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추격자/ 뻔히 보이는데도!

자몽미소 2008. 2. 21. 23:58

 

 영화: 추격자

 

 

         엄중호와 지영민

 

 

 

분명 처음 시작은 정의는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누가 범인인지 관객 모두 알 수 있었고, 그가 범인을 잡아야 할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부패 혐의로 잘린 전직 형사 엄중호에게 어느 관객도 호의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는 출장 안마소를 경영하는 남자였고, 이용하고 있는 여자들의 개인 사정 따윈 들어주지 않는 악한이다.  그런데 관객은 알고 그가 모르는 게 있었는데 그는 범인 지영민이 살인자인 줄을 모르고 보는 관객은 안다는 것이다.

 

그가 지영민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여자가 사라지면 여자에게 들인 자기 돈이 없어지니 지영민을 잡아 여자도 찾고 돈도 떼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영민이 여자를 죽였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지영민은 여자들을 죽였다. 형사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증거를 찾지 못한다. 결정적 순간에 지영민은 자기 말을 번복한다.

 

 

먹이감들은 언제나 취약한 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딸을 키우며 출장 맛사지를 하는 여자, 통 소식을 알 수 없는 이웃을 방문했던 노인들, 출장 맛사지 이후에 소식을 몰라도 찾아봐 줄 가족이 없는 여자들이 희생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시민의 보호자인 경찰은 그들의 힘을 다른 곳에 쓴다.

한 여자가 위험에 처한 그 시간에 시장을 향해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터진다. 경찰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결국 경찰도 자신들이 받을 비난을 모면하고자 부녀자연쇄 살인범 찾기에 몰두한다. 정의 때문이 아니다.

전직 부패 경찰 엄중호가 돈 때문에 여자와 범인을 찾아 나섰다면,  현직 경찰을 움직이는 것도 <이익>과 <손해>의 계산이지 정의가 아니다. 시민의 안녕을 지켜야 할 경찰보다 책임이 더 큰 시장조차도 개인의 안녕이 시민 모두의 안녕보다 우선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면서 울분하지도 못하고, 우리 사는 사회가 저런 것임을 인정하면서 영화를 본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변화 시킬 힘도 없으면서 누구나 말은 할 수 있는 사회 정의에 관한 영화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사람의 변화 이다.

 

악독하고 비열한 인간 엄중호의 변화, 입에서 욕이 떨어질 날 없고 피폐한 영혼의 모습으로 도시의 썩은 세포에 구정물을 붓고 있는 듯한 이 인물의 변화.

 

관객이 보는 것은 여전히 욕을 하고 사람을 패고 범인에 대한 증오로 더러워지는 그의 얼굴이지만, 그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가 찾는 여자 김미진이 사실은 아이 엄마였으며, 아빠 없는 애를 혼자 돌보고 있었으며, 그녀를 위험으로 빠뜨린 것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자각, 그래서 기어코 그 남자 지영민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전에는 전혀 미안할 것 없는 일이었던 자신의 밥벌이가 약한 여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했었다는 자각, 그래서 또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뛰고 뛴다.

 

<타짜>에서 아귀로 나올 때 배우 김윤식은 소름이 돋을 만큼 악랄했다. 극중의 아귀에 꼭 맞는 얼굴의 배우, 나는 이제까지 연기파 배우 송강호를 매우 좋아했었는데 그도 송강호 만큼, 또는 그 이상의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무명 생활 20년이 힘들었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괜찮았다고 무명이어서 돈이 없긴 했어도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살았으니 그냥 살만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이 좋아보였고 참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배우임은 물론이고.

 

이번 영화에서도 그의  연기가 돋보였다. 돈에 �기고 사람에 시달리던 그가 진정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미 그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진의 아이를 볼 때라든가 골목을 누비며 미진을 찾을 때 그랬다. 이때 처음 장면에서는 전혀 들지 않았던 생각, 진짜 얼굴도 괜찮네,  저 배우!

 

 

전에 미국영화에서나 보던 장면들을 요즘 한국영화에서도 보게 된다. 살인은 더 극악스럽고, 사람을 죽일만한 원한이라든가 이유와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 아닌, 그런 죽음들이 이제 우리 영화에도 나온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그랬고 지난 번 본 영화 '우리 동네' 에서도 그랬다. 죽은 자와 죽임을 당한 자 사이에 어떤 인연도 없어 보이는데도 사람이 죽는, 영화이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실지 우리 옆에 너무 많아진  무고한 죽음들을  본다.

 

그런데,  그 사이 우리 신문의 사회면을 메꾸는 사건들도 그렇게 자꾸 끔찍해지고 있다. 자주 보이는 바람에 내성이 생기기까지 하는 끔찍함. 현실의 사건과 영화의 사건이 구별되지 않는다.

 

영화 곳곳에서 불균형이 보인다. 똥물 한 번 뒤집어 쓰고 병원에 입원했던 이 도시의 시장이 병원에서 나오면서 그를 취재해야 할 기자들이 안 보이자, 한 마디 한다.

"기자들은 어디 간 거야?" 

펜으로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기자들이나, 법으로 시민의 안녕을 보장해야 하는 검사와 경찰들이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건, 바로 이들 권력자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나를 주목하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데 시민 여러분 모든 힘을 쏟아 주세요. 나머지는 관심이 없어요! " 기자들을 찾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단초는 바로 저런 권력자들이다. 영화는 그 진실을 힘주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은 본다. 살인을 한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이 사회의 부패를 만드는 범인,이 사회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힘이 쏠려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악순환의 바퀴에서 신음하고 죽어 가게 하는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