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창씨개명-2008년의 책읽기 38

자몽미소 2008. 10. 4. 16:09

 

 

 

  • 『창씨개명』, 산처럼, 2008. 미즈노 나오끼 지음, 정선태 옮김
  • 지은이:미즈노 나오끼 (水野直樹), 교토대학 한국학 전공

  • 지은이의 다른 책(번역된 것):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산처럼, 2007.  

 

 지은이의 생각

 

▣한국어판 책을 내면서

 

창씨개명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정책 중에서도 최대의 잘못이자 실패이다. 실패한 정책이었다는 것은, 이미 일본의 패전 직후에 조선총독부의 고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일본인 등이 기록해 놓은 바와 같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창씨개명 실시 당시부터 그것에 반대하는 일본의 정치가가 있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창씨개명이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일본의 일부 정치가, 평론가, 또 일반 일본인의 일부까지도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서의 역사인식을 사실에 기초하여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였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창씨개명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전체적으로 해명하고 고찰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이 책을 집필한 셈이다. 그것은 창씨개명이라는 "역사용어"가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태로서의 창씨개명, "역사"로서의 창씨개명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씨개명이 하나의 정책이 실패였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그 자체가 잘못이고, 그것이 조선 사회에 무엇을 초래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 지배의 문제 그 자체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중략---

 

▣책을 내면서

 

 ------- (중략)---

이 책에서 나는 최근의 연구와 새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된 자료에 기초하여 창씨개명의 전체상을 그리고자 한다. 일반적으로는 '조선인에게 이름을 일본풍으로 바꾸게 하는 정책'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실질을 보면 창씨개명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었다. 이름의 변화 이면에는 조선의 가족제도에 대한 일본 당국의 정책이 감춰져 있었다. 또 창씨개명을 둘러싸고 조선총독부, 일본 '내지'의 정치가, 조선인 각각의 내부에 다른 인식과 입장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중략-

 

▣책을 마치며

 

-중략-

이 책이 창씨개명이라는  역사, 나아가서는 일본의 조선침략,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역사 자료에 기초하여 분명해진 사실을 토대로 해야만 역사를 둘러싼 대화와 교류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중략- 

 

책을 읽고 내 생각

 

십 여 년전, 한일간 민간 친선 모임이 하나 있었다. 서로 한일 우호에 대한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모임을 진행하던 중, 부부동반으로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자는  말이 나왔다. 일이 진전되어 일본에서 다녀가고 이번에는 한국의 부부들이 일본으로 갈 차례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참가자들의 명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은 순조롭지 못했다. 부부들의 방 배정을 위해서 방문자들의 명단을 확인하던  일본측 실무자가 몹시 불쾌해져 버린 것이다.. 그는 신청자들의 소망대로  2인 1실의 방을 배정하고 있었는데 모든 부부가 성이 다른 것이었다. 실무자 생각에 이것은 부부모임을 빙자한 유흥관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측에서 자기들의 선의를 오해하였다고 판단한 실무자는 이번 방문을 거절하는 내용의 의사 표현을 한국측에 전했다. 영문을 모르고 거절 의사를 전해 받은 한국측도 불쾌했다. 그렇게 유야무야 없었던 일이 될 뻔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뭔지 알고 싶은 사람이 추궁을 하다 보니 실무자의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부부는 앞 이름 두 글자가 같다. 일본의 실무자는 크게 오해하였다며 사과 했지만 지금도 한국 부부의 별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 서구인이 많을 것이다.

 

재작년 우리 가족이 일본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은 한가족이긴 하지만 성이 모두 다르다. 우리가 살던 동네 니시노미야의 아름다운 주택가 집들은 얕으막하고 예쁜 담장이 있고, 현관 문엔 문패가 달려 있었는데 참으로 간단하게 공통된 가족 표시 하나만 써놓았다. 문패에 달린 건 우리처럼 성과 이름을 모두 적는 것이 아니라 <다나까 田中 >, <아오끼 靑木> 하는 식이었다. 그럴 것이었다. 그 집 안으로 들어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딸과 아들, 손자 까지 모든 다나카나 아오끼일 것이니까. 우리집 처럼, <조, 김, 홍> 각각으로 있다면 그것은  각각 다른 세 집이어야 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이 책의 저자인 미즈노 선생을 만나고 온 남편이 내게 물었다.

"당신! "씨"하고 "성"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 "  

"그게 그거 아닌가? 성이나 씨나. 나는 성은 김이고 이름은 미정, 김씨, 일본에선 김상"

"이번에 미즈노 선생이 책을 냈는데 그게 다른 거라네!"

남편이 그때 미즈노 선생의 설명을 대신 전해주었지만, 내 머리 속은 어지럽기만 할 뿐,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인데, 일본도 메이지유신 전에는 부부별성(夫婦別姓)이 있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호적법이 만들어지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家 (이에) 개념이 생겼는데, 그 후 각각의 집은 같은 씨를 갖게 된 것이다. 즉 다나까 씨네 한 덩어리, 아오끼 상네 한 덩어리. 그래서 한 가족 안으로 편입된 모든 여자와  새로 생긴 아이가 그 가족이 대표하는 이름 속에 편입된다.

한편 우리 나라는 혈연중심의 사회였다. 나는 여자이지만 김(金) 이라는 혈연 집단에 속하면서 조(趙) 라는 남자와 만나도 가족 보다 혈연을 우선하였기 때문에 김(金)을 유지한다. 나는 내 아들과 성이 다르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는 아들이나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그것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양반의 여자는 시집을 가면서 자기 집안의 성을 가지고 간다. 족보엔 여자를 표현할 때 이름은 적지 않고 시집온 여자의 본관과 성을 적는다. 그때 내가 남편의 호적과 족보에 남는다면   처는 광산김씨, 라고만 남을 것이었다. 조선의 호적엔 양반의 여자는 성만 남기고, 이름을 남기는 여자는 노비뿐이었다.  이쁜이, 막둥이 하는 이름이 조선의 호적 노비 문서에 남았다. 그러나 양반의 여자는 이름 대신 본관과 성을 남겼다. 여자들은 즉 어떤 에 속하더라도 그 家의 혈연 속으로 완전 편입이 되지 않는다. 이혼하면 다시 본가의 혈연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한국 여자인 나, 김(金)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결혼하고 이혼하였더라도 金을 내 이름에 붙이게 된다.  일본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몇 번은 바뀐 성명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생이 나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속한 가족을 바꾸었는데도 늘 성인 김(金)을 달고 다녀서 초등학교 동창도, 어제 만난 사람도 내 성명을 같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김가의 딸로서 변하지 않을거니까.

이렇게 혈연 중심의 사회는 조선을 지배한 일본의 입장, 특히 조선을 총괄하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선일체, 황국의 신민으로서, 천황 아래 살아야  할 조선사람들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혈연을 중심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통치를 위해서 기필코 깨뜨려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이것은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미나미 총독의 의지가 들어 있는 일이었다.

 

창씨는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선 사람은 성을 버려야 했다.

개명은 이름을 새로 바꾸는 것이다. 바꾸는 사람도 있고 안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창씨개명을 하라 한다면, 우리 집은 어떤 家名을 쓸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문중의 영향을 덜 받으니 가족 회의를 할 수도 있고, 남편 성 趙가 너무 쓰기 어려우니 제주도 본래 사람이라 정하자 해서 濟本 이라고 우리집 씨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 집 가족은 모두 濟本이라는 씨명 아래 각가의 이름을 붙이게 될 것이다. 남편의 형제는 같은 씨명을 쓸 수도 있고, 그 집에서 다시 우리 동서와 의논해 알아서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창씨를 하게 되면 남편의 형제끼리 다른 씨를 가질 수도 있게 된다. 또 나는 여동생 하고도 우리 아버지 하고도 다른 씨명을 갖게 된다. 나는 남편과 아들과는 같은 씨명을 쓰고, 지금까지 金 이라고 공통으로 쓰던 우리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과는 다른 씨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혼을 하여 새로운 家를 만들어야 한다면, 나는 이전에 썼던 대로 쓰거나 새로 만들거나 하면 된다.자동적으로 내 본가에 편입되는 법은 없다.

창씨는 이름을 달리 하게 할 수도 있다. 앞에 붙인 씨명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고, 총독부가 바라는 대로 창씨와 개명을 모두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나는 미정을 버리고 일본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미자(미꼬) 가 될 수도 있고, 봄의 여자가 되고 싶어서 춘자(하루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조선사람들은 창씨를 하여 놓고도 자신을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누가 이름이 뭐냐 하면  창씨개명한 사람의 새 성명이 國本春子인 경우, 구니모토하루꼬 라고 하지 않고,  일본어의 한국어 발음으로 국본춘자 에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위에서 시키니까 하긴 했는데 조선 사람이 기꺼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씨개명은 그래서 일본이 패전하자 마자, 조선 사람 모두가 조선이름으로 곧바로 회복하여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창씨는 한국의 혈연집단을 와해하고자 제창된 것으로 보다 강력한 요구, 그러나 자발적으로 보이게 하는 강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름의 변경은 그리 심하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창씨를 받아들였을까, 지금 내가 성과 씨를 혼동하고, 헷갈려 하고, 굳이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빠진 것처럼 그때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러나 그때는 강제적인 데가 있었다. 특히 학교 교원이나 공무원, 일제와 협조하며 일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상인이든 기업가든 정치가든 창씨개명에 대해서 노골적인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옹호하여야 하였던 입장 때문에 서둘러 창씨개명을 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후환이 두려워 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에 대해서 일본 사람들이 찬성을 한 것은 아니다. 우선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얼굴 모양새와 피부색이 다른데 이름까지 일본인과 비슷해져 버리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조선인을 우대하는 꼴이 된다고 싫어했다. 내지의 정치인들도 총독부의 창씨개명에 대해 반대를 하긴 했으나 그것은 창씨개명의 효과 면이나 급히 서두루는 면이 있는 총독부의 업무 방법에 관한 것이었지 조선사람들의 권리나 문화를 생각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들은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가 있자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한다. 어떤 집안은 일본식풍의 두 글자를 본관으로 적기도 한다. 나 같으면 광산 김씨이니까,  光山 ** 가 되는 것이다. 대개는 金本 ** 하는 식으로 원래 성 뒤에 다른 한자를 덧붙여 형태만 일본식풍의 이름을 만들기도 했다. 어떤 이는 항거의 표시로 개새기(犬子)라는 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의 일본식 두글자가 씨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본은 씨제도 라는 이름으로 시행했다. 그러므로 창씨를 한 집안은 모두 일본처럼 같은 씨를 쓰게 되었다. 엄마, 할머니 모두 원래 자기네와 달랐던 성이 남자들의 성과 같아진 것이다. 창씨를 했으니 씨 속에 소속된 가족은 단위가 된 것이다.

이 일은 1940년 대부터 시작되었고 총독부에서는 기간을 정해 놓고 몇 프로로 달성하는가를 각 지방의 사무소를 통해 조사하였다. 그런데 또 일본사람들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하면서 너무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은 싫어했다. 일본사람들의 염려처럼 조선인은 일본인과 생김새가 비슷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말로도 구별할 수 없을터인데 성과 이름이 일본인을 닮아 버리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씨개명 기간엔 창씨를 도와준다는 사무소들이 생겨나고는 했다. 이곳에서는 그곳에 가면 부르기 쉽고 쓰기 쉬운 씨를 만드는 걸 도와주기도 했지만 일본인이 보기에 조선사람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이름을 만들도록 도왔다. 행정의 강요로 창씨개명을 하였던 조선 사람들의 일부는 이 제도를 거부하거나 저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내를 감춘 순응을 했다. 창씨개명에 관해 비판적인 언사를 한 사람들은 구속되거나 형을 살았기 때문이다.

 

시골에 묻혀 살면서 전혀 세상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창씨개명의 강제적인 요구를 벗어날 길은 없었다. 학교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생도를 진급을 시키지 않는다거나, 일터에서도 배제가 일어났다. 公의 영역, 병사나 노동자로 끌려간 조선인, 학교의 졸업생들은 모두 창씨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공의 영역에서  죽은 조선인들은 일본인풍의 씨명으로 해서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다. 희생자의 명부가 일본인 씨명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으려면 전시중의 씨명과 해방 후에 복구된 조선명이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야 한다. 증명하지 못하면 보상받지 못한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1941년에 여학교를 졸업한 어떤 여성은 지금도 동창생을 만나면 서로 일본명으로 불러야만 한다고 전한다. 한국의 이름으로는 서로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때처럼 마키노 상, 다카야마 상! 이라고 불러야만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고 한다. 

 

일본어의 특색은 친척간 구별이 단순하다는 것이다. 서구의 것과 같다. 원래 부터 친척 개념이 그랬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어를 새로 정돈하면서 달라진 것인지 어떤지 알아보면 재미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친척의 이름이 너무나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곤란하다는 말을 하게 한다. 우리 느낌으로 내 혈연과는 다른 곳에 있는 외가는 外, 바깥이어서 멀게 느껴져야 하겠지만 외자가 붙은 친척이름은 어쩐지 다정하다. 외삼촌, 외할머니 등등. 

그러나 일본어에는 고모와 이모와 숙모, 외숙모도 모두 오바상이다. 일본어 회화 시간에 이모나 숙모를 설명하면서  아줌마라는 오바상을 붙이려 하면 덧붙어야 할 수식이 많이 생긴다. 어떻게 일본사람들은 그걸 구분할까, 구분이 필요없는가 의아했다. 어쩌면 우리의 혈연중심의 사고가 만들어내는 의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 미묘한 차이를 우리는 쉽게 포기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모와 고모는 사뭇 다른 존재아닌가. 이렇게 현대적인 사회에 살면서도 그러한데,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창씨는 도저히 맞지 않은 옷을 건네며 일본사람처럼 입고 일본사람처럼 느끼라는 요구였다. 그런데 더욱 문제인 것은 그래도 조선인이 입는 그 옷엔 일본사람이라면 알 수 있도록 구별을 해 놓았던 것이다. 조선 사람 입장에서는 일본 사람처럼 성명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일본인으로서는 타인의이름만 보면 아, 이 사람이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조선인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며 황국신민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정당화 하고,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창씨를 했다 주장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그들만의 약속, 조선인은 절대 일본인이 누리는 권리를 누려서는 안 된다는 지배자의 마음이 있었다. 차별을 전제한 제도였다.

 

이 책은 바로 창씨 개명이라는 몇 년간의 정책이 가진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숨겨진 마음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보고서이며, 지금도 거짓된 주장을 일삼는 정치인과  창씨개명의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바로 알고 지금을 살아가자는 충고를 담고 있다.  학문하는 이의 객관적인 시선은 세상의 힘이다. 일본 사람이라고 일본에 쏠리고 한국 학자라고 해서 우리나라 입장을 두둔하는 것은 학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에 가깝다. 애국이 지나쳐 국수주의가 되어 버린 학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언사가 결코 미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낀다. 지금 나는 일본 사람이 쓴 우리 나라의 역사를 읽으며 그래, 그 사람 참 잘 썼구만 하고 있지만 그 너머의 것들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내 방식의 강제는 타인에게 고통이다. 내 방식엔 내 이익이 숨겨 있기 때문이고, 타인의 권리는 약화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나라의 어떤 정책이나 지배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제국주의자들을 모범으로 하여 나 이외의 타인과 우리 나라 아닌 다른 나라에서 지배권력으로서의 이익을 자행하고 있다. 역사는 오늘을 가르치고 미래를 위한 교과서이다. 이 책 또한  멀지 않은 시간의 역사를 살피면서 말하고 있다.  우리 일본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 논하며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우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더 넓게 말하지도 않았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