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깊은 슬픔/신경숙

자몽미소 2002. 6. 11. 21:28

깊은 슬픔-신경숙

 

***사랑, 지독한 기다림, 그 벼랑 끝에서.***


책장에서 다시 신경숙을 그의 깊은 슬픔을, 그녀의 슬픈 여자 오은서를 꺼내었습니다.
'이래도 사랑인가' 하고,

언젠가 한 글에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여자 한 명이 신경숙의 슬픔덩어리인 오은서를 빗대어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였을 때,
나는 그녀의 너무나 씩씩한 삶의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가학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질문이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래도 사랑인가'

오은서는 물론 나에게도 그 질문은 아프게 꽂혔습니다.



깊은 슬픔은 사랑때문에 파멸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의 그것이 사랑이었나 하는 질문은

지금,

사랑의 상흔으로 날마다 아픈 이에게는

사랑으로 하여 지독히 외로운 영혼에게는

기다림으로 날마다 날이 서는 마음에게는

벼랑에 서 있어 내일이 두려운 이에게

등을 밀어 추락하게 하는 폭력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정당한 질문이어도 말입니다.

지금 사랑을 기다리며 목이 메이는 이 있다면

은서의 기다림을 충분히 알게 되겠지요.

등을 돌린 이를 향해서만 내 마음이 가는 안타까운 사랑을

하고 있는 이라면,

나에게 오는 사랑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는

이 어리석은 여자의 싸늘한 시선도 이해 가능하겠지요.

그 싸늘한 시선이 날마다 날마다 전화기의 벨 소리에

민감하고,  혹여 자기를 찾을지도 모르는 순간이 있을까 싶어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이 불쌍한 여자의

길고 긴 기다림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불행한 사랑의 포로가 되어 버린 오은서 ,그녀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겠지요.


날마다 감옥은  제 가슴 안에서  두꺼운 그늘을 만들 것이고

그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기다림은 더욱 길어질텐데

그녀에게 등을 보이는 그 사람은 늘 먼 데를 보고 있군요.


그의 가슴에서 그녀의 자리가 차츰차츰 사라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록

그 고통스런 인식은  아침의 시간조차 죽이고 싶답니다.

아 하루를 어떻게 다시 버틸 것인지요.

그녀의 기다림은 너무나 몸에 익은 병같은 것이어서

삶의 기억을 펼쳐보아도 그녀의 기다림이 아픔을 넘은 죽음이 되고 있다는 걸 그녀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하지요


그러나 오은서.

그녀는 사방이 모두 절벽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이미 그녀는 삭막한 사막에 와 있었고

사막의 끝에 벼랑이 있더군요 몸을 던질 수 있는 선택이기나 하듯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선택인 셈이죠.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하는 건

사랑에 대한 정의란 사랑이 운명이 되어 버린 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질책인가 하는 겁니다.

사랑은 사람만큼이나 수많은 표정으로 우리 곁에 머물지만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고 아니고는 우리 선택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어떠한 것이 가장 좋은 사랑이라는 말은

정형화된 미인의 조건이 그렇듯 허무합니다.

어느 누가 그 고귀하고 빛나는 사랑을 자기 것으로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리고 당신은

그 선택을 할 만큼 삶의 힘이 큰 사람은 아니어서

가장 사랑답다고 말해지고 칭송되는 사랑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은 축복받은 인생이네요.

그러므로 어느 틈에 우리는 이렇게 너무 어리석고 아프게

사랑의 갈증 때문에 목말라 죽게 되는

불쌍한 영혼이 될 수도 있답니다

병처럼 자기 몸에 붙어 자기를 괴롭히고 마는 그것

어느 누가 자기 몸에 찾아온 육신과 마음의 병듦을

완강한 태도와 단단한 표정만으로 물리칠 수 있답니까.

또는 사랑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로서 사랑의 방식을

자기 맘대로 변형시킬 수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런 지독한 사랑과 지독한 몸의 고통에서

조금만 덜 상처 받기를 바랄 뿐.

그러다가 너무 긴 기다림에 지쳐버리면

슬프더라도 죽음으로 기다림을 멈추어 버리는 게

마땅히 휴식일 수도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일 뿐.


신이 이 불쌍한 여자,

오은서에게  준 사랑은 기다림을 동반해야  하는 깊은 감옥이었답니다.

그녀에겐 벅찬 공간이었네요. 이겨내지 못한 걸 보면요.


(200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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