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夢のノート(공책)/자몽책방

일본의 재구성-2008년의 책읽기 36

자몽미소 2008. 10. 2. 19:28

  책 내용 중에서

 

 들어가며- 정지해 버린 파도

 

지금까지 근대 일본은 국가의 향방을 바꾼 두가지 역사적 변화로 자국을 규정해왔다. 하나는 1868 년 메이지 유신으로, 산업국가 건설의 개시로 본다. 다른 하나는 1945년의 패전으로, 이를 계기로 일본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여긴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랬다. 두 경우 모두 명백하게 보이는 결과물을 배출해냈다. 메이지 정권은 일본에 제철공장, 조선소, 면방직공장, 철로를 선사했다. 미국은 보통 선거권, 여성 해방, 언론의 자유 등을 안겨주었고, 소작농은 자영농이 되었다.

 

-중략-

 

메이지 시대의 꿈은 한 세기하고도 사반세기가 더 지난 1980년대에 이루어졌다. 일본은 서구를 따라잡았고, 이제는 또 다른 전진을 위해 새로운 야망을 찾아 나설 차례였다. 냉전이 막을 내리자 지난 40년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전제들이 무너져내렸다. 일본은 더욱 복잡한 세계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런데 경제 성장과 냉전 종료라는 중대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덴노'(천황)의 사망이라는 세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히로히토는 62년 동안 일본의 군국주의, 정복, 전쟁, 패전과 재건을 차례로 겪었으며, 끝으로 일본이 부유해지는 모습까지 보았다. 오랜 세월 지속된 히로히토의 영향 때문에 일본은 과거에서 벗어나지도,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지도 못했다. 결국 역사와 전통은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못했다.

 

목차

 

제 1부 자기들끼리

 

 2차 대전 후에 창작된 일본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워싱턴이 도쿄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반영하며, 제국주의 권력이 종속적 식민지를 다루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일본적 이데올로기는 각종 재료가 풍부히 뒤섞인 혼합물이다. 전통의 조작은 비단 일본 엘리트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1. 보이지 않는 일본
  2. 숨겨진 역사
  3. 일본인 되기
  4. 마음의 벽
  5. 구석에서 찾는 행복
  6. 콘크리트와 민주주의 

 

제 2부 타자와 함께

 

미국의 대담한 기만을 설령 용서하더라도 그로 인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국민이 겪은 고민과 혼란은 간과하기 어렵다. 덴노의 죄를 덮어버림으로써 점령군은 단숨에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를 조장했고 이런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갑자기 역사는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대중은 지배자의 허울좋은 기만에 대항하여 투쟁을 되풀이해야 했다. 승전자의 처분 때문에 한 나라의 전면 개조 계획이 뻔한 사기로 시작되고 말았다. "무책임"이라는 사조가 정치*교육* 외교 등 각 분야에서 파고들었다.

  1. 역사를 일관하는 정신
  2. 비어 있는 중심  
  3. 아직도 끝나지 않은 꿈
  4. 그들 안의 타자
  5. 빛 바랜 미덕 

 

나오며 

 

일본은 내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되 대외적으로는 자신과 외국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이 이런 사고에 능숙해지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국가적 목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고의 전환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다양성과 동질성 포용의 반대편에는 "일본은 다르다" 는 아시아적 가치관이 놓인다. 그런 시각에서 개인의 권리 같은 최고의 원리 원칙은 아시안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관념이 나온다. 물론 그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시아 각국의 지배층뿐이다. 피지배자들은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런 관념은 일본인이 절대로 거부해야만 하는 본질적 허위이다. 근대는 더 이상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양윤리" 나 "일본정신"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세상에 "보편 윤리"가 존재하듯 오로지 "인간정신"이 있을 뿐이다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일본에서 승리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중략 -

우리의 모순된 감정은 일본인들 자신의 모순된 감정과 거의 막상막하다. 일본은 결국 오랜 고립을 벗어나 서서히 세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든지, 위기상황에서 이런 저런 주도권을 쥔다든지, 신헌법을 채택한다든지 아니면 일본에 새로운 정치질서가 출현한다든지 하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진전도 있을 법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상 속의 일본이 현실의 일본으로, 표상이 실물로, 모방자가 진정한 자신으로 변하기 시작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 일본 교육의 임무는 인문학과 과학 기술을 연마하는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다-노리 이리노리 일본 초대 문부대신,1885년
  •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으면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러면서 일등 국가인 척한다. 무리해서라도 일등국가 반열에 오르려 애쓴다. 겉으로는 일등 국가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아무런 깊이가 없다-나쓰메 소세끼 ,<그리고>, 1909
  • 과거는 우리를 과거로만 이끌지 않는다. 기억 곳곳에는 강철 용수철이 숨어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건드리면 바로 튀어올라 우리를 미래로 날려 보낸다.-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1956
  •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듬뿍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씨를 심었습니다. 씨에서 뿌리가 나고 싹이 나서 자라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기 시작하려는 참입니다- 오에 겐자부로, 1993년 대화 중에서 

 

 

책을 읽고 내 생각 

한 블럭 골목 건넛집 여자가 우리 바로 옆집 여자 이야길 하고 있지만 결코 남의 집만 흉보는 게 아니라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우다. 이 책은 일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 나라에 적용해도 틀리지 않은 비판이 있고, 개인에게 적용해 보더라도 새겨들을만한 권고로 이루어졌다.  이야기 안을 들여다보면 정말 반성해야 하는 쪽은 옆집도 우리집도 아니고, 바로 자기집이라고 하고 있으니, 건넛집 여자 이야기가 길다고( 550쪽, 글자크기 작음) 지루해 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집 말야,  최신식 냉장고에 없는 것 하나 없이 다 해 놓고 인테리어도 고급으로 했지, 아이들은 말도 잘 듣는데,  게다가 남편이 돈도 잘 번대! 멋지지 않아? 요번 휴가엔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지! 살면 그렇게 살아야지 않겠어! 부럽더라.

근데 솔직히 말해서 뭔가 답답해, 그 여자 말야, 겉은 그런데 속내는 통 모르겠어! 부부 싸움 없이 화목하게 사는 것 같은데도 애들이랑 그 여자랑 남편에게 고분고분 하는 게 진짜 마음으로 존중해서 하는 것 같지 않고, 어딘가 참아내고 있는 느낌이란 말야!"

 

이렇게 시작한 건넛집 여자는 근대화와 근대성에 대한 이야길 한 셈이다. 

근대화는 기술 발전, 공업화 등 물질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심리 및 의식의 측면으로서 개인이 자유롭게 자주성을 견지할 능력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일본은 근대화된 나라지만 과연 근대적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 저자의 생각이고 이 책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일본에 근대는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이 책은 일본의 여러 시간을 누비고 있다. 

근대화를 위해 메이지 유신은 전통을 만들어갔다.  일본을 새롭게 만들어내자는 신흥 세력은 지금까지는 교토 구석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텐노(천황)를 국가의 중심으로 재편성했다. 천황은  200년 동안의 지배자인 쇼군을 제치고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이전 시대 쇼군에 대한 무사들의 충성은 이제 천황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국민의 것이 되었다. 이후 국민은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사쿠라꽃처럼 산화 하는 것은 일본의 오랜 아름다움으로 칭송되었다. 그런 전통을 만든 사람들은 지배엘리트 들이었다. 그들은 공적으로는 텐노와 국가를 위해 새로운 일본에서 분투했지만 사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분투했다. 지배 엘리트들이 만들어 내는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일본을 물질적으로는 근대화 할 수 있었겠지만  국민의 의식을 성장 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국민은 국가에 예속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새로운 일본을 상정하고 외국의 문물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일본 정신을 강조한다. 메이지 시대 엘리트들이 우려먹은 일본 정신은 "국체"였지만 그 뜻은 모호했다.  국체는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국체 보존을 위해 천황은 전쟁을 빨리 끝낼 수도 없었다. 국민은 국체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고 죽어갔다.

 

역사는 보기 흉한 부분을 가리고 축소하는 등 이곳저곳을 가위질함으로써 적당히 원하는 대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패전 후 일본을 재편성한 것은 미국이었다.  일본의 과거는 새로운 목적에 맞도록 재구성되었다. 국민의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던 봉건적 관습은 새삼스럽게 전통으로 변모했다. 이 전통은 텐노가 전쟁에 반대했었으며 전쟁광인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히로히토를 살리고 대신 일본지배권을 얻었다. 평화를 선언하며 군대를 만들지 않겠다는 헌법을 만들게 한 것도 미국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일본에 민주주의를 선물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일본이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서 일본은 민주주의를 실험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냉전의 시기, 미국은 일본에게 강요한 평화 헌법을 살짝 후회 하기도 하였다.  세계를 자기 나라의 손아귀에 넣고 싶은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의 우산 아래 있으면서 일본이 동아시아의 일정부분을 맡아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미국측의 계산하에 종전 후 3년이 채 안 되어 미국은 일본의 권력자들을 이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정치와  경제에서 전전 시대의 권력자들이 다시 일본의 중심을 잡았다. 국민은 다시 사무라이 정신으로 기업과 국가에 충성을 하게 되었다. 개인은 용납되지 않았고 능률을 강조하는 집단에서는 자꾸만 타자를 만들어냈다. 일본에 사는 외국인, 오끼나와 주민과 아이누 족, 일본인 안에서의 부락민, 또는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와는 다른 사람으로 차별되더니 급기야 일본은 자기 스스로를 타자화 했다. 자기 직면을 할 수 없는 개인들은 자기 삶을 성찰할 수 없게 되었다.  개인에 대한 성찰 부족은 이 나라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이끌지 못한다. 그래서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에서 일어나는 일본의 평화 운동에 대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질문은 거의 동일하다.

"전쟁에서 죽고 다친 일본 사람들에 대한 연민 말고, 도대체 왜 그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일본의 재구성 』은 일본을 만들어 온 주체가 결코 국민이 아니었음을 역설하는 책이다. 위로부터 이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의욕이 있을 때마다  재편성되었던 일본이 이제는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 스스로 제대로 바뀌 볼 때가 되었다는 것, 시기적으로 기회를 많이 놓쳤고 늦긴 했지만 자기의 역사와 사회를 돌아봐야 될 때가 되었음을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대내외적으로 반대가 많은 헌법 제 9조의 변경도 해 볼만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국내외 평화 운동가들은 헌법 제 9조를 바꾸면 일본이 다시 제국주의의 망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지만, 일본인들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합의할 수 있는 문제로서 이 사항을 제안하고 있다. 평화 헌법이라는 허울은 좋지만 그 헌법은 천황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만든 미국의 생각이지 일본인들이 논의하고 합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저자가 이 책을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썼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한국 전쟁에 깊이 관여한 미국이 우리 나라에 끼치는 악행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 신문은 미국 병사 한 사람에게 일 년 동안 5700 만원이 든다고 알려준다. 1991년 이후 해마다 늘어 초기의 금액 보다 6.91 배 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육이오 전쟁 때 미국이 있어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나라가 될 수 있었고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고 교육받았다.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고 미국의 모든 것은 좋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소이다. 과연 그런가?

미국 병사를 먹여 살려가면서 우리가 얻는 이익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로 이 세계가 지향해야 할 미래에 부합되는지 수긍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답게 세계 속에서 미국의 국방비와 세계 평화가 비례하는 것인지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의견을 묻는다면 아무도 고개  끄덕이는 사람이 적을 테지만, 미국은 지금도 여전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의 탈을 쓰고 스스로의 제국을 넓히고 있다. 그 제국에 종속된 나라가 이 책의 일본만인가.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한다고 빨갱이 용공분자가 되는 이 나라가 과연 미국과 동등한 자세를 견지해 볼 수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을 빨갱이로 몰면서 미국의 힘에 들러 붙어 있는 지배층이 공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국민은 국가를 위한 존재인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더 이상의 불평은 어느 날 경찰로부터 조사를 위해 나와 달라는 영장을 받게 될 원인이 될 수도 있을테니 그만 두자.  쇠고기 수입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촛불시위를 맞불을 동원해 몰아내던 나라이다. 중국산 맬라민 파동은 국민의 요청에 같이 둥둥 북소리를 내면서도, 유독 미국에서 오는 불량식품엔 관대했던 이유를 더는 캐지 말라고 강요를 하는 나라이다. 우유는 수거하면서 들여올 쇠고기는 전량 검사하겠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 대해 쓸 때 이 나라의 주체성에 대해 분명히 비판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므로 일본의 재구성에 관한 책이 아니라 한국의 재구성으로 읽어도 좋은 책이다. 바르지 않게 재구성하였던 과거와 바르게 재구성해야 할 미래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긴 글을 개인 삶으로 바꾸어 생각해 봐도 일리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와 독립, 개성과 주체성은 누가 하는 것을 따라하고, 돈으로 표시나는 것들을 구입하고, 나를 알아줄 남에게 보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기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과연 그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묻고 노력하는 가운데 나올 것이다.    자기를 직면하며 성찰하고 관리하는 미덕은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모두의 일일진대, 어찌 일본이라는 나라 하나에 국한할 수 있으랴, 좋은 본보기로 일본을 들었을 뿐이지, 이 책은 결국 내가 속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