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인생-2008년의 책읽기 10

자몽미소 2008. 2. 19. 00:57

인생-위화 지음, 푸른숲

 

책 서문

 

마음의 소리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이러한 원칙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데는 힘겨운 노동과 오랜 시간의 고통이 뒤따랐다. 마음은 결코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경우 오히려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을 써야만,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빛이 어둠을 비추듯, 영감은 이런 순간에야 불현듯 떠오르는 법이다.

 

오래전부터 내 작품은 모두 현실과의 긴장관계에서 나왔다. 나는 상상에 빠져 있었고, 또 현실에 단단히 얽매여 있었다. 나는 자아의 분열을 분명하게 느꼈고, 나 자신을 순수하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예전에 나는 동화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참된 작품을 소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될 수 있다면, 내 마음 깊은 곳의 고통이 한층 가볍고 미약해지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내 역량도 그만큼 쇠잔해갈 테지만...... .

 

사실상 나는 지금과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글을 쓴다. 냉철한 이성은 나의 글쓰기를 대체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분노에 가득 찬, 또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였다.

 

그것은 나 혼자만 맞닥뜨린 어려움이 아니다. 우수한 작가라면 누구나 현실과 긴장관계에 있다. 그들의 붓끝에서 현실이 요원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만이 그들 작품 속 현실이 찬란히 빛을 발할 수 있다. 지나간 현실은 온통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이미 한 층의 비현실적인 색채가 덮여 있고. 그 속은 개인적인 상상과 이해로 꼭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현실은 역시 작가의 일상 속 현실이며, 사람들의 이해하기 어렵고 함께 어울려 지내기 어려운 현실이다.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현실을 표현해내야 한다. 그는 종종 그 일이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무섭게 달려드는 진실들은 대개 추악하고 음험한 것을 하소연해오기 때문이다. 왜 이상한 것은 죄다 여기에 있는지, 왜 추악한 사물이란 사물은 다 내 옆에 있고, 아름다운 것은 머나면 바다 끝에서 가물거리는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우애와 동정심은 늘 정서의 형태로 다가오지만, 그와 상반되는 사실들은 오히려 손만 뻗으면 바로 만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시인이 말한 것처럼 "인류는 지나치게 많은 진실을 감당해낼 수 없다".

 

일생 동안 자아와 현실의 긴장관계를 풀어가는 작가도 있다. 포그너가 가장 성공적인 예로, 그는 화해의 길을 찾았다. 그는 중간 상태의 사물을 묘사하면서 아름다운 것과 추악한 것을 모두 포용했다. 그는 미국 남부의 현실을 역사와 인문정신 속에 펼쳐 놓았다. 이것이 바로 진저안 의미에서의 문학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들도 현실을 묘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의 붓�에서 나오는 현실이 폭로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환경, 즉 단단히 굳거나 죽어버린 현실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지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 그런 작가들이 시시콜콜 따지기 좋아하는 인물을 묘사할 때, 우리는 작가 본인이 바로 그렇게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이런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묘사할 뿐, 현실을 묘사하는 작품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현실과 긴장 관계에 있다.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느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다.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나는 미국의 민요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 늙은 흑인 노예는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언제나처럼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이 노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이런 소설을 쓰기로 했고, 그것이 바로 이 책 <인생>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다.               

--------------1993년 위화의 글.

 

 

소설은 작가가 만난 어떤 노인의 이야기다.

소를 몰며 여러 명의 이름을 부르는 노인, 그에게 다가가 작가는 노인의 일생을 듣는다.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하루는 성에 갔다가  국민당에 끌려  전쟁터에 나가게 되고 겨우 죽음을 피했으나 또 공산당에 포로가 되고 만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중국의 역사 속에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등) 가난한 시간이 길고 그 와중에 참혹한 죽음을 여러 번 보게 된다.  어이없이  아들이 죽고, 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사위와 손자가 죽는다.

노인의 이야기는 신세타령조로 우울하거나 어쩌다 명랑하기 까지 하며 자기 인생 전반을 훑어 나간다. 작가는 흥미있게 이 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 소설의 전체 틀을 만든다.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노인의 이야기>이다.

 

영화로 보았던 <인생>을 떠올리면서 소설을 읽었으나 이미 영화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만두를 먹다가 죽는 모습만 남아 있는데, 다시 <인생>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책을 덮은 지금, 사는 게 뭔지 알듯 모를듯 할 뿐이다. 소설책 하나로 어찌 인생을 알 수야 있겠는가만, 역사의 격랑기를 살면서도 그게 크게는 세계가 잘못된 탓인지를 모른 채 살았던 한 남자, 그래서 모두 운명이 그러하다고 말하는 노인의 자세에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설가의 창작된 인물일지라도 어쨌든 저 흉흉했던 역사의 시간 속을 저렇게 살았던 이들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번역자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 소설에 대한 비평을 했지만, 나는 순종적이면서도 강한 여자 자전( 주인공의 아내) 이나 착한 아들과 딸들의 인물에 대해서 불만이 없다.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돌아볼 뿐이다.

 

독후감대신 작가의 서문을 오려 붙였다.  소설에서보다 그의 육성이 더 많이 있는 것 같아 밑줄 그으며 읽고, 그도 모자라 여기에 또 적어 둔다. 나는 그의 작가적 태도가 좋다.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여러 번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