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허삼관매혈기-2008년의 책읽기 9

자몽미소 2008. 2. 18. 12:23

 

 

 

평생 피 팔고 사는 남자 이야기다. 그 남자 이름이 삼관, 허삼관이다.

 

살( 먹고 사는 일)과 피(생명,아내와 자식)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또 피(돈)와 땀(노동)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먹고 사는 일은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지만, 좀 특별한 것을 하려 할 때는 피를 팔아 해야 의미가 있다고 믿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가 처음 피를 팔게 된 것은  피를 팔 수 있어야 남자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피를 한 번 팔았다. 그랬더니 일이 술술 잘 풀렸다. 그러나 그렇게 피를 팔며 일을 해결해 나가던 그도 마지막의 존재증명을 위한 피팔기는 실패했다. 처음의 성공과 마지막의 실패 사이에 허삼관의 피 파는 이야기가 그의 인생 역사, 이 소설의 중심이 된다.

 

처음에 피를 팔고 자신이 훌륭한 남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허삼관이 허옥란을 얻는다. 그의 아들은 인생 즐거움의 원천이었으니 락(樂)이었고 결혼 5년 동안 세 명의 아들 일락,이락,삼락 을 얻는다.

 

그런데 아들 중 하나가 즐거웁지 않다. 자기의 아들인가 의심되기 시작한다. 이 의심은 <손해>보지 않고 살려는 이 사람 사는 기준에 자꾸만 신경쓰게 하는 일을 만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저울질 하고 타인의 평판에 흔들린다.

 

독자는 모두 알고 있다.그가 의심하는 아들 일락은 분명하게 그의 아들이다. 다만 그의 아내 허옥란이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결혼 전 딴 남자 하수용과 <딱 한 번> 딴 짓을 하긴 했지만, 허옥란은 아이를 임신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결혼하는 날, 굉장히 많은 피를 쏟아냈으니 말이다. 허삼관에게 허옥란은 그게 처녀 증명이라고 우겼지만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때쯤은 그 피가 <명절>(생리)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임신한 여자였다면 결혼하는 날 생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른다. 허옥란도 그 피의 진실을 모른다. 마을 사람들도 모른다. 그래서 허옥란은 자기 아들 일락이 사고를 쳐서 돈이 필요했을 때, 결혼 전  딱 한 번 그 일을 했던 남자에게 아들을 보내 돈을 가져오라고 부추긴다. 네 아버지가 그 남자라고 이야기 한다. 또 그 남자의 여자도 나중에는 일락을 자기 아들로 인정한다. 딸밖에 없던 여자가 남편의 목숨을 구하고자  점쟁이의 말을 따라야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 허삼관, 아내 허옥란, 그 남자 하수용, 또 그의 아내까지 모두 일락이 누구의 피의 열매인가를 놓고 갈등하고 싸우고 문제를 일으킨다. 독자는 알고 있으나 그들은 모르는, 이  끝없는 피의 오해, 자기 아들인가 아닌가를 놓고 벌이는 의심, 그리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에 허삼관도 <딱 한 번> 딴 짓을 한다. <딴짓>을 해 놓고 자기 마음의 갈등을 특유의 계산법으로 마무리 하는 폼새가 우습다.

그러나 그 딴 짓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으로부터 고난을 받지는 않는다. 대신 언제나 눈에 잘 띄고 자기 이익을 잘 챙기던 허옥란은 <창녀>라는 대자보에 따라 팻말을 목에 걸고 며칠을 광장에 있어야 하는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독자는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조차 웃음이 난다. 그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광기의 물결 속을 유유하게 또는 가볍게 조롱하듯 견디는 그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피를 팔아 자신감을 얻은 허심관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피를 판다. 그리고 피를 팔고 나서는 돼지간볶음 요리와 황주 한 잔을 함으로서 피 팔기로 내 보낸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는 끊임없이 저울질을 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들면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고민이 생기고 일할 맛이 안 나는 것이다. 공산(共産)의 시대이니 공평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그 만의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피를 팔아보려 한다. 예순이 넘은 어느날, 피를 판 후에 먹는 돼지간볶음과 술 한 잔의 맛을 보기 위해 다시 피를 팔러 간다. 자신의 존재증명이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피를 팔 수 있어야 남자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거절당한다. 이제 그의 피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가치가 없고, 다만 염료 재료로는 쓸 수도 있겠다는 혈두(피 사는 남자)의 냉정한 말을 듣는다

 

그래서 어른을 못 알아보는 이 불평등한 사회(공산주의 나라 중국)를 향해 한 마디를 던진다.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구 하는 거라구."

 

한평생을 손해보지 않고 서로 잘 나누려고 애쓰면서 살아온 그가 발견하는 이 세상의 부조리에 그가 보내는 삶의 지혜다.

 

독자는 즐겁게 소설을 덮는다..

 

이게 중국인가? 이게 중국사람인가? 중국의 역사 한 켠에 이런 일도 있었던가? 또 이런 사람들이 있어 중국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가? 놀랍고 흥미롭다.

 

책을 읽는 감동은 그러나, 허삼관이라는 보잘것 없어 보이는 남자의 인생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 작가 위화의 글쓰기에 있었다.

 

여기 <허삼관 매혈기> 한국어판 서문의 그의 글을 인용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로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붓을 놀리는 순간, 작가는 허구의 인물들 역시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목소리들이 스스로 바람 속의 해답을 찾도록 존중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서술하는 세계에 함부로 침입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세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존재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인내심 있고, 세심하고,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헤아릴 줄 알며, 늘 경청자의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존재 말이다. 작가는 이처럼 애써야 한다. 글을 쓸 때는 작가라는 신분을 없애고 자신을 한 사람의 독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이 소설의 작가인 나 또한 작품을 완성한 뒤, 내가 이 소설에 관해 결코 남보다 많이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문학이 주는 즐거움이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우리에게는 문학의 자극이 필요하다. 또 우리는 문학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수많은 위대한 작품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듯, 작가는 자기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들 역시 자신에게 꼭 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제 저녁 책을 열고 열 두시 가까운 무렵 책을 덮었다. 작가의 흥미로운 이야기 속을 빠져나오니 책 끝의 서평은 지루한 댓글처럼 여겨졌다.

 10여 년 전 중국어를 배우다 말았는데 이번처럼  이 책의 원서를 읽고 싶을 만큼 중국어에 매료된 적은 없었다. 나는 이 책의 중국어 원음을 듣고 싶다. 상상하건대 단문이면서 어려운 단어가 없는 이 책의 원서는 중국어를 웬만큼 공부한 사람의 교재로도 쓰일 것 같다.

전혀 어렵지 않은 일상의 말로 글을 썼는데 알아듣고 이해하는 게 많아지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다. 또한 그의 글을 누군가 낭독을 한다면,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듣기 좋은 글의 리듬에 취할 것 같다.

-모주석이 말씀하였다. 그랬더니 ** 했다-  와 같은 단문이라든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허옥란의 신세타령 같은 것은 문자만으로도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만든 그의 재능을 칭송해야 하리라. 다만 이것은 현재 중국어음으로 책을 읽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혼자 하는 나의 상상일 뿐이지만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