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서원 출판사 堂山書院/남양섬에서 살다

남양 섬에서 살다/서평-남양군도의 조선인/이명원

자몽미소 2017. 11. 18. 14:30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9581.html#csidx39fe6b1d5bf0536813afa798eee5704 
남양군도의 조선인 / 이명원

등록 :2017-11-17 17:42수정 :2017-11-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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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남양군도는 오늘날 미크로네시아로 불리고 있다. 많은 섬들이 태평양과 적도를 향하여 진주알처럼 펼쳐져 있는 군도이다. 미크로네시아연방이나 마셜공화국처럼 형식상 독립한 군도들도 있지만, 사이판이나 괌의 경우처럼 현재 미국령인 섬들도 있다.

남양군도로 불렸던 시기는 1차 대전 직후 일본이 독일령이었던 이곳을 위임통치하게 되는 시점부터였다. 1945년까지 일본은 이 지역에 남양청을 설치해 사실상 식민통치를 해나갔고, 태평양전쟁 직후부터는 동남아시아 침략 등 남진론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최근 출간된 조성윤의 편저 <남양섬에서 살다>(당산서원)를 보면, 조선인들은 일본이 위임통치를 시작한 직후부터 남양군도로 노동이주를 했음을 알게 된다. 시모노세키에 있었던 니시무라 척식(拓殖)회사가 ‘지상낙원’ ‘별천지’라며 전라도 광주에서 90여명을 모집하고, 뒤이어 북선(北鮮) 출신이 2진으로 입도해 5년 계약으로 일한 것이 남양군도와 조선인들의 최초의 만남이다. 뒤이어 오키나와현 출신의 노동이민이 대거 이뤄지고, 태평양전쟁기에는 조선인 강제연행이 이어진다.

<남양섬에서 살다>는 1939년 남양무역주식회사에 입사해 야자농장 관리원으로 일했던 전경운의, 판본이 다른 두 권의 회고록을 조성윤이 발굴·입수·교열을 거쳐 출판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오산학교, 일본의 동경고등척식학교를 졸업하고 사이판섬이 있는 마리아나제도에 입도했다. 여러 섬에서 야자농장 관리원으로 일하면서, 일본인, 오키나와인, 원주민인 차모로인들과 야자유의 원료인 코프라의 가공·수확에 종사했다. 일제의 패전 이후 사이판에 있던 1400여명의 조선인들은 조국으로 귀환했지만, 그는 사이판에 남아 여생을 보내면서 이번에 출판된 자서전을 남겼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일제하 남양군도에 입도한 조선인들의 구체적 생활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일본인·오키나와인·조선인·차모로인 간의 식민주의적 위계에 따른 갈등 양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적 다수인 원주민 차모로인들은 회사의 경영자이자 지배자인 일본인들에 의해 노동과 자유를 억압당한다. 일본인이라 말하지만, 그 안에는 오키나와인과 조선인 같은 일본 안의 이족(異族)들도 있어, 이들 간의 갈등·협력·제휴의 양상이 긴박하게 서술된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에는 일본의 해군과 만주에서 전출된 관동군이 배치되면서, 군·관·민 총력전 체제가 구축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민족 간 갈등의 양상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민족별로 격리 수용된 사이판의 포로수용소에서, 전경운은 1400여명에 이르는 조선인 자치회의 사법주임으로 일하기도 한다. 포로수용소에는 경상도 70%, 전라도 20%, 제주도 7%, 충청·강원 3% 비율로 출신지역이 다른 조선인이 있었다. 점령 미군 중에는 하와이 이민자 2세 출신의 한인 병사들도 있어 민간 포로들과의 중계역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6년이 되면 포로수용소의 조선인들은 조국인 한반도로 귀환하는데, 전경운 등 차모로인과 결혼한 소수의 조선인들 혹은 여러 이유로 조국 귀환을 꺼렸던 몇몇 조선인들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저작인 <남양군도>(2015)나 인도네시아의 조선인을 다루고 있는 우쓰미 아이코, 무라이 요시노리의 <적도에 묻히다>(2012)와 함께 읽으면 좋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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