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설이

자몽미소 2020. 6. 15. 21:01

독후감

<설이>, 어린 영웅 이야기

 

오래전에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심윤경의 <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었다. 소년이 주인공인 이 소설은 소년이 가족과 겪는 어려움 속에서 주변 인물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한 것으로 “성장소설”이라고 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는 어린 소년에게 감동을 했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책 두께 이상으로 내 마음도 두터워진 것 같았다. 그 후 작가의 다른 책 < 달의 제단>도 구입해 읽었다. 하지만 그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그게 2004년도의 일이다.

신문의 책 소개란에서 <설이>를 봤다. 작가의 이전 책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후 17년 만의 성장소설이라고 했다. 신문광고의 문장이 마음을 끌었다. “가족이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이다.” 나는 가족과 성장이라는 두 단어에 이끌려 <설이>를 읽었다.

 

주인공 설이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보육원의 원장이 발견하여 키웠다. 설이는 몇 차례 좋은 가정에 입양되지만 결국은 그 가정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설이는 지금 열세 살, 입양되어 갔다가 세 번째로 파양되어 온 일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설이의 친엄마가 왜 이 아기를 버렸는지에 관한 것은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이이고, 세 번씩이나 파양되어 온 아이지만 설이는 불행하지는 않다. 설이의 주변 사람들은 선한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설이를 돌보는 이모, 아플 때마다 찾아가는 곽 선생, 설이가 존경하는 보육원 원장이 모두 따뜻한 어른들이다. 설이가 입양 때마다 파양되지만 그건 우연찮은 일들이 겹친 게 원인이지 설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세 번째로 입양되어 갔던 곳 또한 외국인 가정이었는데, 설이가 그 가족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외국인 가정의 냄새에 설이가 적응하지 못하여 토하며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이나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일 때, 설이는 몹시 아파 버리거나 아무 말도 안 하는 “함묵증”의 상태가 된다. 설이의 몸에 일어나는 이러한 증상은 어른들로 하여금 설이를 보호하도록 만들어준다. 설이는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아이지만 주변사람들은 설이를 위하여 여러가지 노력을 한다.

 

이 소설은 탄생의 우여곡절을 뛰어넘고 성장기의 어려움을 극복한 영웅 설화의 구조를 닮았다. 설이는 쓰레기통에서 주워왔지만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아이다. 그러므로 6학년 한 학기를 남기고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과외라고 받아본 적도 없는 설이가 영어면접을 치러내고, 중국어 수업을 따라가는 모습은 과연 이 아이는 천재가 아닌가 싶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학급 아이들보다 결과가 우수하다. 설이는 또, 학급의 반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냉정한 시선 속에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지지 않을지, 미리 내다보고 대응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마치, 옛이야기의 훌륭한 주인공과 닮아 고난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무슨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설이는 자신을 보호할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 소설을 예전 소설의 주인공 동구를 생각하며 썼다고 했다. 동구가 어른스럽게 잘 큰 어린이였지만 행복하였을지 어떨지 몰라 미안하였기 때문에, 이번 소설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잘 지켜내는 어린 소녀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이다.

 

설이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자는 보육원에 온 설이가 다른 애들과 달리 배꼽이 세로로 반듯하기 때문에 어떤 인생도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었다고 고백한다. 세로로 길쭉한 배꼽은 영웅설화의 주인공들이 몸에 지니게 마련인 표시처럼 읽힌다. 설이는 갓난아기 때부터 자기를 봐 온 이모를 아무 의심없이 믿는다. 가장 편안한 자리, 그래서 마음대로 짜증을 부리고, 무시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설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너무나 바보스럽게 다 믿어주는 어른이며 위탁 가정의 자격이 안 되는데도 자신을 맡아 키워준 이모를 가장 아름다운 어른으로 여긴다.

진짜 부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자식들과 만나야 하는가. 아이들에게 가정은 어때야 하는가. 작가는 주인공 설이를 통해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불우한 어린이로 대표되는 설이는 자신의 환경에 기죽지 않고 어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겨우 열 세 살된 소녀가 이 세상을 향해 달겨들어 예리한 감각으로 어른들이 숨기고 있는 것들을 파헤친다. 그런데 소녀보다 40여 년을 더 많이 살아온 나는 세상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열 세살 소녀의 느낌과 생각에  감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세대가 이렇게 차이나서 그럴까. 소설 속 세상은 내가 경험한 것과 너무나 다른 세계라 그런가. 내게 가장 많이 걸렸던 것은 소설 안의 언어였다.

생각을 나타내는 말, 감정을 나타내는 말, 고백하는 말들이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리게 하지 않고 작가의 말로만 읽게 되었다. 이거 참 소설쓰고 있네! 하는 느낌이었다. 소설이란 허구이니, 이 소설의 인물들, 인물들의 말, 인물들이 처한 환경 모두가 허구인 것은 당연한데, 나는 이 소설이 상당히 작위적이라고 느껴져 작중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설이가 연기한 위악적인 소녀나 부유한 가정에서 억압받아 비뚤어지는 소년, 현명하지 못한 어른들, 바보스럽게 착한 인물들이 그저 소설이니까 이렇다고 여기고 말았다.
 소설책 한 권을 덮으면서도 기억에 남을 인물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설이를 읽고도 설이를 좋아하지 못하는 독자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