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독일인의 사랑 [책읽기]-스며드는 사랑

자몽미소 2002. 5. 26. 22:00

타인으로 스며들기, 진정한 사랑의 인식



한때 이 세상에서 누군가와 만나 알고 지내고 사랑했던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 곁에서 떠나갔다는 사실까지도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신의 뜻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향은 우리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영혼의 쉼터로 존재하고 있다.



시간의 순서를 따라 연대기적으로 엮어진 이 소설은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한 언어학자의 단 한 권뿐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하여 이 소설을 번역한 차경아씨는 그 원어가 주고 있는 언어의 다의성에 주목하면서  이라고 번역하는 일이 알맞지 않으며 마치 부피 큰 물건을 작은 번역의 그릇에 담는 꼴임을 지적한 바 있다.

제목이 주는 그런 외견적인 함축은 이 소설의 내용면에서도 그저 한낱 사랑이야기 만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내 어떤 저작의 큰 흐름을 이해하여만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마리와와 주인공이 나누는 에 대한 주제 이외에도 기독교의 주제인 사랑에 대한 생각,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랑에 관한 문제들이 철학서를 읽는 것처럼 골똘한 사유를 요구하였다.



줄거리만이라면 신분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고 몸이 아픈 여자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한 남자의 사랑의 추억이며 그 여자는 그 이전 세대의 사랑의 한 증표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를 둘러싸고 비밀을 간직한 두 남자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말해놓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이냐.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온갖 사랑은 얼마나 초라한 궁색을 감추고 있는 것이냐.

이 소설도 딱 까놓고 이야기한다면  딱 까놓은 우리의 삶처럼 초라한 줄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우리네 삶의 하나하나에 소중한 눈길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소설의 구조나 소설적 플롯의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중한 웅변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베르테르적인 정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하지 않았고 결혼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이루어내지 못하는 사랑을 죽음으로 초월하려는 대신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만드는 사랑은 긴 인내와 감사로 그것을 초월한다.

마리아와 주인공이 노력했던 사랑의 시간은 고작 몇 번의  대화와 짧은 키스와 포옹으로 밖에 드러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 병상의 그녀로부터 받은 반지에서 시작된 사랑의 시간을 흐르고 있는 것은 신의 뜻을 겸허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 상대를 위하여서는 무엇이라도 좋겠다는 영혼이다. 그 간절함은 격정의 회오리보다 오래 간다. 그들의 대화는 영혼의 안식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그 영혼은 그들의 사랑이 어떤 빛이 되게 하였다. 사랑은 각 존재자에게 빛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살아있게 하는 것, 그래서 우주의 한 톨 씨앗으로 우주의 운행에 동참하게 하는 것, 사랑은 생명을 생명이게 해야 하며 그것은 죽음조차도 안식이게 한다.

안식인 죽음은 또다시 생명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또한 우주의 운명이다.

마리아가 나이든 의사의 딸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이 지향하는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마리아의 어머니와 사랑을 나누었던 의사는 상대의 사랑을 위해 자기의 사랑을 포기하였고, 그녀 곁을 떠났다. 그녀는 마리아를 낳다가 죽었고 마리아는 그  두 사람의  몰래한 사랑의 결실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뒤엔 딸의 생명이 있고  마리아의 죽음을 안식이게 한 것은 젊은 고통의 인내 뒤에 왔다. 우주의 운명을 닮은 이들의 사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사랑을 말할 수 있으리라.

사랑을 떠나 보낸 사람의 생명은 신이 내린 모든 것에 대한 받아들임 신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지와 감사에서 왔다. 그 감사가 이 소설을 만들었다.

마리아는 주인공에게 한때 사랑하였었던 여인이었고 그 사랑의 기억은 고향을 만들었다. 나이든 의사가 그의 한평생을 마리아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의 기억에 살아가야 하는 명분처럼 자리잡은 마리아의 어머니와의 사랑때문이었듯  마리아는 주인공의 마음에 스며든 고향이었다.



타인이 타인에게 스며드는 일은 운명이 줄 수 있는 흔치 않은 행운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면 그러하다.

어떤 운명의 무거움이 닥치더라도 타인의 가슴으로 스며들는 일은 축복이다. 가슴 속에 하나의 빛, 고향을 만드는 일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소설을 1998년에 읽고 2002년 5월에 다시 읽으니 또다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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