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2008년의 책읽기 5

자몽미소 2008. 1. 19. 14:22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 책 앞, 작가의 말 중에서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이 수용소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혹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어서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결국 다 잊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을 지우고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대개 이런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그러니까 정치활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다가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고통은 사고나 질병 같은 트라우마일 뿐, 의미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은 낯선 어떤 것, 그들의 삶에 난입한 고통스런 물체였다. 그들은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혹은 아직도 애쓰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중략*****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이와 같은 끔찍한 교훈이 우리의 경험 속에 들어 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수용소 생존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매년 젊은 순례자들을 데리고 '자신들의' 수용소를 찾아간다. 나 자신도 시간이 허락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책을 쓰고 그것에 대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같은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음을 몰랐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책의 부록 1, 독자들에게 답한다 중에서,  책 284-285 쪽

 

 

물자부족, 노역, 허기, 추위, 갈증들은 우리의 몸을 괴롭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정신의 커다란 불행을부터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믈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수용소에서 들어 가기 전이나 그후에는 자살에, 자살할 생각에 가까이 간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아니었다.

---책의 부록 2, 프리모 레비 작가의 연보 중에서, 책  321쪽

 

 

프리모 레비는 생애 총 14 권의 소설, 시집, 평론을 발표했는다. 서경식 씨는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으로 다음의 다섯 권을 읽기 권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1947, 1958

<휴전>, 1963

<주기율표>, 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 1982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1986

 

 그 중에 두 권을 읽었다.

책을 덮으며 뭔가 내 안에서 부끄러움같은 감정이 치밀어 올랐으나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독후감을 쓰지 못한다. 주기율표를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다. 이미 다른 책을 통해 아우슈비츠의 참상과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을 대략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읽으며, 이 책의 제목 ,이것인 인간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런 곳에서 인간은 이렇구나,이럴 수도 있어도 인간이구나'  로 확인하는 동안의 씁쓸함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혼합되었다.

 

서경식 씨가 소개한 <결론>이란 작품, 그의 마지막 작품엔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 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책의 부록 4, 작품 해설, 338 쪽

 

란 고백이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가 수용소에서 수없이 꾸었던 꿈의 변형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꿈을 꾼다. 고향에 돌아가는 꿈이다. 맛있는 식탁 주변에 가족들이 모여온다. 그리고 그는 그가  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다. 그러나 곧 주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길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깬다.

 

마지막 작품, <결론>을 쓰고 나서 그는 1987년 자살을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만 보면 생의 한토막에서 마주하게 된 여러 인간들 속에서 이래도 인간인가를 묻고 절망하면서도, 그래도 인간이라면 이렇구나 하는 작은 안도 같은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와 수용소 생활을 통해 관찰했던 인간들과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찾고자 했던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해 썼고 이야기 나누었다. 그런데  수용소에서 돌아와 40 년 후에는 돌연 자살을 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인가> 만을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자살 때문인 것도 같다. 그렇게 어렵게 돌아온 사람의 죽음이라니. 운이 좋아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던 그가 죽음을 스스로 택했던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지쳐 버렸던 것일까?  그 참혹한 세상을 거치고 다시 평화의 시대로 가는 것 같더니 그만 그 사이에 그는 다시 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마주 하고 말았던가, 인간에 대한 피로가 아우슈비츠수용소 보다 더 지독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