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영화 映画の話

영광의 아이들-헝가리 영화

자몽미소 2008. 4. 9. 16:47

 헝가리 영화였다.

 

수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풀장이 보인다.

처음 보는 경기다. 반칙에 항의하거나 물  속에서 상대 선수를 괴롭히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소련의 공산위성국가였던 헝가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고 느끼면서 영화를 봤다.

헝가리에게 소련은 우리 나라 일제시대의 일본처럼 눈치를 봐야 하는 상대였다. 개인이 아니라 정치가 그랬으므로,  일개 경기에서도 소련 선수들을 이겨서도 안 되었다. 소련 선수들의 시비나 반칙에 항의하는 일도 비밀경찰에 불려가 주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화는 1950년대 말의 헝가리 반공 운동, 소련을 물리치고 주권을 찾으려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 꽃피는 청춘의 모습을 담아냈다. 광주 항쟁과 서울의 봄과 멀리는 삼일 운동의 모습까지 겹쳐 보였다. 

비밀경찰의 총과 소련군의 대포가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항거는 더 무참한 죽음을 불러 일으켰다.

잠시 평화가 오는 것 같았다. 소련군이 물러났고 수상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속임수였다.

 

 

헝가리는 국제적인 관심밖에서 물러가고, 도와줄 것 같았던 미국은 이스라엘 문제에 집중해 버린다.

소련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라는 군인의 발 아래서 뭉개지고 있었다.

 

그때 이미 멜버른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다.

고국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본 수구 선수들이 소련 선수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는 게 영화의 내용이다

 

소련의 재침입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잡혀가고 죽고 사라진다. 승리를 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선수들은 망명을 계획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멈춘다.

 

 

돌아오면 고등학교 국어 책에 나왔던 시가 생각났다. 멋 모르고 읽고 시험공부를 했던 시다.

자습서에 나온 낯말의 의미만 외우면서 헝가리의 수도가 부다페스트라고만 알고 지났다

그 해, 그 나라에서 또 그 도시에서 어떤 사람들의 어떤 삶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 시를 배우던 때, 서울에서도 부다페스트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국어 선생님조차도 아마, 헝가리의 역사와 이 시가 그 역사의 어떤 모습을 말하고자 하였던지를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부다페스트의 소녀는 구체적으로 그 나라의 소녀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시험 문제 �줄 쫙 이라고 하면서도 이 시를 읽던 그 시간 서울의 하늘 아래 일어나고 있던 일과는 관계를 짓지 않았다. 겨우 일제강점시기의 조선 소녀하고나 연관지었을까.

 

1950년대의 헝가리의 상황은 김춘수가 시로 짓고 1980년대에 고등학생이던 우리가 읽었지만, 2008년 어느 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고서야 1980년의 한국과  1950년대의 헝가리를 겨우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소련도 제국의 힘을 잃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중동의 적군이 되었고,  자원 때문에 중국이 티벳을 치며 여전히 제국의 무차별한 공포를 쏘아대고 있으니,  각각의  공간에  태어나 그 땅을 조국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개인들은 국가와 정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알 수 없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김춘수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製)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기야서 감방에 불령 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 [사상계](1957) -

 

 

--네이버에서 복사한, 헝가리의 역사-

 

 

본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헝가리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패색이 짙어지던 전쟁 말기인 1918년 10월에 좌익 계열의 카롤리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와 공화제 실시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카롤리 정부는 휴전 처리에 실패하여 단명으로 끝나고, 그 대신 B.쿤을 중심으로 하는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쿤 정부도 루마니아군의 침입으로 수개월 만에 붕괴되고 구()제국의 해군제독인 M.호르티 등 우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 6월 트리아농 조약으로 옛 영토의 약 72%, 인구의 60% 이상, 경제력의 80% 이상을 상실하였는데, 이것은 실지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을 조장하였고 나아가서는 독일·이탈리아 중심 구도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호르티정권은 히틀러의 강요로 나치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였지만 동조는 불가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는 독일·이탈리아 측에 가담하였고 전쟁 말기가 되자 전 국토는 전쟁터로 변하였다. 전쟁은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나고 헝가리는 또다시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후 헝가리는 소련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8년 탄생한 공산당은 1948년 6월 사회민주당과 합당하여 근로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M.라코시를 당 서기로 선출하였다.1946년에 공화제가 실시되고 1949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어 라코시가 이끄는 근로자당(공산당)에 의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공산주의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라코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바르샤뱌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한 1956년의 헝가리 반공의거를 불러일으켰다. 10월 23일 부다페스트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약 10만의 시민이 봉기한 반소()·반공 운동은 소련 군대의 개입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와 20만 명에 이르는 국외 망명자를 낸 채 진압되었다. 1956년 10월 헝가리 사태로 알려진 군중시위에 의해 개혁주의자인 I.너지가 정권을 잡았으나, 11월 3일 소련군의 개입으로 붕괴되고 친소 개혁주의자인 카다르가 집권하였다. 이때부터 근로자당은 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33년간 1당독재를 실시하였다. 이때 J.카다르를 당 제1서기로 선출하였다.

 

1964년에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1968년에는 경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동구 공산권 중에서는 폭넓은 자유화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소련의 체코 침공에 가담함으로써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1972년 헌법을 개정하여 당의 지도적 위치를 명시하였으나 1975년에는 과도한 경제자유화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 포크가 해임되고 라자르가 임명되어 카다르-라자르 체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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