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김훈 [책읽기]

자몽미소 2002. 5. 3. 04:30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김훈

이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방은 자꾸만 넓어지고 나는 베란다가 넓어서 빨래를 널기에 좋겠다고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베란다는 남쪽으로도 있었고 서쪽으로도 있었다. 둘 다 햇빛을 잘 받아들이는 방향이라 즐거웠다. 허름한 다세대를 버리고 새로운 아파트로 탈출하고 싶은 것은 공간의 문제만 일까? 아파트이건 시골구석의 초당이 되었건  이곳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는 일이 묵은 체증처럼, 오래된 습관처럼 반복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기쁨을 가지지 못한 채 자꾸 이것 아닌 것을 꿈꾸는 일은 이제 무의식의 공간으로 가고 있나보다. 차마 나의 현실로는 내 몸을 누이고 밥을 먹이고 일용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의 공간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가 없어 반복적인 꿈으로 이사가기를 수 십 번하고 있다니. 꿈에선 자꾸만 내게 해방을 말한다.


그 꿈의 끝에 이 책을 떠올린다. 새벽의 꿈은 말끔하지 못한 기억의 잔영으로 잠을 털어 내는 동안 계속하여 두통을 몰고 왔다. 꿈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인데도 내가 가지고 있을 무의식을 염려하여 자꾸자꾸 되씹은 꿈은 씁쓸하였다.


나, 잘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하는 이 책은 결국 내 내 삶의 작은 귀퉁이에서 몹시 난처한 책이 되어 버렸다.

책의 서두에 아들에게 말하는 삶의 정당함에 대해서나 책의 말미에 생물학적인 남자가 사회학적인 남자를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그의 언어는 아버지의 자애를 가득 담고 있으며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를 탄탄하게 하는 액자식의 틀로 구성하면서 삶에 대한 진정함을 긴밀한 끈으로 지속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그의 사랑은 가족을 아울러 이웃으로 향하고 그의 가난은 원고지를 메워 돈을 벌어야 하는 이의 고달픔을 읽게 하며, 이 어지러운 시대, 부패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 타협은 깨끗하고 당당하기조차 하여 그의 글 끝은 다정하지만 날카롭다. 그러나 그이의 글 끝엔 언제나 가난한 이의 수줍은 사람이 머물러 있다. 가난한 농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도 원양선을 따라간 그이 발길에도, 강이나 바다, 봄이나 여름, 그의 주변에서 머무는 것을 향하여 그의 가슴은 덥다.

더운 가슴이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넘으며 이 사회에 대해 분개하거나 비판적이다 보면 그의 언어는 단호해진다. 단호한 그의 말들이 가는 길은 우리 산천을 구비구비 돌고 있어 그의 전작  과 겹치는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다. 정당함이란 매우 큰 미덕이지만 정당하게 사는 것은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어떤 것에서의 극복은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의 책의 곳곳에서 한 자연인으로서의 그가 보이고 그 또한 마음으로의 의지와 몸으로의 실천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란 걸 보게 된다. 그런 그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이 주는 기쁨이다. 그의 주변을 메우고 있는 것은 우리 주변을 메우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내가 고민하다 말았거나 보지 못하고 스친 것들을 그를 통해 보게 되는 일, 그것은 내 생에 다가와 위로한다. 사는 일이란 늘 위태로운 걸음마여서 끊임없이 위로 받아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우리의 익숙한 주변을 종합선물세트 과자상자처럼 펼쳐 놓으며 이야기  하고 있는 셈이고, 나는 이 낯설지 않은 선물에서 위안을 받은 셈이다. 어깨 토닥이는 위로가 늘 그렇듯 그러니 남는 건 나에 대한 질문이 될 수밖에. 그러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으로부터 억압되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여야 할 것이며 나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어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읽기를 통한 삶의 반성이 내 깊은 의식 저편을 목격하는 일로 끝나서는 안되겠지만 이 책을 덮으며 나에 대한 연민만 가득한 것을 보니 아직 나는 나를 넘어서며 세상을 바라보기엔 역부족인 것만 같다. 내게 남아있는 길 위에서 그나마 살아내려면  가다듬고 보듬는 시간이 더욱더 필요한가 보다.  안부를 묻는 지인의 질문에 언제쯤 잘 살고 있다 말하게나 될 것인가.

(2002년 5월 3일 새벽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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