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형제-2008년의 책읽기 (11)

자몽미소 2008. 2. 21. 02:10

 

1. 우리 삶의 거대한 간극

 

삼십여 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던 문화대혁명 후기의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은 서로 말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뱉지 못했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저 몰라 훔쳐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론 개중에 담이 큰 남학생들은 몰래 쪽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감히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는 못했으며, 한참을 에둘러서 지우개나 연필을 선물하겠다는 등의 표현으로 호감을 전달하고는 했습니다. 쪽지를 받은 여학생은 녀석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지만 대개 긴장하거나 두려워했고, 쪽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여학생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이라도 한 듯 대단히 부끄러워했습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중학생들의 연애는 이미 자신들이 마음속에서도 정당화되었고,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요즘 여중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 병원에 가서 임신중절수술을 받는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한 여학생이 교복을 입고 역시 교복을 입은 네 명의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채 임신중절수술을 받으러 왔고, 의사가 가족의 동의를 증명하는 서명을 요구하자 남학생들이 앞다투어 서명하려 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했을까요? 나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중국이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기적을 창조해냈고, 삼십 년 동안 평균 구 퍼센트에 달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2006년 현재 이미 세계 세 번째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그 영광스런 수치 이면에는 일인당 평균 소득이 여전히 세계 백 위 밖이라는 불편한 수치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마땅히 균형을 이루어야 할 이 두 경제지표는 오늘날의 중국에서 여전히 이렇게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상해, 북경, 항주와 광주 등 경제발전지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고 , 상점과 슈퍼마켓, 호텔은 사람들로 떠들썩하지만, 서부의 빈곤한 지역은 여전히 적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일 년 소득이 인민폐 육백 원밖에 되지 않는 빈곤한 인구가 삼천만에 달하며, 고작 이백 원을 더 버는 연소득 팔백 원인 인구를 산출하면 무려 일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중국은 광활하고, 인구는 너무나 많으며, 경제적 불균형이 심각한 나라입니다. 지난 1980 년대 중반에 연해지역의 도시 사람들은 다들 코카콜라를 마셨지만, 1990년 중반의 호남 산골 사람들은 외지로 일을 찾아 나갔다가 새해를 맞이하러 귀향할 때 고향의 친지들에게 선물로 코카콜라를 가져갔습니다. 고행의 친척들은 그때까지 코카콜라를 구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회적 삶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마음속 불균형을 불러오게 됩니다. 지난 1990년대 후반 CC-TV가 6월 1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중국 전역의 어린이들을 인터뷰하면서 어린이날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북경의 사내아이는 장난감이 아닌 진짜 보잉 비행기를 받으면 좋겠다고 했고, 서북지역의 한 여자 아이는 부끄러운 듯 흰색 운동화 한 켤레를 받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두 동갑내기 어린이의 바람조차 이렇듯 거대한 간극을 보이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서북지역의 여자아이가 평범한 흰색 운동화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북경의 사내아이가 보잉 비행기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까마득한 일일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오늘날의 불균형한 삶입니다. 지역 간의 불균형, 경제적 발전의 불균형, 개인 삶의 불균형 등이 심리상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꿈마저 불균형하게 됩니다. 꿈은 모든 사람의 삶에 꼭 필요한 재산이며 최후의 희망입니다. 설사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더라도 꿈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꿈마저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북경과 서북의 두 아이가 가진 꿈의 극단적 간극이 내가 처음에 예를 들었던 간극만큼이나 거대합니다. 삼십여 년 전 여중생과 오늘날의 여중생 사이에는 또 다른 극단적 간극이 있으며, 전자가 현실적 간극이라면 후자는 역사적 간극입니다.

 

나는 <형제>에서 거대한 간극에 대해 썼습니다. 문화대혁명시대와 오늘날의 간극은 역사적 간극일 테고, 이광두와 송강 사이의 간극은 현실적 간극일 것입니다. 역사적 간극은 한 중국인에게 유럽에서는 사백 년 동안 겪었을 천태만상의 경험을 단 사십 년 만에 경험하게 했고, 현실적 간극은 앞에서 말한 북경의 사내아이와 서북지역의 여자아이처럼 동시대의 중국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시대의 사람들인 것처럼 갈라 놓았습니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두 아이가 가진 꿈 사이의 간극은 마치 하나는 오늘날의 유럽에서 사는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사백 년 전의 유럽에서 사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가 중첩되는 거대한 간극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일 수도 있고, 모두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극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봐도 그렇고, 오늘날과 오늘날을 비교해봐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이십여 년 전 이제 막 이야기를 하는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읽었던 노르웨이의 작가 입센이 한 '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내가 왜 <형제>를 쓰게 되었는지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5월, 위화( <형제>의 한국어판 서문) 

 

2.쓸쓸함으로 남는 것

 

이광두가  러시아 우주선 유니언호를 타고 우주 유람을 하려한다. 그는 3년 전 사랑하는 동생 송강을 잃었는데, 그의 유골을 나무 상자에 담아  우주궤도상에 유골함을 올려 놓겠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이 이 두 남자, 이광두와 송강의 이야기이다. 성격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사뭇 다른 형제의 이야기,  그 속에서 그들과 연결된 인간 군상들의 변화 무쌍에 대한 이야기다.

 

총 3부로 된 책 속에 문화대혁명기의  중국에서 한국드라마에 빠진 인간 모습까지 경제개방 시대의 중국을  빠르게 흘러 간다. 인민의 평등을 외치던 혁명기의 중국도 끔찍하지만, 인공 처녀막을 해 넣으며 미인대회에 참여하려는 개방시대의 사람들도 끔직하긴 마찬가지다. 실제의 중국이 아니라 허구의 이야기 소설이겠지만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소설은 그런 이야기를 통해 지난 시기의 중국과 오늘날의 중국, 그 나라 안의 사람들,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러니 중국이지 싶은 마음, 또 그게 이 소설의 묘미다. 엄청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어 독자로하여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문체 덕분에 세월의 빠름만큼이나 빨리 책을 읽을 수 있었다.

 

1부의 이야기에서 나는 내가 열 살 무렵이거나 또는 그 이전의 우리 동네와 우리 동네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역사속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실지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변모되는지 발견하고 경악했다. 모주석의 말씀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과 홍위병의 소년소녀들의 무자비하고 기준없는 칼과 몽둥이가 되는 것은 소름이 돋았다. 인민재판이라는 집단의 무기가 한 개인, 한 가족, 공동체를 무력하게 하면서도 또 그 가해자가 개인의 집합체 라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데 이런 집단광기는 내가 살던 동네에서도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제주의 4 . 3 증언을 들을 때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울분했으나 그 건 또 지나간 일이었고 현재를 사는 나로서는 그 시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또 그대로 믿을 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시대가 없었던 듯이 또 오래 살아왔었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바다를 건너 이 땅에도 있었고 또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구체적으로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스라치는 것은 소설을 통해서 그 시간의 구체적 상황을 보다 더 정확하게 상상상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도 그런 공포와 무지와 폭력이 있었음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때의 광기가 우리가 살던 땅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경제개방시대의 중국, 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또한 이 땅에 득실거려서, 이제 우리나라도 그의 도덕적 수위를 따지기 전에 <경제를 살리자>는 사람의 말을 믿고 대통령을 뽑는 나라가 되었다. 모두 몇 십 년 전보다 물질적으로 잘 살고 있지만 주머니의 돈은 늘 빈 것 같고, 잘사는 남과 비교해 보면 언제나 내 통장은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상대적 빈곤이 실지, 가난하던 시대의 가난보다 더 심각해졌다.

 

중국이라는 나라 이야기,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중국 사람이야기인데도  소설 <형제>는 바로 내 이웃, 우리 동네의 어느 사람 이야기이고, 또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아직 이데올로기와 경제 때문에 무너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그러면서도 해야 할 비판을 담기도 한 소설을 만들어내지 못하였을 뿐이다.

 

광기의 시간을 살아남은 자들이 2권과 3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1권의 시간과 그 후의 시간 사이의 너무나 빠른 변화였다. 문화대혁명이 꺽어지고 개방경제 시대가 된 것이었다. 

이광두는 개방경제 시대를 잘 이용했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갑부가 되었다. 체제 순응적이던 동생 송강은 죽기 직전에 어머니로부터 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점점 더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그는 바른 사람이었으나 개방경제시대에는 일자리를 잃고 자기 몸을 건사할 줄 모를 뿐더러 닥치는 일을 현명하지 못하게 처리하고 만다. 마지막 자살까지 그는 순애보적이지만 이미 그런 사람이 설 자리는 없는 게 이 소설이 보여주는 공간이다.

 

 

작가는 시간과 역사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주목한 것 같다.

시류를 잘 이용하는 이광두와 류시인 같은 사람이 있고, 매번 자기 몫의 것도 제때 따내지 못하는 송강과 조시인 같은 사람이 있다. 또한 임홍처럼 처음 마음 그대로 죽을 때까지 순수함을 가지려했지만,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마음과 몸이 따로 따로여서 송강을 생각하면 순수한 사랑의 눈물이 나오지만, 이광두를 생각하면 몸이 달아오르기도 하는 여자도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이라고.

 

점점 이야기는 파국으로 달려가서 송강이 죽은 후 임홍은 류진 지방의  성매매업소를 운영하게까지 된다. 그 곳을 이용하는 이들 모두 소설 속에서 변하고 변하며 흘러온 인물들이다. 임홍을 위해 돈을 벌고 싶어 유방확대 수술까지 했던 송강의 경우는 돈을 벌려는 목적이라도 있었지만, 개방경제시대 이후를 달리는 사람들 중에 돈을 벌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차이.  그 차이는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이야기의 큰 얼개다.  작가의 말에 나온 것처럼, 사람과 사람과의 간극, 시간과 시간과의 차이,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다른 공간에 사는 것 같은 이 차이, 또한 이 몸 안에서도 마음 먹은 것과 손발이 해낼 수 있음이 다르니.

 

소설은 중국의 현대사, 40-50년을 아우르고 있지만, 우리, 또는 나에게도  이 차이와 간극의 문제는 잘 풀어내지 못하는 숙제처럼 보인다. 그래서 널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무역과 깡패국가와 가난한 나라의 일을 보든, 이 작은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람 살이를 보든,  아니면 현미경 들여다보듯 내 안의 마음을 보아도 어디서든 그 공간엔 쓸쓸함을 놓여있다. 

 

그래서 사람의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향하면서도 저녁노을이 비추는 생활을 그리워하고, 다른 두 사람은 향락을 추구하지만 저녁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