다는 불교의 이야기나,  여호와의 증인이 이야기 하는 천년왕국 예수의 재림에는 거부감이 든다. 사람의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하늘을 떠도는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 땅 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이 아닌가생각한다. 가족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존재, 그것이 영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사후 세계에 관한 이야기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이스라엘에서 나신 여호와만 있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는 신이 있어서 존재한다기 보다 사람들이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종교가 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유일신을 믿어야 할 가톨릭신자이긴 하지만 다신교 신앙 신자가 될 것이다. 그동안 성당에 나간 것은 어떤 기분이 취해, 신성한 장소가 필요하거나 미사 때 부르는 음악이 좋아서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작년에 일본에서 1년 체류하면서 성당이 근처에 없으니까 일부러 성당을 찾지 않았고 일 년 내내 한 번도 주일 미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올해 봄, 돌아오고 나서는 성당에 가지 않는다. 어느새 나는 다시 무신론자의 이성으로 냉담자가 되어 있다. 종교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고, 가톨릭을 비롯해 모든 종교단체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신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내 어머니가  마을 수호신인 '당할망디' 에 가서 빌다가,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에 가서 촛불을 켜는 것까지도 신성한 종교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하는 동안 어머니의 마음에 일어난 경건함이야말로 신이 아니겠는가. 내가 가톨릭신자로서 주일을 지키고, 거기서 미사에 참여할 때도 신이 있을까? 내가 나를 비추어 볼 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마지못해 갈 때도 허다하고, 미사 내내 딴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미사 시간에 만나는 하느님이 내 앞에 앉은 신자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같은 종교에 다니면서도 신자들의 마음에서 그리는 신은 제각각이라는 게 또한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다종교 이상으로 인간의 수만큼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하듯이 그들의 마음이 바라보는 신도 그 마음만큼이나 다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우리 부부가 지난 몇 년 동안 조금씩 공부해 온 것도 종교에 관한 것이라 이 책은 흥미를 끌었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 키류씨, 종교의 시대입니다. 세계는 변하고 있어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구였고, 거짓이라고 믿었던 게 진실로 바뀌고 있어요. 실제로는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의 개념에 인간이 목숨을 던지고 있어요.  인간의 모든 불만이, 욕망이, 희열이, 희망이 이런 형태로 힘을 가진 거예요"

- 책 1권 32쪽,

 

이 소설은  직장과 가정을 잃어 위태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두 남자가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건을 계기로 의기투합하여 신종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사고 뉴스를 보면서 두 사람은 삶의 진실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사람들을 모은다면, 비지니스로서의 종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 실업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허업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실업쪽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건 바로 허업입니다."

" 게임이든 소설이든, 아니 금융이나 행정까지도 잘 생각해 보면 허업이야."

" 그 꼭대기에 있는 게 종교입니다."

 -중략-

 신자가 서른 명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 5백 명이면 벤츠를 타고 다닌다. 종교를 일으킨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3백만 엔만 있으면 누구나 사업을 벌일 수 있지만 이익은 그리 쉽게 올릴 수 없다. 하지만 종교는 다르다. 밑천은 교의라는 지적 재산 뿐. 아무리 벌어도 종교활동에 의한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붙지 않는다. 모든 지적 산업, 서비스 산업은 허업이다. 신앙이라는 상품을 파는 제 4차 산업, 그것이 종교인 것이다.

길고 긴 불황 속에서 어른들은 막연한 불안과 앞뒤가 꽉 막혀 있는 듯한 폐쇄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고, 젊은이들은 삶을 따분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종교만큼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사업은 없다.

-책 33-35쪽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쓰는 단어지만 허업(虛業)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이미 널리 퍼진 단어라고 한다이 소설은 눈에 보이는  실업(實業)의 시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虛業의 시대로 바뀌는 세상에 맞서 실업가(失業家) 두 사람이 허업(虛業)인 종교를  통해 실업가(實業家)가 되려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종교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든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전개해 나가더니 새로운 종교에 모여드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해 가면서 스토리의 힘은 단단해진다. 상권 마지막에 오면 작은 불협화음 속에서도 무난히 지반을 닦아 신자는 7천명 까지 증가한다. 하지만 조금씩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위기는 하권에서 위기의 절정을 맞는다. 2년 반 사이에  급속도로 교세가 확장되다 보니 이 교단을 먹어 삼키려는 집단이 생긴 것이다. 그들의 손아귀에 먹히냐 마느냐의 싸움에서 그러나 자기 중심을 잡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찰나, 일은 더욱 복잡한 상태로 나아간다. 그들을 위협했던 집단은 정치 권력으의 힘이 작용하여 일망타진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교단 내부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폭탄을 안고 있는 듯 이도 저도 못하는 위기의 마지막, 소설은 어떤 해결도 보여주지 않고 점점 기괴해지고 있는 종교집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주의 가르침을 진실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거대한 핵이 되어 애초 이 종교를 창설한 교주를 주변인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제 비지니스로서의 종교를 생각했던 주인공의 이성적인 판단은 힘을 잃고 신앙이 바로 삶이 되어 버린 인간들은 새로운 모습의 종교를 만들어가게 된다. 또한, 이 종교에 딸과 동생을 잃었다고 여기는 가족 집단의 끊임없는 박해가 시작된다. 교주로서는 안과 밖에서의 시련기를 맞게 된 것이다. 교주는 드디어 자신의 비지니스를 파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해결의 힘이어야 할  주인공의 이성은 신자의 광기앞에서 맥을 못 춘다.  소설은 이 즈음에서 급속도로 내리막을 향해 달린다. 어떤 파국을 맞을 것인가. 이야기의 흐름이라면 모두 광신의 상태에서 자결을 하거나 하여 종교의 위험한 질주에 대해 쓰지 않을까. 그런데 소설은 전혀 다른 반전을 준비중이었다.

   이 종교의 거듭나기였다. 진실한 삶을 찾는 동안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자기 구원의 새장면을 맞는 것으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시작은 사업이었으나 결국은 종교가 되는 과정, 이 소설은 신종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다양한 곤란 속에서도 스스로 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일단 손에 잡았더니 놓지 못하는 책' 이라고 해야할까, 2박 3일 동안 책에 폭 빠져 읽었다. 한 권의 600쪽이 넘는 장편 두 권이었으나 잘 읽히는 문장이었다. 게다가 인물 묘사의 예리함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한층 높여 주었다. 저자가 남성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주인공인 마사히코의 내면을 잘 그려 주었다. 사람을 대하면서 교주가 말해야만 하는 처세로서의 언어와 달리 마사히코의 속마음을 읽는 것은 독자만 가진 특권이나 되듯이 읽는 재미가 좋았다.

  현대 일본 사회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도 읽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유교문화권에서 이어진 가족주의가 소통 불능으로 곪아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가족만이 인간 삶의 기본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대사회. 가족이 썩고 개인들이 위험해지고, 사회가 불안해지고 국가와 세계가 불안해졌는데도, 문제 해결의 장소가 가정이어야 한다는 오랜 믿음이 얼마나 무모한가도 보여준다. 

 

  "소설은 인간의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고 그걸 그린 문장은 잘 읽혀야 한다" 생각해 오던 차에 사람과 환경의 문제를 제대로 파헤친 소설을 만났다.

 

시노다 세츠코(篠田節子)의 소설이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작년 한 해 일본의 서점을 돌아다니면서도  이 작가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작가와 책이 내게로 온 느낌이었다. 지난 9월 여행 때 묵었던 호텔의 서점에서 <장녀들> 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살짝 들쳐 보았는데 뭔가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방으로 돌아와 읽다 보니 인물 묘사가 마음에 들었고, 이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쉬지 않고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하찌오지시의 친구들에게 이번 여행에서 구입한 책을 알려 주었더니 그 중 한 친구가, 이 작가가 자기 친구라고 하는 것이다. 작가 소개를 보니 우리가 살다 온 하찌오지시의 시약소( 시청)에 근무했던 경력이 눈에 띄었다.  하찌오시시의 시약소라면 보험증 등을 만들기 위해 서류를 준비하고 방문하기도 했어서 그  장소의 어느 곳에서 일하고 있었을 작가를 그려 보는 일은 소설의 인물을 상상하는 것과 같이 묘했다. 작가는 시청 직원의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 수상 경력도 화려하였고, 미야베미유키 등과 문학수업을 같이 받았다고 하니 나만 모르고 있었지, 우리 나라에도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책 주문 때 번역된 <가상의례>를 넣었다. 배달이 늦긴 했지만 지난 주 금요일에 책이 도착했다. 토요일부터 읽기 시작했고 어제 밤에 다 읽었다. 다음은 일본어 원문이라 좀 오래 걸리겠지만 <장녀들>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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