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아들의 방

자몽미소 2017. 5. 13. 14:08

 



2017년 5월 11일 목요일, 문화공간 남문에서 보다.

아들의 사고는 매우 짧은 영상으로 처리되었다. 왜 그런 사고가 났을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남은 가족의 혼란을 더 많이 다루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다이빙을 갔다가 사망하였다.  바다 동굴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아들이 호흡곤란 끝에 죽은 것이다.  이 사고의 원인을 산소통의 기계 결함으로 의심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일요일 아침에 아들과 함께 달리기를 하러 나가려던 약속을 지켰더라면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다이빙하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기며 그의 죄책감은 깊어진다.  엄마는 아들이 죽음 직전에 동굴 안에서 손톱이 다 뭉개지도록 탈출하려 했었다는 것에 아들이 겪었던 죽음의 공포감을 공유하며 힘들어 한다. 오빠의 죽음 이후 여동생 하나만 침착하게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일상이 흐트러지기는 가족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는 아들의 죽음 이후 이 가족이 각각 겪고 있는 고통을  담담하고 꾸밈없이 보인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그들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 속으로 잔잔히 흘러들면서 아픔은 증폭된다. 가족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의 가슴은 겪어보지 않고 어떻게 다 알 수 있으리.  그것도  어린 나이에 죽은 자식을 떠나보내야 할 때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 버린 가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과 동의어의 삶이 남는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흘러간다.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은 곧잘 그들이 자식 잃은 부모라는 것을 잊어 버리게 되고, 오히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자기네와 함께 잘 지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므로 영화의 아버지에게는 정신과 환자들을 도와야 할 의사로서 자기의 고통이 환자의 고통보다는 커서는 안 되는 것이 요구된다. 진료를 받으러 그를 찾아온 환자들은 예전처럼 자기 아픔만 말하고, 의사는  그들을 수용하여야 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진료실의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이기심을 목격하게 한다. 보는 이가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인 아버지는 의사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애를 쓰지만,  자식 잃은 아버지로서 그도 결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만다. 그 또한 정신과 의사가 필요한, 무너지기 직전의 약하디 약한 환자가 된 것이다.


어떤 개인에게 놓여진 최고의 불행 앞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고통을 먼저 말하고, 먼저 보이려 하며, 먼저 위로받고자 한다. 영화 <아들의 방>은 세월호 사고를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조롱하며 아무 말이나 해대던 사람들도 떠올리게 하였다. 무례나 무감각이라고 하기 보다 인간이 아니다 싶었던 사람들의 말이 징그럽게 기억났다. 그리고 또, 오래 전 내 아이를 보내던 날과, 만나지 못하던 날들의 기억을 겹치며 영화를 보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이는 알아볼 수 없는 그 슬픔이 내 것만은 아니며, 세상 구석구석엔 슬픔을 감추고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는 자식을 잃은 아픔과 그 후의 슬픔을 보여주지만, 그 고통의 동굴을 빠져나오는 아주 작은 길도 보여준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태워 밤새 국경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아침을 맞는 세 명의 가족이 비로소 웃는 모습에서 가까스로 마련한 새 길이 보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만 가슴 한쪽이 뻐근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